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4
니엘렌이 칼을 뽑으며 살기를 드러냈다·
“나와라 미행에는 어설프기 짝이 없군·”
새벽이라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사람이라면 전혀 감지하지 못할 법한 거리임에도 그는 미행자의 위치를 감지해냈다·
바위 뒤에서 남자가 걸어나온다·
바로 데미안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목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니엘렌이 고압적으로 데미안에게 물었다·
“흠 이터니아의 새로운 쥐새끼로군· 말해라· 공국의 정보를 캐내라는 명이라도 받았는가?”
데미안은 침착하고 정중하게 답했다·
“본래 야간에 용무를 위해 이동할 시엔 2인 1조로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라 알고 있습니다·”
니엘렌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 시녀와 한 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만·”
“그건 아닙니다만 어린 소녀 혼자 야밤에 무단으로 진영을 나가는 건 가만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총지휘관님과의 오붓한 밀회를 위한 것이었음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상대방을 수렁에 밀어넣고 자기는 빠져나가려 들었다·
교활한 말재주에 니엘렌이 실소를 지었다·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다만 오늘 엿들은 내용을 발설했다간 큰 대가를 치를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괜한 오지랖으로 밀회를 방해한 점 사죄드립니다·”
니엘렌의 살기가 거둬졌다· 그는 칼을 집어넣었다·
“퍽이나 동료애가 넘치는 듯한데 듣자하니 네 녀석이 감히 공녀님의 직속 호위가 되겠다 요청했다고?”
“공녀님과 맺은 맹약이 그러했을 뿐입니다·”
니엘렌은 옆에 서있던 시녀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녀는 니엘렌과 데미안에게 번갈아 고개를 꾸벅하고는 캠프 쪽으로 사라졌다·
니엘렌이 훈계조로 말했다·
“고작 말단 병사 하나 곤죽을 만들어 냈다고 뭐라도 이룬 것마냥 착각하지 마라· 공녀님의 옆은 오랜기간 공국에 헌신해온 기사들에게도 감히 허락되지 않은 자리다·”
호위대에 끼지 않는다는 건 그 또한 보호대상 안에 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그냥 잠잠히 지나가도 큰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데미안이 일부러 도발하듯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럼 당신과 직접 싸워서 자격을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어쩌면 실베린의 이름을 등에 짊어지고 있어 무리하게 나서려는 건지도 몰랐다· 그런 것이라면 더더욱 기용할 수 없었다· 첫째로 비비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둘째로 마음만 앞서면 늘 일을 그르치기 때문이었다·
니엘렌은 도발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호위대는 아직 갈길이 멀다· 공연히 쓸데없는 일에 힘을 빼고 싶진 않군·”
니엘렌은 휙 돌아서서 어둠속으로 걸어갔다·
데미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멀어지는 니엘렌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알수없는 말을 했다·
“저도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간밤의 일은 별다른 이변 없이 지나가고 나는 천막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눈을 뜨고 잠시 그때 상황을 복기했다· 니엘렌과 시녀 이 둘은 공녀와 관해서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상하긴 하지만 정말 역모 내지 배신과 관련된 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역모를 꾸미고 있었다면 분명 엿듣고 있던 날 죽이고 사고사처럼 위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확실한증거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뭘하든 언젠가 븐먕 나와 공녀를 죽이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게 될 테니까·
그러던 중 나와 친해진 시녀 중 하나인 미샤가 내 천막을 슬쩍 걷어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 이 일어나셨어요?”
나는 모포를 걷어내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네 어쩐일이시죠?”
“어 아니다· 아니에요·”
“···?”
그녀는 떠나려다 말고 찝찝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저 다름이 아니라 저기 그···혹시 폴리를 혹시 보셨나요?”
폴리는 나와 같이 마차를 낑겨 타던 다섯의 시녀 중 한 명이자 바로 간밤에 니엘렌에게 불려간 바로 그 소녀였다·
“봤습니다·”
“어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조식 당번인데 통 보이질 않네요·”
“새벽 중에 어디로 나가는 건 봤습니다· 비밀스럽게 움직이던데요·”
“아! 그런거면 됐어요·”
별다른 설명도 붙이지 않았는데 미샤는 늘상 있는 일이라는 것처럼 바로 납득해버렸다·
“자주 있는 일입니까?”
“아! 그럼요· 폴리는 이따금 밤마다 공녀님의 목욕 시중을 들어야 해요· 밤 늦게 일하니까 다음날엔 아침엔 쉬게 해줘요·”
“···목욕 시중이요?”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목욕 시중을 그렇게 비밀스럽게 수행할 필요가 있을까·
“네 근데 폴리 말고는 아무도 공녀님의 입욕 시중을 든 적이 없어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미샤가 조금 곤란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천막 바깥을 망보듯 슥 살피고는 내게 다가와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공녀님의 병···때문이라는 말이 있어요· 다들 그렇게 짐작은 하는데 함부로 입밖으로 꺼내지는 못해요·”
공녀가 유전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은 일전에 들은 바 있었다· 겉보기엔 그리 병든 사람 같지는 않아서 크게 신경쓰이지는 않았는데· 대체 무슨 병을 앓고 있길래 그런 걸까·
지금 상황에선 정보를 취합해봐도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그 꿈의 장면까지 날 인도하는 걸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지·
그러던 중 천막 너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비상이다! 전원 집합하라!”
부우우웅-
곧이어 말발굽이 달그락거리며 웅장한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원 기상!”
