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0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공녀와의 일을 우숩게 여긴다는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불손한 답변이었다·
그녀의 주변에 포진해 있는 신하와 호위병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데미안은 농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공국의 후계자를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용암이 들끓는 것처럼 강렬했다·
실베린의 제자라는 꼬리표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소년인데 이 용감함의 근거는 무엇일까·
비비는 아니꼬운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당당하면서도 한편으로 오만하구나· 언사에 걸맞는 실력을 보여주리라 기대하겠다·”
능력을 감추고 있다고 해도 다른 이들을 압도적으로 상회하지도 않을 터였다· 풋내기 수준의 1학년이니 비비의 최정예 호위대랑은 비교조차도 할 수 없었다·
명성을 떨치는 호위대들 조차도 비비의 앞에선 납작 엎드린다·
어쩌면 무지하고 철이 없어서 감정만 앞서는 것인지로 몰랐다·
비비는 마저 말을 이었다·
“나 율리시아 공국 군주의 적통 후계이자 가이낙스 대공의 장녀 비비 가이낙스는 이 시간부로 그대 데미안을 고용하고 호위대에 합류시키겠다· 그대의 육신과 검은 나를 위해 일할 것이며 나 또한 그대의 검과 육신에 내 목을 맡기겠다· 그대는 비록 용병이나 그 공국의 그 어떤 기사들보다 육중한 사명을 짊어졌음을 기억하라·”
비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데미안의 앞으로 걸어가 손등을 내밀었다· 이는 계약 절차 중 하나였다·
“손등에 입을 맞춰서 충성을 맹세하고 그대의 각오를 내가 보는 앞에서 선언하라·”
데미안이 비비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옅은 쓴웃음을 짓고는 그녀의 손을 받쳐 들어서 진하게 입을 맞췄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수려한 용모가 더욱 도드라졌다· 실베린이 그저 가엾다는 이유만으로 거뒀을 리가 없었다· 그 마녀는 자선가가 아니었다·
“비록 미천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이지만 이 한 몸 바쳐 당신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운명마저 그대를 저버린다 한들 저는 당신을 구해내겠습니다·”
“···”
주제에 안 맞게 거창한 각오였다· 왕국의 마지막 남은 기사라도 되는 것마냥 결연하다· 뱉은 말을 정말 지킬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비비와의 여정에서 그 정도의 고난은 만나지 못할 것이었다·
실베린은 어쩌면 이 소년의 정치적 도구로써의 막대한 잠재력을 발견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미치자 비비는 다소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그대의 각오를 기억하겠다· 그대의 육신은 오늘부로 나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계약은 성사되었다·
그는 스승을 대신해 더럽고 궂은 일을 도맡아야 할 것이다·
***
“앉아·”
칸디넬라 교수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머리가 지끈지끈한지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
“공녀의 제안을 고사하다 결국엔 수락했다고?”
“그렇습니다·”
“나는 여전히 네 차출에 반대하는 입장이야· 아직 학기 초에다 넌 특히 함부로 떠돌아다니면 안되는 처지야· 알아?”
“알고 있습니다·”
“그저께 갑자기 실베린이 길길이 날뛰면서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냐고 묻더구나· 그래서 ‘잘 있다’고 답했지· 근데 얼마나 지났다고 일이 벌어지니·”
이런 실베린이 진짜 내 허술한 말장난에 속았던 거구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런 건방지고 버릇없는 녀석아· 앞으로도 실베린을 잘 속여달라고? 너 화난 실베린 모습 한 번도 못 봤어?”
“···”
“안돼· 안전하지 않아· 애당초 이 임무는 성사될 일 없을 거야· 네 의사보다 이터니아의 결정이 우선이니까· 불명예를 뒤집어 쓰더라도 내가 다 무효화할 테니까 다음 수업 준비나 해·”
“괜찮습니다· 저는···이터니아에서도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래서 교수들이 북부를 내버려두고 이터니아로 복귀했지· 이제 이터니아는 안전하니까 가만히 있어·”
이미 끝난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예지몽을 꿨습니다·”
“···뭐?”
