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5
비비는 병사들을 대동하고 직접 토벌 길에 나섰다·
공국의 상징 사자가 그려진 깃발이 위풍당당하게 펄럭인다·
병사들은 공녀를 중앙에 두고 마름모꼴로 대열을 펼쳐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었다·
공녀가 이동하는 경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상황이다·
나 또한 그 마름모 호위벽 안에서 동행하는 중이다· 보호 대상으로 취급해주는 것인데 참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숲을 나서는 도중 드문드문 나무에 도끼로 난도질한 듯한 큼직한 발톱 자국이 보인다· 그럴 때면 병사 몇몇이 흔적에서 털을 채취해갔다·
곧이어 정찰대가 탐색을 마치고 본대로 돌아왔다·
“전방에 마수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장소가 있습니다·”
제럴드가 물었다·
“그 인근에 마수가 배회하고 있었나?”
“아닙니다· 아무래도 굴 안으로 깊게 숨어 들어간 듯합니다·”
“즉각 전투 태세를 갖추어라· 우리는 곧장 마수의 근거지로 이동하겠다·”
삼십여 분쯤 이동하니 흙바닥에 난잡하게 찍힌 마수의 발자국과 지하로 이어지는 동굴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마수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장소였다·
적당히 공간도 탁 트여 있어 진을 펼치기에도 적합해 보였다·
동굴 내부를 간략하게 탐사하고 나온 정찰대가 니엘렌에게 보고했다·
“동굴 깊은 곳까지 마수의 흔적이 이어져 있습니다·”
동굴의 천정고는 제법 높았지만 폭이 좁아 병사를 이끌고 진입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니엘렌이 말했다·
“시야 확보도 안 되는 동굴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다·”
폭이 좁은 곳에선 마법도 운용하기 어려웠고 머릿수의 이점을 살릴 수도 없었다·
마수를 동굴 밖으로 끌어내 합동으로 공격을 쏟아붓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병사들은 동굴 입구를 반원으로 에워싸서 탈출 경로를 틀어막고 지휘관들은 한자리에 모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마수를 동굴 밖으로 끌어내는 방법에 대해 논의가 벌어졌고 오래 걸리지 않아 ‘미끼조’를 투입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미끼조는 말 그대로 발 빠르고 숙련된 기사를 투입해 직접 마수를 유인하는 걸 말했다·
곧이어 미끼조 편성은 물 흐르듯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내게는 마수 토벌보다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이 중요하다· 미래에 영향을 끼칠 변수들을 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호위대의 반역에서부터 공녀가 감추고 있는 신체적 비밀까지· 이를 위해선 더 깊은 영역까지 침투해야 한다·
무식한 방법을 써서라도····
***
제럴드가 비비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공녀님 대마법사의 제자가 대면을 요청했습니다·”
“음 좋아요· 들라고 해요·”
제럴드가 손짓하자 두 명의 호위 기사가 데미안을 사이에 끼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데미안이 고개를 꾸벅 숙여 예를 표하자 비비가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데미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짜고짜 폭탄 같은 말을 던졌다·
“저도 미끼조에 합류하겠습니다·”
그러자 보좌관 제럴드가 곧장 앞으로 나서서 데미안을 만류했다·
“썩 물러나라· 미끼조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그게 그리 쉬운 일이라 생각하느냐?”
“로빌리온의 물어뜯는 힘은 바위도 으스러트린다지만 발이 느리고 머리가 두개인지라 교란에 취약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위험성은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제 눈과 발은 누구보다 뛰어나다 자부할 수 있습니다· 미끼조에 저보다 적합한 이는 없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던 중 제럴드의 뒤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비비가 말했다·
“좋다· 미끼조에 그대를 기용하겠다· 네 스승의 명성만큼이나 그대도 그에 어울리는 활약을 보여줄 거라 믿겠다·”
제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미끼조가 대체 무슨 활약을 한단 말인가·’
냉정하게 말해서 죽어도 크게 상관없는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임무다· 비비는 데미안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데미안이 겁에 질려 꽁무니가 빠지게 달아나는 꼴을 목도하고플 뿐이었다·
그리고 공국 기사들의 손에 구해지며 한바탕의 쇼가 아름답게 장식되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터·
데미안이 말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
동굴 내부로 쉰 걸음쯤 들어가니 빛이 닿지 않아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이 미끼조 대원들을 반겼다·
마치 뱀의 내장을 지나는 것처럼 동굴 내부는 어둡고 습한 공기에 숨이 막혔다·
베테랑으로 이루어진 미끼조라지만 공간이 주는 압박감에 본능적으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최후방에서 따라와라· 그게 명이다·”
데미안은 마수를 조우했을 때 가장 빨리 도주할 수 있는 안전한 포지션에 배치되었다· 그게 상부의 명이었다· 밉상으로 찍히긴 했어도 데미안은 여전히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주요 인물이었다·
조장을 맡은 한 배테랑 기사가 서른 걸음 간격으로 야광석을 배치해 두었다·
“마수를 조우했을 때 야광석의 빛을 이정표 삼아 도주해야 한다· 반드시 명심하도록·”
야광석은 빛이 강하지 못해 일대를 환하게 밝히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닭 모가지를 비틀고 술병을 잡은 것처럼 들고는 지나는 길에 피를 한 방울씩 뚝뚝 떨궜다·
후각이 민감한 마수의 구미를 자극하기 위한 유인책이었다·
먹다 남은 사냥감의 뼈가 주변에 뒹구는 걸로 보아 마수의 거처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동굴이 깊었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간들의 흔적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야?”
