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1
푸른 사슴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내가 따라오길 기대하는 것일까·
잠시 고민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닐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우리는 순환계의 손아귀 안에 있다· 그러니 저것을 따라간다고 크게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러던 중 비비가 돌연 내게 따귀를 올렸다·
짝!
“정신 차려야 한다· 너까지 잃을 순 없다· 내가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날 같은 편 내지 동반자 정도로 생각해주는 건 참 고맙지만 이 여자 손이 좀 맵다·
비비가 내 멱살을 확 잡아당겨서 다시 한번 따귀를 올렸다·
짝!
“내가 물어뜯어서라도 돌려놓을 것이다· 절대 안 된다· 절대 절대!”
나 또한 호위대처럼 변절할까 심히 우려되는 모양이다· 그 불안감은 충분히 이해한다·
비비의 손목을 붙들고 진정시켰다·
“괜찮습니다· 갑자기 어딘가로 뛰쳐나간다거나 허공에 칼질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찌 된 무슨 문제이더냐··· 무얼 본 것이지?”
“한 번 가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헛것을 따라가려는 것인가?”
“어차피 우리 위치는 발각되었고 아무리 피한다 해도 까마귀의 눈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 찾아가야죠·”
“그래 말하는 건 제법 이성적이구나· 믿어보겠다·”
챙겨야 할 짐이랄 것도 없었고 우린 바로 일어나서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나에게만 보이는 푸른 사슴의 뒤를 천천히 쫓아갔다·
비비가 가는 와중에 어느 한 수상식물의 줄기를 끊어다가 기다란 새끼줄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나를 잠시 불러세웠다·
“기다려 보거라·”
비비가 새끼줄의 한쪽 끝을 내 왼쪽 손목에 엮고는 반대쪽에는 자신의 손목을 엮었다·
“이게···뭡니까?”
“예방책이다· 미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잡는 거다· 그 뿐만 아니라 늪에 빠져도 이게 있으면 알아채지 않겠느냐·”
“···서로의 손이 엮여 있으면 급박한 상황에선 대처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럴 땐 끊어내면 된다·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
나름의 안전 대책을 마련한 모양인데 크게 도움은 안 된다· 손을 잡고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비비라면 그다지 선호하지 않을 테니 속에다 묻어두었다·
다시 걸음을 이어가던 중에 비비가 새끼줄을 툭툭 잡아당겨서 내게 신호를 주었다·
“앞에서 마력이 느껴진다·”
“마법도 할 줄 아셨습니까?”
“그대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겠다만 우리의 앞에서 기이한 마력이 계속 아른거리는 기분이다·”
“이 앞에 마법사가 있습니까?”
“그랬다면 진즉에 알았겠지· 이상한 마력이다· 우리 앞에 있는데 실체는 없는 것 같다·”
설마 저 푸른 사슴에게서 마력이 뿜어져 나온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런 것이 맞다면 저건 내가 환영을 보는 게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비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는 심술이 난 얼굴로 마주 본다·
나는 뭐 마력도 느끼면 안 되냐 하고 항의하는 느낌이다·
마법은 쓰지 못하는데 마법력은 존재하는 그런 부류인 건가·
푸드덕·
그러던 중 까마귀 하나가 나뭇가지에 내려앉는다· 뭔가 뒤통수가 따갑다 했는데 우리 주변에 감시자가 더 늘어있다·
내 착잡한 얼굴을 확인한 비비가 나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거기서 마주한 까마귀 떼를 보고 넋을 놓았다·
“저것들은····”
“주인님의 심부름을 위해 온 것 같습니다·”
“주인님이라니···?”
“이 땅의 신으로 대접받는 존재죠·”
“꼭 기회만 나면 시체를 파먹을 준비를 하는 것 같구나·”
“우리가 약해질 때를 기다릴 겁니다·”
노파의 머리를 본 것 가지고 놀라선 안 된다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 놀라고 당황하고 움츠러들면 장난은 더욱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고양이가 다 잡은 먹잇감을 두고 농락하는 것처럼·
재밌는 건 저 까마귀들이 함부로 푸른 사슴 근처로는 가지 않는다는 거다·
뭘까· 저 사슴은 대체 우릴 어디로 데려다주는 것일까·
“어서 움직입시다·”
“···그래·”
삼십 분쯤 나아갔을까· 까마귀의 수는 철새를 맞이한 것처럼 주변이 시커메질 정도로 불어났다· 사슴은 여전히 광채를 유지하며 우리를 안내한다·
비비는 긴장감이 고조된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손목을 엮은 새끼줄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투두두두두·
그러던 중 낯선 발소리가 들렸다·
나와 비비는 이를 듣고 동시에 멈춰섰다· 우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가 동시에 들었다· 그러니 환청은 아니었다·
발소리가 하나가 아니다·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멧돼지들처럼· 육중한 소리가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호 혹시 호위대가 우릴 찾아온 것일까·”
늪지에 풀이 길게 자라고 이따금 물안개가 껴있어 멀지 않은 거리도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발소리가 들리자 나는 곧장 목검을 뽑고 손목을 엮은 새끼줄을 잘라냈다·
“사람의 발소리가 아닙니다·”
“···!”
