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0
비비가 해초처럼 늘어져 등을 가린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치우고 맨몸을 드러낸다· 그리고 새하얀 등과 이질적인 검은 얼룩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얼룩이 아니다· 기이한 패턴 문신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느릿하게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의 등에 움직이는 그림이 새겨진 것이다·
“···뭡니까?”
“실패작의 흔적이다· 신이 날 버리고 저주했다는 증거지· 예로부터 쿤데라노스 뜻을 풀자면 멸망을 부르는 마법진이라고도 불렀다· 과거엔 이 마법진을 타고난 아이는 출생 당일에 죽였고 그 태생의 마을 전체도 함께 불태워버리곤 했었지·”
“그걸 타고난 이유라도 있습니까?”
“차라리 그런 게 있었다면 덜 억울하겠지· 내게는 여신의 피가 흐르지만 내 몸은 그걸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감당하지 못하는 자에게 여신의 피는 저주나 역병과도 같다·”
여신의 피가 흐른다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자기가 미완성의 성녀라는 말을 하는 건가·
“피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서른을 넘길 즈음에 명을 다한다· 전신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검은 피를 토해내면서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게 내가 십년 뒤 맞이할 운명이다· 어쩌면 전설처럼 신의 분노를 세상에 퍼트리게 될지도 모른다·”
반쯤 미쳐있던 기사들이 ‘여신의 피’를 중얼거린 걸 보면환수가 비비를 제물로 삼으려는 것과 분명히 관계가 있었다· 그 피가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저에게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들은 날 버렸다· 이 저주에 축복받은 네 인생까지 휘말릴 수도 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나와 함께하고 싶더냐?”
날 두고 축복받은 인생이라 표현하는 게 의미심장하다· 불행 자랑을 늘어놓는 것도 참 볼품없으니 그냥 멋대로 상상하도록 놔뒀다·
비비에겐 미안하지만 저주 그 자체엔 큰 감흥이 없다· 꼭 등에 기이한 문양이 있어야만 저주받은 것이 아니다·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다· 그게 저주 아니면 뭐겠는가· 그저 저마다 고통받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신이 당신을 저주하든 지옥에 처박든 그건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
“제가 할 수 있는 걸 할 뿐입니다· 다른 건 해드릴 수 없지만 당신을 이 땅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드릴 수는 있습니다·”
비비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지 내게 등을 보인 채로 가만히 몸을 부르르 떤다· 그리고는 옷을 들어 다시 어깨에 걸치고는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맹세는 내가 죽는 날까지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내게 목숨을 걸었으니 나 또한 내 모든 걸 그대에게 맡길 것이다·”
***
우리에게 남은 건 몸뚱이 둘 뿐이다· 식수도 식량도 여분의 옷도 없다· 그나마 내 전투 장비와 포션 일부가 남았을 뿐이다·
얼마나 떠밀려 온 건지 위치조차 파악이 안 된다· 비는 잠시 잦아들었지만 하늘은 검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있어 해나 별로 방위를 구분할 수도 없었다·
“어딜 향하고 있는 것이냐?”
“어디로 움직여도 결국 같은 곳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
말 그대로다· 이곳이 정말 순환계가 맞다면 위치 파악에 그리 공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어딜 가든 환수의 목구멍 속으로 이어질 것이기 떄문이다·
바르비시아의 중심부로 향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 땅에 순응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가 더 내리기 전에 비교적 지대가 높은 곳으로 계속 이동했다·
주변은 온통 시커먼 나무와 늪 그리고 안개 뿐이다·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비비가 문득 의문을 표했다·
“한데 너는··· 어째서 멀쩡한 거지?”