미끼조 조장이 횃불을 들고 벽을 비춰보았다·
그곳엔 오래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았다고?”
다른 기사가 말했다·
“토착민들의 역사가 깊은 곳이니까·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죠·”
데미안도 그 벽화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열 명의 젊은 남녀를 중앙에 두고 수십의 사람들이 원으로 둘러싼 그림이었다·
중앙에 서 있는 젊은 남녀의 머리엔 화환이 씌워져 있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은 춤을 춘다·
축제 내지 부족민들의 결혼식 같은 느낌인데 중앙에 있는 젊은 남녀의 그림은 표정이 어둡게 표현되어 있다·
“뭐 보물 매장 장소라도 기록한 줄 알았더니만· 어서 가지·”
그 앞으로 나아가니 간간히 비슷한 느낌의 벽화가 계속 이어졌다·
젊은 남녀가 아닌 똬리를 튼 뱀을 두고 축제를 벌이는 그림·
팔을 들어 올리고 무언가를 숭상하는 그림·
그러다 횃불을 든 조장이 손을 번쩍 들어 대원들에게 정지 신호를 보냈다·
“잠깐·”
그러고는 불을 든 왼손을 앞쪽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 횃불이 일정 주기마다 뒤쪽으로 살짝씩 밀려난다·
“우리 쪽으로 역풍이 부는데· 반대편에 지상 통로가 있나?”
조장이 더 나아가려 하자 데미안이 다급하게 말했다·
“가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데미안이 별안간 검을 뽑아 들었다·
“···뭐?”
곧이어 역풍이 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해졌다·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조장이 횃불의 끝을 잡고 다시 앞쪽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스무 걸음쯤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두 머리의 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수가 철갑이 덜덜 거릴 정도로 낮은음으로 으르렁거렸다·
크르르르르르-
그 역풍은 바로 마수의 콧바람이었다·
녀석은 먹잇감을 발견하고 낮은 자세로 포복하며 접근해왔던 것이다·
“눈 감아!!”
조장이 뒷주머니에서 섬광의 마석을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곧이어 굉음과 함께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미끼조 대원들은 일제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쪽 통로에서 고막이 먹먹할 정도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한 마수가 벽에 박치기를 해댄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벽이 쾅쾅 울렸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횃불 몇 개가 빛을 잃었다· 남은 건 조장의 것 하나뿐이었다·
급박한 상황인지라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조장이 소리쳤다·
“리스턴! 바론! 타르기스! 데미안! 따라오고 있으면 대답해라!”
“네!”
“네!”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대답 하나가 들리지 않았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인데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조장의 횃불마저 꺼져버렸다· 그들은 오는 도중에 두었던 야광석에 의지해 길을 나아가야 했다· 어둠 속에서 잇달아 철퍼덕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괘 괜찮습니다!”
“무릎이 깨지더라도 달려라!”
그들은 잠시 야광석이 설치된 곳에서 대원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리스턴 리스턴이 없습니다!”
“구해야 합니다! 좀 전에 넘어지는 소리를 들었는데 일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장이 고개를 저었다· 뒤로 돌아갈 수 없었다·
“늦었다· 탈출에만 집중해라!!”
조장이 돌아가려는 팀원의 멱살을 잡고 끌어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동굴 안에서 마수와 싸우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러던 중 조장이 이상한 걸 감지하고는 말했다·
“데미안! 이 빌어먹을 데미안은 어디에 있지?”
“저희 중 제일 앞장서서 도주하고 있었습니다·”
“젠장 젠장! 네 말이 맞기를 빈다·”
***
공국의 기사들이 동굴 입구를 반원으로 둘러싸고 동굴 내부에서 메아리치는 발소리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뒤 동굴 안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끼조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동굴 밖으로 뛰쳐나왔다·
한데 들어갈 때는 다섯이었는데 나올 때는 세 명뿐이었다·
두 명· 데미안과 리스턴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탈출에 성공한 미끼조 대원이 당장에 쓰러질 것처럼 지친 탓에 기사 몇몇이 달려와서 그들을 부축했다·
더 기다려도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을 감지한 제럴드가 안색이 창백해진 상태로 소리쳤다·
“데미안과 다른 한 명은 왜 나오지 않는가!”