곧이어 온 사방이 분주한 발소리에 잠긴다·
이른 아침부터 비상 소집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병장기를 챙기고 천막 밖으로 튀어나왔다·
시녀 미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쩔 줄 몰라한다·
“어 어! 데 데미안님은····”
“당신은 나갈 필요 없을 거예요·”
나도 무기를 챙기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캠프 중앙에서 뿔나팔을 든 기수가 급령을 내렸다·
“긴급 상황이다· 전원 전투 태세를 갖추고 마을 남서쪽으로 진군하라· 당장!”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갖추고 명령받은 곳으로 뛰쳐나갔다· 마을 반대편의 2번 캠프에서 마법사들도 로브를 펄럭이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나는 서둘러 그들을 뒤따랐다·
캉! 캉!
담장 너머 한 공터에서 새벽녘에 비친 검광이 연신 번쩍거렸다·
그리고 고막이 아플 정도의 포효가 벼락처럼 울린다· 이동하던 병사들이 놀라 잠깐 몸을 움츠릴 정도였다·
“저기다! 저기 마수가 있다! 어서 저들을 지원하라!”
그곳엔 머리가 두 개 달린 사자를 상대로 네 명의 기사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사자 같은 마수는 몸집이 불곰보다 두어배는 컸다· 일찍이 마수를 상대하던 기사들은 심각하게 고전하고 있었다·
이미 두어 명은 복부에 과할 정도의 출혈이 발생한 상황이었다·
마수가 마을까지 기어내려오다 정찰대에 발각되어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지원을 나온 병력들이 서둘러 달려가 전투에 합류했다· 이미 수어번 모의 훈련을 받았는지 눈 깜짝할 새에 전열이 갖춰진다·
기사들이 전면에 선다· 마수가 으르렁대며 앞발을 휘두르자 일제히 검을 휘두르며 견제했다· 그러는 틈에 후열에 있던 마법사들이 서둘러 스펠을 외운다· 공수 연계가 물흐르듯 매끄러웠다·
곧이어 허공에 마법 불덩이들이 현현하고 곧바로 마수에게 쇄도했다·
쾅!
폭발을 피해 녀석이 갈기를 휘날리며 재빨리 몸을 뒤로 빼냈다· 국면은 바로 대치 상태로 전환되었다·
한순간에 수십에 달하는 지원군이 몰려 마수를 애워싸자 놈은 곧장 몸을 돌리고 숲 속으로 달아났다·
맨 앞에서 맞서 싸우던 여기사가 소리쳤다·
“추격을 멈춰라!”
숲까지 진격하려던 기사들이 엉거주춤하게 멈춰섰다·
좋은 판단이었다· 마수학 수업에서 늘상 강조하는 원칙이 있다· 숲속은 머수에게 극도로 유리한 전장이라는 것이다· 수적으로 우위라고 뛰어드는 건 녀석의 주둥이 안으로 들어가는 거나 다름없다·
우선 부상자를 추리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에 토벌에 나설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는 내게 중요한 기회였다·
***
“로빌리온이 동면을 마치고 양분을 채우기 위해 마을로 내려온 듯합니다·”
제럴드의 말을 들은 비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촌장은 공녀의 앞에서 넙죽 엎드려서는 벌벌 떨고 있었다· 그는 마수의 출현과 관련하여 미리 언질를 넣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이 물릴까 두려워했다·
다만 비비는 잘잘못을 따지는 데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 마을은 마수의 습격이 빈번한가?”
촌장이 답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저 놈은 이따금 일년에 한 두 번씩 저희를 쫒아다니며 가축과 갓난아기를 잡아먹곤 했습니다· 분명 작년에는 들개 정도 크기에 지나지 않던 녀석이 저리 거대해져서 오리라고는····”
“몇몇 마수들은 인간과는 달리 일이년이면 성장이 다 끝난다· 그래서 미리미리 토벌하는 게 중요하지·”
마을에 남은 청년이 없어 토벌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으리라·
호위대 입장에선 결코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었다· 그냥 둔다면 마을 주민이 모조리 마수의 밥이 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추후 호위대를 뒤따라 올 수도 있었다·
비비는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짓으로 촌장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했다· 촌장이 절을 올리고 나가자 제럴드에게 말했다·
“최소한의 병력만 남아 마을을 지키고 나머지는 토벌대를 꾸려 마수의 근거지로 진격하라고 전해요·”
“즉시 명을 하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비비가 더 남은 것이 있다는 듯이 입을 열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제럴드가 불길한 예감을 안고 뒤돌아보았다·
“더 전하실 게 있습니까·”
비비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실베린의 제자는 반응이 어떠던가요·”
“이번에 나타난 마수에 대한 반응을 알고 싶으신 겁니까?”
비비는 데미안에게 신경을 쏟고 있다는 인상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맞아요· 음 이터니아 수업에 참관할 당시에는 키라클로를 보고 겁에 질려 무기를 던지고 빠졌다고 들었는데·”
제럴드가 이터니아 전투부의 수업을 참관할 당시의 상황을 비비는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보고로만 전해들었던지라 상황을 일부 왜곡해서 받아들인 듯했다· 물론 그 당시 겉으로는 겁먹고 뒤로 빠지는 모양세였지만 눈치가 빠른 사람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상황을 보고받기로는 공국의 기사가 마수와 혈전을 벌일 당시 싸움에 뛰어들지 않고 멀리서 지켜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비비는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만만한 상대한테는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더니 마수 앞에선 갑자기 사리분별이 되는 모양이군요·”
“···”
“이참에 데미안을 토벌대에 참관시키는게 좋겠어요·”
“···위험한 자리인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 있다면 혼자 마수를 상대하려 나서진 않겠죠· 데려가요· 그리고 공국의 정예 기사와의 격차를 똑똑히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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