소더튼 순환계에서의 일을 구구절절 설명해줘야 하나 싶다가 그냥 마음을 접었다·
“일전에 화전민 마을에 들렸을 때 약을 얻은 게 있습니다· 아마도 공녀님이 들이켰던 것과 똑같은 것일겁니다·”
“아아 그렇군··· 그 뭔지 모를 약초 덕에 우리만 이렇게 남아있는 거로군·”
“두 발로 직접 이동하니 어떠십니까·”
“···아직 버틸만 하다·”
말하기 무섭게 비비의 한쪽 다리가 늪에 움푹 빠져 허벅지까지 잠겨 버렸다·
“꺄앗!”
그녀는 낑낑대며 안간힘을 썼지만 일평생 힘 쓸 일 없이 살아온 탓인지 자력으로 빠져나오질 못했다·
“이 망할 놈의 것!”
그녀는 화가 난 얼굴로 맥아리 없이 늪 바닥을 주먹으로 팍팍 때렸다· 늪 바닥에 교수형을 선고하지 못해 더욱 역정을 부리는 듯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비비의 겨드랑이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늪에서 빠져나온 그녀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가만 보니 그대는 여자의 몸에 쉽게 쉽게 손을 대는구나·”
“···?”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공녀님은 손이 많이 가는 분이니 금방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몸을 맡기겠다만 어린애 취급은 사양하겠다·”
비비가 적응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축축한 잠자리와 더러운 옷 발에 물집이 잡힐 정도의 행군 그리고 가축이 아닌 것들의 고기들까지·
우리는 어느 커다란 바위의 아랫부분의 좁은 틈에 자리를 잡고 야영을 준비했다·
비비는 가만히 대접받을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팔을 걷고 나섰다·
“나는··· 장작을 구해오겠다·”
“위험합니다· 저랑 붙어 있으셔야 합니다·”
비비를 혼자 활동하게 둘 수는 없었다·
우리는 젖은 나무의 겉껍질을 떼고 물기가 없는 장작을 구한 뒤 뱀 두 마리와 생선 하나를 잡고 야영지로 돌아왔다·
“화염 마법 쓰실 줄 아십니까?”
가만히 쪼그려 앉아서 따스한 온기를 기다리던 그녀는 냅다 고개를 저었다·
공기가 워낙에 습해서 내 작은 정령으로는 조금 버거워 보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손바닥 위에 정령을 소환했다· 그 작은 녀석은 부름을 받자마자 휙 날아올랐는데 내 바람에 따라 장작 위로 향한 게 아니라 비비의 머리 위로 향했다·
녀석은 화가 난 듯이 날개를 거칠게 퍼덕거리며 비비의 정수리를 쪼아대기 시작했다·
“귀여운 정령···꺅!”
비비가 몸을 웅크리고 겁먹은 듯이 머리 위로 손을 휘휘 저어대기 시작했다·
“삐약!”
“···?”
내 정령이 이렇게 화가 나서 누군가를 공격하는 건 처음 본다·
“얘는 대체 나한테 왜···· 어서 이것 좀 치워보거라!”
서둘러 정령을 손으로 감싸서 격리했다· 녀석은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손바닥 안에서 씩씩대고 있었다·
“원래 성격이 난폭한 놈이라··· 죄송합니다·”
“···네가 시킨 것 아니더냐? 내가 싫다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거라· 난 마음의 준비는 다 됐으니까·”
“이 녀석은 제 말도 잘 안 듣습니다·”
내 손에서도 연신 푸드덕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비비가 적당히 수긍했다·
“···성질머리가 주인과 똑 닮았구나·”
정령한테도 박대당하는 게 못내 서러웠는지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그녀의 고난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걸··· 먹어도 되는 것이냐?”
식사 시간이 되자 비비가 뱀고기 꼬치를 하나 들고 난색을 표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그것도 싫으면 애벌레나 개미를 잡아먹어야 합니다·”
비비가 눈을 꾹 감고 뱀고기를 베어문다· 소고기와 고급 치즈 와인을 주식으로 삼다 이런 잡육을 먹어야 되니 회한이 몰려드는 모양인지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렁그렁한 눈가는 여전히 마르지 않는다·
“그대는···어떻게 이런 것들에 익숙한 것이지?”