미끼조 조장 또한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리스턴은 도주 중에 발을 헛디뎌 뒤처졌고 데미안은 분명 저희보다 앞서던 중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저희보다 먼저 나온 게 아니라면 동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겁니다·”
동굴 내부에서 마수의 포효소리가 다시 울린다· 긴 통로가 나팔관처럼 소리를 또렷이 전달해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움찔할 정도였다·
제럴드가 곧장 니엘렌에게 말했다·
“당장 구하러 가야 합니다·”
총지휘관 니엘렌이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동굴 내부로 진입해야 하는 상황· 그가 검을 뽑고 앞으로 나섰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했는지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던 중 갑자기 동굴 안에서 이질적인 소음이 뻗어 나왔다·
스륵 스륵 스륵
빛 한 점 없는 심연 속에서 무언가가 기척을 냈다·
모든 이의 신경이 곧장 동굴 내부로 쏠렸다·
일정한 리듬에 맞게 단단한 바닥을 무언가로 쓸어내는 듯했다· 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입구를 봉쇄한 마법사와 기사들은 당장에라도 전투에 뛰어들 듯이 무기를 높게 들었다·
곧이어 동굴 초입부에 걸친 햇빛에 하나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바윗덩이같이 거대한 사자의 머리와 갈퀴였다·
기사들이 선제적으로 달려들려 하자 곧바로 정지명령이 떨어졌다·
“일동 정지하라!”
스륵 스륵 스륵
곧이어 피칠갑을한 사내가 사자의 갈기를 한 손에 붙들고 질질 끌며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 샤워를 한 듯이 흠뻑 젖어 있다· 모두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동굴에 먼저 살던 광인이 소란에 못 이겨 나온 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를 알아보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축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수려한 이목구비· 그 사내는 데미안이었다·
그의 손에 끌려 나온 건 바로 잘려 나간 마수의 대가리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병사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일개 학생에 불과한 애송이가 마수의 굴에서 살아서 나온 것이다· 살아나온 것도 모자라 제 마음대로 마수를 참수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낙오된 미끼조의 일원인 리스턴이 한쪽 발을 절룩거리며 뒤따랐다· 정적이 그 일대를 휘감았다·
데미안은 동굴 밖으로 나오곤 끌고 오던 대가리를 손에서 놨다·
그리고 지친 듯이 늘어진 걸음으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입구들 막던 기사들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스르르 길을 열어주었다· 그 열린 길 끝에는 비비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녀 또한 놀란 나머지 눈을 부릅뜬 채로 굳어 있었다·
데미안은 그렇게 공녀의 앞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럴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찌 된 것이더냐?”
그러자 뒤늦게 동굴에서 나온 리스턴이 제럴드에게 소리쳤다·
“저는 마수에게 쫓기던 와중에 발을 헛디뎌 낙오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데미안이 혼자 돌아와 절 업고 운반했습니다· 그리고···속도가 느려 결국 마수에게 뒤를 잡히게 되었고····”
리스턴이 잠시 뜸을 들인다· 그도 당시의 상황이 납득이 안 가는 표정이었다·
“그가 마수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모두가 경악할 수밖에 없는 증언이었다· 비비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눈을 잠시 질끈 감았다· 데미안은 열일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름끼치는 실력자였다·
데미안을 인정하는 건 실베린에게도 득이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공이 너무도 명확했으니· 이 업적을 치하하고 보상을 내려야 했다·
“미끼조로 보냈건만 맡은 것보다 많은 일을 해냈구나· 누구보다 비범하면서 용맹하게 말이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대는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 나서서 내 충성스러운 기사의 목숨을 구했다· 명예로운 행위에는 그에 맞는 보상이 있어야겠지· 원하는 것을 말해 보아라·”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공녀와 눈을 마주쳤다·
“절 공녀님의 직속 호위로 기용해주셨으면 합니다·”
병적으로 그 자리를 집착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비비는 이제 데미안의 고집을 받아들여야 했다·
“···좋다· 그게 전부인가?”
“그리고 제 손으로 직접 공녀님의 세족 시중을 들도록 허락해주십시오·”
“···!”
다들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표정을 지었다·
비비의 속이 쥐어짜는 것처럼 뒤틀렸다·
구두를 대령하라는 제안은 거절해놓고 난데없이 마음을 바꿔 직접 세족 시중을 들겠다니· 그것도 더 큰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공적을 세우고서·
무슨 꿍꿍이를 품은 건지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데미안은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독특한 보상을 요구하는구나·”
비비는 소리 없이 이를 뿌득 갈았다·
표정은 사교계에서 단련한 덕에 별 내색 없이 차분한 미소를 유지했지만 안색은 붉게 달아올랐다· 챙이 큰 모자 덕에 주변인의 눈에 안 띌 뿐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 탓에 팔이 부르르 떨었다·
머릿속에 그리던 것들이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뒤집혀버렸다· 분노와 당혹감이 한데 뒤섞이며 그녀를 어지럽게 했다·
“···좋다· 그대 요청을 들어주겠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내 침소에 들어 시중을 들어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럴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비비가 그동안 남자에게 세족을 맡겼던 적이 있었던가·
그가 기억하기론 단 한 번도 없었다·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오늘부로 공녀님을 지키는 검이 되겠습니다·”
비비는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 마지못해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래 그대의 각오를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데미안은 나뭇잎에 떨어지는 것보다 느린 속도로 공녀의 손을 끌어다가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손등엔 사자의 피로 적셔진 붉은 입술 자국이 남았다·
그 둘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 누구도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기수의 머리 위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은 공국의 상징 사자기 만이 바람에 펄럭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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