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8
정도의 차이만 있었지 나와 비비를 제외하고 모두 크고 작은 내상을 입었다·
입에 넣은 거라곤 술과 냉수 몇 모금뿐인 니엘렌과 제럴드까지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오염된 물을 마신 것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한 번의 증상으로 끝날지 지속적으로 따라다니며 고통을 선사할지는 알 수 없었다· 성수가 반응할 정도의 오염된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누구도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가장 빠르게 몸을 추스른 정찰병이 마을 사람을 찾으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마을과 제사장 모두 텅텅 비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한 명도 보이질 않습니다·”
“그 미친 것들을 다 죽여버렸어야 했다·”
니엘렌이 뒤늦게 탄식했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지고 난 뒤였다·
다들 속을 게워내고 나서야 본인들이 마굴에 기어들어 왔다는 걸 깨달은 얼굴이다·
공국으로 향하려면 물길을 몇 번은 건너야 했지만 비는 도무지 잠잠해질 기색이 보이질 않는다· 물이 빠지길 기다리는 건 소용없다· 호위대의 시간과 식량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움직여야 했다· 비를 뚫고 계속 나아가 공국과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이동하는 게 답이었다·
제럴드가 몸을 추스르고 후속 대처를 지시했다· 그는 비상용 포션들을 바삐 보급하고 본국에 긴급 지원을 요청하는 스티치를 날려보냈다·
나는 꽃잎들이 흙탕물에 쓸려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정말 신이 분노한 건지는 몰라도 봄은 일찍 끝났다· 바르비시아는 점점 익히 들어왔던 그 지옥 같은 광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할 수 있는 대처는 다 해보겠다만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의 힘든 싸움이 될 듯한 예감이 들었다·
***
새벽녘이 밝아도 호위대는 계속 비에 젖은 채로 이동했다· 밤새며 움직인 탓에 다들 피로감에 찌들어 있었다·
마차 바퀴가 젖은 흙에 푹푹 빠지는 탓에 우리는 마차를 전부 버리고 짐만 챙겨 움직였다· 발 한 번 디뎌도 정강이까지 잠기는데 마차가 움직일 턱이 없었다·
호위대는 식량과 야영을 위한 천막 그 외 생존 필수품 몇몇을 챙기고 나머지는 전부 버렸다·
비비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흙탕물에 그녀가 입던 고급스러운 옷이 전부 넝마처럼 엉망이 되어 결국 폐기하고 활동하기 편한 시녀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누가 이것 좀 떼 보거라·”
비비가 로브를 들춰 새하얀 옆구리를 내보였다·
거기엔 엄지손가락 만한 거머리가 달라붙어서 공국에서 가장 귀한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기사들이 다들 함부로 공녀의 신체에 손댈 엄두를 못내고 머뭇거렸다·
“괜찮으니 어서 이 망할 거머리 좀 떼란 말이다·”
보다 못한 내가 거머리를 떼고는 포션으로 지혈해주었다·
비비도 이제는 품위니 격식이니 하는 걸 버리고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거머리 정도는 맛보기 수준이다· 이미 다른 병사들은 모기와 기타 독충에 시달려 역병에 앓는 것처럼 목과 팔뚝이 두드러기로 범벅이 되었다·
마치 우리가 올 때만 기다리며 매복이라도 한 것처럼 온갖 해충들이 덤벼들었다·
정찰을 나갔던 경계병이 중년의 주민 하나를 붙잡고 본대로 복귀했다·
마침내 신령제에 관계된 인물 하나를 잡아 온 것이다·
니엘렌과 그 부관이 고문에 가까운 폭력을 행사하며 심문했다·
공녀를 노리고 전부 계획한 것이다· 주동자는 누구냐· 제사장을 부리는 자는 누구냐·
하지만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는 없었다·
“공녀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당장 멀어져야 한다·”
몽둥이 찜질을 반복하고 나서야 그가 다른 대답을 했다·
“저주는 저주는 이미 시작되었다· 돌이킬 수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저주받은 공녀에게서 최대한 떨어지는 것뿐이다· 분노가 이곳을 삼키기 전에 떠나가야 한다· 살고 싶으면 공녀를 버리고 도망쳐라· 신께서 공녀를 거둬가실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주가 실현되리라고 믿는 이는 없었다· 이곳 주민이 독극물을 타 먹인 게 문제였지 저주의 징조라곤 굳이 따져봐야 비가 내린 것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호위대는 그날 밤 어느 버려진 마을에서 캠프를 차렸다· 마을 내부는 일주일도 안 된 것처럼 삶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침구도 식기도 전부 그대로였다· 사람만 그대로 증발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정찰병 하나와 야간 보초를 서던 병사 둘이 실종되었다·
“제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소 소변을 누러 간다고 했는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늪에 빠진 건지 마수에 잡힌 건지 아니면 탈영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주변을 샅샅이 수색해도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그 소식을 들은 비비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제럴드가 그녀를 다그쳤다·
“아가씨는 이 상황에선 약한 모습을 보이시면 안 됩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첫 번째 이탈· 하지만 그건 시작이었을 뿐이다·
정오가 되자 병사들이 다시 한 번 검은 액체를 토해냈다· 무얼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호위대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
사방이 흙탕물과 진흙으로 뒤덮인 늪지대였다·
“엘리샤? 엘리샤!”
