EP.138
데미안은 선물을 들고 가만히 있었다·
트리샤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의 내면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동요가 일고 있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눈은 손에 든 선물에 향해 있지만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무감각한 표정· 그 얼굴은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라기 보단 이미 죽은 사람이 선물을 들고 경직된 것 같았다·
선물은 무엇이며 데미안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트리샤의 감으로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데미안··· 오늘 생일이었어?”
“····”
데미안은 미동도 없었다· 트리샤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진다· 그녀는 조금 초조해진 어조로 말했다·
“···누구야?”
그리고 데미안은 어느틈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니 모르는 사람이 잘못 둔 거 같은데· 내 생일은 이미 지났어·”
목소리도 평소의 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트리샤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말투도 행동도 다 똑같았지만 그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분명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다 ‘더 들쑤시지 말라’는 연극부 선배의 말을 떠올리고는 더 캐묻지는 않았다·
괜히 건드렸다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모습으로 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트리샤는 두려웠다·
“누가 호실을 착각했나본데 선물은 메이드한테 맡겨야겠다·”
“····”
그는 화제를 전환하려는 듯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보고 싶어했지? 들어와·”
***
윗드러프관에서 짐을 챙기고 데미안과 트리샤는 안개 속을 걸었다·
다행히 그 둘의 대화는 막히는 거 없이 계속 이어졌다·
트리샤가 뒷짐을 지고 폴짝뛰며 앞서갔다· 그러고는 휙 돌아서 데미안을 보며 말했다·
“아직은 1학년끼리 연극 준비하고 있는데 나는 점점 연기가 늘어서 메인 연극에서 조만간 비중이 큰 조연을 맡을 수도 있대·”
“적성에 잘 맞나보네·”
“그치! 이런 재능을 구석진 곳에 썩혔다니 연극의 신이 있었으면 분명 크게 분노했을 거야·”
그리고는 신난듯이 다시 앞서서 쪼르르 달려갔다·
트리샤는 데미안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의 응어리를 떼어주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재밌는 경험 일상들· 주변 사람과의 헤프닝· 많은 것들을 쏟아냈고 그 둘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눈을 마주보고 대화를 해도 데미안은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주연을 차지할 때까지· 더 연습해야지·”
“알아! 그래서 오늘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안개가 걷히고 가시정원이 보였다· 트리샤는 가시덩굴로 된 담장 앞에 섰다·
“뭔데?”
“나 대본 연습하는 거 도와줘·”
그리고 그녀는 데미안을 등지고 다시 앞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몇 걸음 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데미안은 앞으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바로 직감했다·
트리샤의 마음이 점점 축 처졌다·
그의 마음 속에 다른 것이 자리잡고 있다는 게 거슬렸다· 불편한 감정은 발바닥에 박힌 작은 가시처럼 움직일 때마다 살속으로 깊게 파고드는 것 같았다·
트리샤는 뒤돌아보았다·
그는 가시정원에 들어서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늘은 안 돼· 늦게 들어올 테니까 먼저 자·”
“···왜? 뭐하려구?”
“아직 수련이 남아 있어·”
그러면서 그는 품안에서 가면을 꺼내 얼굴에 썼다· 그러자 트리샤가 따지듯이 물었다·
“원래 이 시간에 수련 안 하잖아· 그리고····”
데미안은 트리샤의 말을 끊고 무덤덤하게 답했다·
“가끔 변덕이 들어서· 갈게 푹 쉬어·”
그리고 그는 뒤돌아서 떠났다· 여기까지 온 건 트리샤를 배웅하는 것이 목적이지 애당초 함께 있을 생각이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
트리샤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력감에 잠겼다·
***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넘어가고 세상은 온통 붉게 물들었다·
릴리트는 마법 수련 중에 파괴된 플랜테라의 잔해들을 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아직은 불씨가 작아 충분히 따뜻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가에 손을 모아 후후 불며 차가워진 손을 녹였다·
그러던 중에 플랜테라 하나가 느린 몸짓으로 릴리트 앞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가죽을 벗긴 산토끼를 내밀었다·
“···먹으라는 거야?”
플랜테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저 릴리트가 받아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이를 받아들고는 말했다·
“···자꾸 이러지 마· 너네들 부시기 미안해지니까·”
플랜테라는 그녀의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목적을 이루자 일어서서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최근 들어 플랜테라의 습성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원래 이런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녀에게만 다르게 대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가끔씩 그녀의 말을 가끔씩 따라주는 것 같을 때도 있었다·
그녀는 거대한 토끼고기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어설프게 꼬챙이를 끼워서 굽기 시작했다·
“이런거 잘 못먹는데····”
그렇게 한참을 굽던 중에 그레이스 산으로 이어지는 언덕 부근에서 굉음이 울렸다·
콰앙!