“그 꿈은 절 실베린 교수님께 이끌고 결국 이터니아로 도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죽어가던 예지능력이 마지막 힘을 쥐어짠 듯이 제게 미래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지몽 이야기를 꺼내니 칸디넬라 교수의 태도가 달라졌다·
“···무슨 너는 마법 능력이 하나도 없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저는 가야합니다·”
칸디넬라 교수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너 마법에는 전혀···아니 그래 예지몽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실베린이 이걸 모르고 있을 리가 없고· 그럼 하나만 묻자· 확실한 거야? 확실한 계획과 미래가 있는 거냐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칸디넬라는 착잡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뒤로 쓸었다·
“솔직하네· 완벽한 계획이 있다고 했다면 널 막았을 거야· 미래는 언제나 인간의 기대를 배신하고 기만하거든· 음··· 그렇지만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 되지· 그 힘이 아직 네게 할 말이 있다는 거니까·”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칸디넬라가 미간에 힘을 주고 내 눈을 응시했다· 잠깐의 정적 뒤에 다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 허락할게· 하아 뭐 필요하다거나 부탁할 거 있어?”
“마침 필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
세실은 두꺼운 책을 끌어안고 어둑해진 캠퍼스를 걸었다· 수업 일정은 끝났고 학생들은 전부 기숙사에 머물 시간대라 길은 텅 비어 있었다·
달빛에 의지해 나아가던 중 가로수 사이로 한 불빛이 반짝거렸다· 꼭 도깨비불을 보는 것 같았다· 호기심이 동한 세실은 발소리를 죽이고 그 불빛을 따라갔다·
“···?”
가까이서 보니 그건 주먹만한 크기의 새였다·
날를 퍼득거릴 때마다 불씨가 뿜어져 나오는 걸 봐선 정령이었다· 포동포동 살이 올라서 날개짓이 조금 버거워보였다·
그 새는 열심히 날아서 한 나무 뒤로 모습을 감췄다·
세실이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라가니 나무에 숨어있던 사탕이를 마주했다·
포동포동한 정령은 사탕이의 손 위에 앉아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
세실이 그를 보고 반가운 듯이 말했다·
“우리 둘만의 비밀 장소 하나 만들자· 소리도 안 새어나가고 눈에도 안 띄는 조용한 곳에·”
“술취해도 금방 기숙사로 데려다 줄 수 있는 곳이면 좋겠는데·”
세실이 들고 있던 책으로 사탕이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너랑 다시는 술 안 마셔·”
그녀는 적당히 폭력을 행사하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슥슥 넘기고 말했다·
“그래서 갑자기 왜 나타난 거야?”
“마침 네 도····”
“도움이 필요하단 소리 할 거면 난 그냥 가던 길 가려구·”
그는 능청스럽게 말을 바꿨다·
“···밤길이 좀 으스스한데 기숙사 데려다줄게·”
세실이 픽 웃으며 말했다·
“완전 좋지!”
그녀는 사탕이와 함께 걸었다· 은근슬쩍 그에게 팔짱을 꼈다·
그가 가볍게 대화를 건넸다·
“늦게까지 공부하네·”
“마도학자는 공부할 게 너무 많거든· 어려운 부탁을 하는 이상한 친구 때문에 요즘 유독 바쁘기도 하고·”
“···못된 친구를 뒀네· 그런 애랑 놀지 마·”
“내 마음이 너무 약한 게 문제지· 귀엽지만 않았어도 확 절교했을 거야· 근데 아까 그 참새는 뭐야?”
“내 정령·”
“살 쪄서 잘 날지도 못 하는 거 같은데···괜찮은 거 맞아? 난 그런 통통한 정령 처음 봐·”
“조만간 운동 좀 시키려고·”
“네가 그 쪼만한 참새 훈련시킨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웃겨·”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금방 윗드러프관 앞에 도달했다·
“다 왔네· 고생했어!”
“어서 들어가·”
세실이 팔짱을 풀은 뒤 그를 뒤에 남기고 기숙사 현관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문 손잡이를 잡고 밀고 들어가려다 잠시 멈춰섰다· 그러다 한숨을 쉬고는 휙 뒤돌았다·
“에휴 내가 졌다· 그래서 부탁하려던 게 뭔데?”
“너 데려다주려고 온 건데·”
“진짜 들어간다? 괜히 배짱부리지 말고 말해·”
사탕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네게 맡겼던 순환계 마석이랑 서리바람 폭탄이 필요해·”
“폭탄은 얼마나 필요한데?”
“가능한 많이·”
“어디다 쓰려고? 혹시 전쟁이라도 나가?”
“정령 운동 시킬 때 유용할 것 같아서·”
뻔한 거짓말이었다· 세실은 눈을 좁히고 의심스런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 한숨을 푹 쉬었다·
“사탕아 폭탄 하나에 얼마나 하는 줄 알아? 그냥 원한다고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그걸 정령 뱃살 빼는데 쓴다구?”