기사 하나가 행군 중 대열을 이탈해 늪지대로 달려갔다· 주변 동료가 그를 붙잡고 뺨을 몇차례 때리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분명 엘리샤가···”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정신차려·”
그 이상 증세는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성을 가장 오래 붙들 것 같았던 제럴드마저도 이따금 무슨 소리를 듣는 것처럼 뒤를 휙휙 돌아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물었다·
“자네도 들었나?”
“듣지 못했습니다·”
제럴드가 그나마 환청과 현실을 구분할 뿐이었고 나머지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봤어· 똑똑히 봤어· 그 목이 잘렸던 제사장이 살아서 저 나무 뒤에 서 있었어! 공녀님께 말씀드려야 해· 저 사악한 악귀의 목을 쳐야 한다고·”
기사와 마법사를 구분하지 않고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우욱!”
나도 검은 액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원인이었을까· 오염된 물에 손을 담근 것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식수가 없어 빗물을 받아마신 것이 원인이었을까·
식수는 호위대에 비축된 것이 없었다· 빗물마저 받아마시지 않았으면 난 아마 이상을 감지하기도 전에 탈수로 죽었을 것이다·
만약 빗물을 마신 게 원인이라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진다·
이 모든 게 연못물을 음용한 것으로 인한 중독 증세가 아닌 바르비시아 전체가 오염된 탓에 생긴 발생한 것이란 말이니까·
어쩌면 병사들이 겪고 있는 구토 환청과 환각 망상증이 곧 순환계의 일부가 되는 과정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도망칠 수 없을 수도 있다·
다행인 건 난 아직 환청과 환각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건데· 이마저도 얼마나 버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나마 멀쩡했던 나까지 이상 증세를 보이자 비비도 크게 흔들렸다·
이제는 비비 하나만 멀쩡하고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이가 문제를 겪었다· 마치 노파가 던진 저주의 한 구절이 실현된 것처럼 그녀의 주변 인물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날 저녁 호위대는 절망을 마주해야 했다·
이는 한 기사가 발견한 스티치의 잔해에서 시작되었다·
“저건···공국의 스티치잖아·”
공국의 스티치가 날개가 갈가리 찢긴 채로 나무에 걸려 있었다·· 바로 제럴드가 지원 요청을 보냈던 것이 공국으로 향하지 못하고 추락한 것이다·
스티치엔 발톱 자국이 난자해 있었다·
호위대는 고립된 상태였다·
버티기만 하면 공국에서 지원이 올 것이란 희망도 완전히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다·
호위대는 전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쉽게 흔들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호위대에는 공녀가 정말 저주받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행군 도중 난데없이 한 기사가 바닥에 엎어지고는 눈이 하얗게 까뒤집혀서 발작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빙의한 것처럼 이상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희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라· 그것의 머리를 베고 내장을 뽑아 이 땅에 흩뿌려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현상이었다· 어쩌면 정말 반신반의하던 초월적 존재의 실체를 간접적으로 확인하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거기에 이어 총지휘관인 니엘렌마저 갑자기 정신이 나가 허공에 마구잡이로 칼질을 하기 시작하면서 호위대의 희망은 완전히 꺾여나갔다·
모두가 미쳐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우욱!”