“살기 위해 뭐든 먹어야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비비가 착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실베린 그 여자가 널 거뒀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자를 무정하게 키웠군·”
“스승님이 절 거둬주셨기 때문에 이런 걸 안 먹어도 되는 삶을 누리게 됐습니다·”
“···그런가 여자가 널 거둬준 대가로 뭘 요구했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비가 못 믿겠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곧이어 내 속을 떠보듯이 말했다·
“마법사들은 샘이 빠른 족속들이다· 절대 손해 보는 일은 만들지 않지· 그 여자가 다른 고아들을 두고 그대를 거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그대가 크면 수확할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 게 틀림없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요· 지금으로선 받은 게 너무 많아서 갚을 길이 없습니다·”
굳이 실베린과의 관계에 과장을 보탤 이유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 말해도 충분하다·
“···제법 끈끈한 관계로구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비비의 얼굴에 잠깐동안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말하다 말고 뱀고기를 마저 베어먹는다· 그렇게 다 먹고도 입을 열지 않았다· 비비의 감정이 돌연 가라앉은 탓에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그날 밤 그녀는 바위틈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내게 등을 돌린 상태로 잠을 청했다·
불침번을 서면서 이따금 숨죽여 훌쩍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와의 대화가 그녀의 마음 속 아픈 부위를 자극한 것이었다·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
“꺄아아악!”
다음날 아침 나는 비비의 비명을 들으며 잠에서 깼다· 이건 그전에 듣던 것보다 더 진하고 강렬하다·
마수라도 출현한 건가 싶어 정신이 들자마자 반사적으로 목검을 쥐고 전투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마수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비비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가쁘게 숨을 헐떡이며 한 곳을 가리켰다·
거기엔 내가 장작을 패며 잘라놓은 그루터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사람의 머리가 놓여 있다·
자세히 보니 비비에게 저주를 걸다 목이 잘린 노파의 머리였다·
그건 우릴 비웃기라도 하듯 광기에 젖은 웃음을 보이며 야영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환영일까· 아무래도 비비와 내가 같은 것을 보고 있으니 헛것은 아니다·
목검을 들고 그 앞에 사서 머리통을 살짝 찔렀다· 악취와 함께 물에 불어 터진 살점이 살짝 벗겨진다· 확실히 죽은 사람의 머리다·
그 주변엔 검은 깃털이 나뒹굴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까마귀의 소행인 듯 보인다·
흥미롭다· 이 땅의 주인께서 우리들의 행보를 친히 예의주시하는 중이다· 난 어제 먹다 남은 뱀의 뼈를 머리통에 장식하고는 비비를 진정시켰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툭 치면 거품을 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앞으로 더한 일이 벌어질 텐데 벌써 혼절하면 안 됩니다·”
비비가 잔뜩 질린 표정으로 말한다·
“말 좀 이쁘게 할 순 없겠느냐?”
그리고 그 말을 꺼내기 무섭게 등 뒤에서 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 이를 확인했다·
푸른 색의 사슴 정확히는 푸른 광채를 내는 사슴 형상의 무언가가 물의 표면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뭐가 나타났느냐?”
“안 보이십니까?”
“···이 상황에서 날 놀리고 싶더냐? 어제의 정령도 그렇고 호위대에서의 일을 마음에 담고 있다면 당당하게 말하거라· 네 분풀이는 내 내가 직접 받아주겠다·”
누가 봐도 이상해보이는 저 영물이 비비는 안 보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는 환각을 보고 있다는 말인데 어쩌면 이 땅에서 나온 동물을 잡아먹었으니 순환계와 더 깊게 감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환각은 비비의 호위병들이 보던 것과는 양상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저 사슴의 영롱한 빛깔은 분명 푸른영혼초에서 나오던 것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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