“···장부에 달아놔· 이자도 두둑하게 뜯고·”
뭔가를 꾸미는데 계획을 공유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알았어· 가져다 줄게· 뭘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치지만 마·”
***
나는 호위 임무를 대비해 가시정원에서 짐을 챙겼다· 에르제베트의 팔찌 목검 그리폰 포션을 비롯한 기타 회복 포션들·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겨야 했다· 마스터스 클래스가 아닌 일개 전투부 학생 신분으로 활동하는 것이니 꽁꽁 숨기는 작업도 필요했다·
그러다 잠시 지난 밤의 꿈을 복기했다· 나는 공녀의 손을 붙잡고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쫓던 이들은 바로 오늘 마주했던 공녀의 호위병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공녀를 납치하는 것일까· 일반적인 흐름으론 도무지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꿈이 얼마나 뒤엉킨 걸까· 정말 그 장면이 있는 그대로 벌어질까?
끼익-
생각에 잠긴 와중에 돌연 방 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 나는 정리를 하다 말고 문을 바라보았다·
트리샤가 풀어헤친 백발머리를 하고 말 없이 방안에 들어섰다·
한 손에는 두터운 베개를 바닥에 질질 끌고 있었다·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일까· 표정도 트리샤답지 않게 어두웠다·
“어쩐 일이야?”
“소문 들었어· 호위 임무 나간다면서·”
“응 어쩌다보니·”
그녀는 내 앞으로 와서는 난데없이 베개를 휘둘렀다· 푹신한 것이 내 몸을 강타한다·
“···!”
“너! 좀! 혼나야 돼! 등신같이 걱정만 끼치고 말은 죽어라 안 듣고 혼자 이상한 짓거리나 해대고 외지로 나가면서 친구한테 한마디도 없고 왜 이렇게 걱정만 끼치고 살아!”
베개가 사정없이 내 몸을 강타한다·
트리샤는 베개를 몇 번 휘두르다 놓쳐버렸다· 한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주먹을 쥐고 마구잡이로 내 몸을 때렸다·
힘이 약해서 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럼에도 흥분이 안 풀렸는지 팔을 흔들며 마구잡이로 저항했다·
“놔! 놔! 넌 더 맞아야 돼!”
“트리샤·”
“너랑 친구 하겠다고 한 내가 바보지!”
“트리샤·”
“놔! 놓으라구!”
아무리 팔을 흔들어도 힘이 안 된다는 걸 차차 깨달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항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나는 서둘러 그녀를 진정시킬 말들을 쏟아냈다·
“···율리시아 공국에서 궁정 요리 배워서 올게·”
“너랑 안 놀건데!”
“그래 2주 정도만 안 놀면 돌아와 있을 거야·”
“····”
“그때 대본 연습도 도와줄게·”
여전히 잔뜩 토라진 얼굴이기에 약속을 하나 더했다·
“····”
“뭐 먹고싶어?”
트리샤가 속으로 갈등하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호박크림치즈파이·”
“아침에 해놓고 갈게·”
***
다음날 아침 공국 측의 시종이 날 마중하기 위해 생활동까지 마차를 끌고 나와 있었다· 공녀의 일정이 촘촘하게 짜여진 탓에 나도 덩달아 정신없이 준비해야 했다· 일정이 늘어질수록 내 학업 공백도 길어지기에 차라리 바쁜 게 나았다·
나는 윗드러프관에서 옷가지를 마저 챙겼다· 세실의 서리바람 폭탄과 순환계 마석도 다 챙겼고 마지막 하나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1층으로 내려와 중앙 라운지의 벽난로 앞에 섰다·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어 고요했다·
나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생일 선물 상자를 한 손에 들었다· 열어보지도 않았고 익숙한 필체로 쓰여진 ‘생일 축하해’ 쪽지도 그대로였다·
과거의 기억이 다시금 꼬리를 물고 기어나온다·
그 기억들은 더이상 내게 행복감을 안겨주지도 않는다·
나와 리자는 갈라진 채로 오랜기간 달려왔다·
너무도 멀어져서 이제는 그 어느것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
손바닥을 천천히 벽난로 쪽으로 기울였다· 이 작은 상자는 천천히 미끄러져서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위로 떨어졌다·
상자는 불길에 휩싸여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곧이어 내용물과 함께 알아볼 수도 없는 재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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