다시 검은 액체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내 육체도 저들에게 따라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모양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니 몸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앞으로 기울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건 비비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안 돼!”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
호위대는 언덕 위에 야영 캠프를 차렸다·
비비는 천막 안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굳어 있었다·
모든 게 미끄러지듯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그녀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가장 신뢰하는 니엘렌이 무너지고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꿈쩍 안 할 것 같던 데미안도 버티지를 못했다·
비비를 보는 병사들의 시선에서 이전과 같은 충직함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정작 비비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도 괴로웠다· 차라리 병사들과 같이 아팠더라면 같이 이겨내도록 힘을 북돋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던 중 니엘렌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비비는 얼굴에 괴로운 감정을 지워낸 상태로 말했다·
“실베린의 제자는 상태가 어떤가요·”
“깨어나기엔 한참 멀었습니다· 보기보다 나약하더군요·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뭐죠?”
“실종되었던 기사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비비가 벌떡 일어났다·
“정말 돌아온 건가요? 괜찮은 게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런 부상 없이 건강합니다· 그들이 지금 공녀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비비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어서 들라고 하세요·”
“그들만이 아니라 다른 병사들도 공녀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
비비는 그제야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흔들림 없이 또렷했던 니엘렌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신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다는군요·”
니엘렌이 천막 입구를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입구 너머로 공녀의 호위대 전원이 병장기를 꺼내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들의 눈에서 살기를 감지한 비비는 천천히 뒷걸음쳤다·
그리고 니엘렌도 검을 뽑아 공녀를 바라보았다·
“이 땅의 주인께서 제물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
”피의 축제를 원하신다·”
“주인께서 여신의 피를 원하신다·”
임시 병상에서 눈이 번쩍 뜨인다·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꿈을 꾼 건가? 아니면 나도 환청을 듣는 것일까?
고개를 돌렸다· 살짝 벌어진 천막 입구 틈에서 사람이 보였다· 한 명이 아니다· 여럿이 모여 줄지어 한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약에 취한 것처럼 몸을 흐느적거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검이 들려 있었다·
“공녀를 제물로 바쳐라·”
내가 들은 건 환청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 호위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예지몽에서 보았던 그 장면이 이제는 코앞까지 다가온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병상에서 나오다 현기증 때문에 도로 바닥에 엎어졌다·
포션· 포션을 찾아야 한다·
나는 천막 한구석에 적재해 놓은 짐짝 쪽으로 움직였다··
거기서 내 개인 짐 상자를 간신히 끌어냈다·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헝겊으로 돌돌 말아놓은 내 목검· 그리고 그리폰 포션과 서리바람 폭탄· 다행히도 처음 가져왔던 그대로였다·
이 상황에선 정체를 숨기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곧장 그리폰 포션을 들이키고 목검을 집었다·
검을 쥔 두 팔이 덜덜 떨린다· 기력이 모두 빨려나간 것인지 싸우기는커녕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러던 중 상자 안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 무심결에 챙겨왔던 작은 가죽 주머니· 그 안에서 희미하게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홀린 듯이 그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는 푸르게 빛나는 약초가 들어 있었다·
그건 바로 순환계 실습 마지막에 얻었던 푸른 영혼초였다·
***
뒷걸음치는 비비에게 니엘렌이 한발짝씩 다가갔다·
“왜 왜들 이러는 거지? 다들 정신 차려라!”
그녀는 당장에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울먹였다·
“그대는 나와 아버지께 충성을 맹세했었다·”
그녀는 그러다 뒤로 넘어졌다· 비비의 얼굴이 점점 절망에 잠겨 들었다·
니엘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에게 대가를 바쳐야 합니다·”
그러던 중 천막 아래에서 구체 하나가 또르르 굴러와 니엘렌의 발치를 툭 건드렸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물건을 바라보았다·
니엘렌이 그 안에서 응축된 마력을 감지하고는 빠른 반사신경으로 몸을 뒤로 빼냈다·
곧이어 구체는 하얀 서리를 사방에 뿜어내며 폭발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천막을 찢고 흩날리는 서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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