깜짝 놀란 릴리트는 고개를 돌렸다· 산새들이 요란하게 하늘로 날아대고 숲 너머로 요란스런 하얀 빛이 번쩍거렸다·
토끼 고기가 타는 줄도 모르고 그 광경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매케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나서야 그 표면이 검게 그을려진 걸 깨달았다·
그녀는 고기는 아예 포기해버리고 번쩍이는 빛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저건···”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몸을 일으켜서 그 방면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직감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면 분명 알고 있는 사람이 그곳에 서 있을 거라고·
그렇게 숲으로 들어갔다·
깊이 들어갈수록 긴장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곧이어 플랜테라의 잔해들이 발에 밟히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릴리트가 벌여둔 게 아니었다· 검을 쓰는 누군가가 잘라놓은 것이었다·
굉음이 점점 가까워진다· 마치 전쟁터에 온 듯이 격렬한 전투의 소리가 울려퍼진다·
플랜테라의 잔해가 크고 두텁다· 릴리트는 그제야 이 구역이 상급생들도 꺼린다는 플랜테라 정찰병의 구역이란 걸 깨달았다· 이는 수련용이 아닌 살상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을 마주했다· 일반적인 사람 두 배 높이의 플랜테라들이 한 곳에 우르르 몰리고 있었다· 몽둥이가 사정없이 난무한다· 플랜테라의 손짓 한 번에 땅이 패이고 나무가 꺾여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면을 쓴 남자가 수십의 플랜테라를 혼자 상대하고 있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검을 들고·
플랜테라는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마치 멧돼지떼를 연상시킬 정도로 저돌적이었는데 남자의 칼이 닿는 범위에 들어서면 무참히 도륙났다·
마치 광인을 보는 것 같았다· 검이 없었으면 손으로 손이 없으면 이빨로 물어 뜯었을 것 같은 기세였다·
털이 곤두설 정도의 살기· 그리고 그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압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해서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달려드는 모든 플랜테라를 처리하고 남자는 잠시 멈춰서서 숨을 헐떡였다·
그 또한 성한 몸뚱이가 아니었다· 머리와 팔뚝에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남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릴리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큰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출혈이 심해· 상처를 치료 안 하면 결국 쓰러질 거야·”
그는 팔에 핏대가 올라올 정도로 검을 꽉 쥐고 릴리트에게 등을 보인 채로 서있을 뿐·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말을 듣고 있는 것일까·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산짐승을 보는 기분이었다· 당장에라도 한발짝 다가가면 그녀 또한 가차없이 베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두려운 감정이 들었다·
그는 릴리트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더 깊은 산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싸움에 굶주린 사람처럼·
***
가시정원 기숙사의 문이 거칠게 덜컥 열렸다· 트리샤가 그 문소리를 듣고 조심스럽게 계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난간에서 목을 빼꼼 내밀고 1층을 살폈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데미안!!”
그는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대문 앞에서 엎어져 있었다·
트리샤는 뛰어내리다시피 계단을 내려와 서둘러 데미안의 몸을 살폈다·
“데미안 데미안 어쩌다가···!”
그는 실신한 상태였다·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고 상처가 가득했다· 수련을 한다면서 죽기전까지 몸을 혹사시킨 것이었다·
우선 방으로 옮겨야 했다·
그녀는 난데없이 화가 솟구치는 바람에 그게 소리쳤다·
“데미안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해!”
트리샤는 그의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힘에 부쳐서 방법을 바꿔 팔을 잡아당겼다·
데미안이 송장처럼 늘어져서 팔 하나만 붙잡힌 상태로 질질 끌렸다· 그리고 몸이 지나간 곳엔 길게 핏자국이 이어졌다·
거기다 그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직 숨을 쉬고 있나 확인해야 할 정도였다·
트리샤는 천불이 난 나머지 듣지도 못하는 데미안에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데미안은 진짜 혼나야 돼!”
그를 방으로 옮기고 서둘러 비상용 포션들을 챙겨왔다· 그리고 물불 안 가리고 몸에다 포션을 털어넣었다·
***
그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도망치고 있었다· 수세에 몰려 계속 높은 언덕을 올라갔다· 거대한 화염구가 옆으로 빗겨나간다· 뜨거운 감각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생생하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는 달리는 와중에 뒤를 돌아보았다· 은빛 철갑을 입은 기사들· 그리고 새하얀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이 그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를 데리고 언덕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그 끝에 마주한 것은 아래에 강물이 흐르는 높은 절벽이었다·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데미안은 그 사람을 등 뒤에 세우고 추격하는 이들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칼을 뽑았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반원형태로 진을 펼친다· 그리고 한걸음씩 앞으로 나서며 점차 압박해온다·
칼날같은 바람이 불고· 뒤에 있던 사람의 머리카락이 데미안에게 닿는다· 길고 가는 머리카락· 여자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 모든 게 이질적인 상황임을 깨닫는다·
데미안은 꿈속의 한 장면임을 자각했다·
매일 밤 맞이하던 흐릿한 꿈이 이제는 선명하고 또렷한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모든 게 꿈인 것을 알자 그는 눈앞의 위협을 내버려두고 등뒤에 있는 여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뒤엔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
예지몽을 꿀 때와 비슷한 선명한 감각·
문제는 눈앞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 있다는 것이다·
곧이어 꿈이 붕괴되었다·
점점 현실감이 돌아오고 데미안은 잠에서 꺠어났다· 잔뜩 긴장해 있던 탓에 손바닥엔 땀이 가득했다·
그는 가시정원 기숙사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문 밖으로 안개에 산란된 햇빛이 은은하게 들어왔다·
전날 밤 기숙사에 돌아온 뒤로는 사실 기억이 없었다·
배 위에 무거운 감각이 느껴진다· 그는 고개를 살짝 들어 이를 확인했다·
침대 옆에서 트리샤 그의 배에 머리를 올리고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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