이제 그 발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생각보다 수가 많은 것 같다· 비비의 눈동자가 점점 흔들린다·
“뒤로 물러나세요·”
안개 속에서 핏줄이 솟은 얼굴이 하나 스르르 빠져나온다·
바로 구울이었다·
그 뒤로 무리가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다· 바르비시아 같은 지역에서 구울을 맞이하는 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구울들이 공국의 갑옷을 걸치고 있다는 것이다· 비비가 이를 보고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들은 이제 기사가 아닙니다· 함부로 나서시면 안 됩니다·”
그녀는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경악한 나머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상태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크르르르르·
푸른 사슴은 어느 틈에 사라졌다· 우릴 설마 함정으로 유도한 것일까· 모르겠다· 당장은 싸워서 공녀를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목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스무마리 가량의 구울들이 일제히 날 주목한다· 놈들은 인간이었던 시절의 입맛을 잃고 날 보며 군침을 흘려댔다·
놈들이 내 주변을 서성이며 내 상태를 살핀다· 탐색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왼쪽에 있던 내게로 호랑이처럼 뛰어서 썩은 이빨을 들이댔다·
구울은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상대해왔다· 나는 곧장 이쑤시개처럼 놈의 주둥이를 검으로 관통시키고는 그 상태로 땅에 깃발처럼 꽂아버렸다·
무리의 다른 녀석들은 두려움이 사라졌는지 본보기를 보여줘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나머지 구울들이 개처럼 괴성을 내지르고는 동시에 내게 덤벼들었다·
나는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세실이 준 폭탄을 작동시켰다·
이는 대기시간도 없이 곧장 주머니에서 서리 폭발을 일으켰다·
펑!
그리고 동시에 달려들던 구울들은· 역동적인 모습의 조각상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나는 세실이 가공한 순환계의 아티팩트 덕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동안 내 마력을 줄곧 빨아들인 보답을 톡톡히 해준다·
목검으로 반원을 그리며 크게 휘두르자 그 반경에 있던 구울의 머리가 도자기처럼 우수수 깨졌다·
남은 구울은 일곱마리· 이들은 굳이 특별한 기술을 쓰지 않아도 처리할 수 있었다·
크와악! 크와아아악!
이제는 내가 직접 다가가서 구울을 정리했다·
그렇게 청소를 마치고 나는 비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절망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호위대가 구울로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 것 치고는 갑옷이 많이 낡았다·
죽은 구울 시체를 하나씩 뒤져 인식표를 뗐다· 다행이라 해야할까· 이들은 우리가 여정을 함께했던 이들이 아니다·
그리고 공황 상태에 빠진 공녀의 앞에 다가가 말했다·
“겔드 필립 쇼 파티냐· 이들을 아십니까? 이들은··· 인식표를 보면 전부 십 년 이십 년 전 사람입니다· 당신의 호위대는 아닙니다·”
비비는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천천히 진정시켰지만 터져 나오는 눈물은 주체하지 못했다·
“그럼 그럼 내 기사들도 저렇게 변한다는 것인가?”
한때는 멀쩡한 사람이었던 흔적을 마주하니 나도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럴 겁니다·”
비비가 내 옷깃을 붙들고 축 늘어졌다· 그러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나는··· 어떡해야 한단 말이냐·”
“살아남아야죠· 공녀님이 여기서 포기하고 무너지면 저들을 구할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되는 겁니다·”
“····”
“지금은 걷기 힘드실 테니 업어드리겠습니다·”
비비는 아무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내가 등을 들이밀자 그녀는 몸을 의지했다·
그녀는 이따금 몸을 부르르 떨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일어서서 다시 걸어나서는 순간 푸른 사슴이 다시 나타나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의도일까· 녀석은 다시금 우리의 발 속도에 맞춰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
한 시간쯤 지나니 비비는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는지 숨이 안정적으로 변했다·
그녀는 업혀서 이동하는 와중에 이따금 손을 뻗어 덩굴 줄기를 따고는 손을 꼼지락대며 새끼줄을 엮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내게 말했다·
“인식표를 지금도 가지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내게 보여줄 수 있겠나?”
“제 안주머니에 있습니다·”
그녀는 멋대로 내 가슴팍에 손을 집어넣고는 은색 인식표들을 꺼내 확인했다·
“···그래 기억난다· 이들은 8년 전에 실종된 파견대였다·”
“어떻게 아십니까?”
“이따금 공국에 찾아오던 고위 마법사가 있었다· 퍽 친절하고 올 때마다 외국의 쿠키들을 선물을 줬던 탓인지 어렸던 마음에 그 사람만 오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었다· 그 사람은 아버지를 보러 온 것이지만 날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참 따뜻한 사람이었지·”
“저들 중에 마법사는 없었습니다·”
“나도 안다· 내 기억으론 그 마법사는 이터니아 출신이었다· 한 번은 공국에선 호위대를 보내 그를 마중했었지·”
“····”
“그리고 어느날 그 마법사가 공국에 찾아오는 와중에 함께하던 호위대와 함께 증발하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엔 나이가 어려서 나는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었다· 공국이 발칵 뒤집혔었는데 그 뒤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걸 보면 다시 찾지 못한 것 같다· 이 인식표를 보니 이제 어렴풋이 기억나는구나· 이들은 그 마법사를 위해 파견된 유능한 기사들이었다·”
“저희가 처음이 아니었군요·”
“그래 살아서 돌아간다면 군대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바르비시아를 정상화하고 저들의 시체는 공국에 다시 묻을 것이다·”
“···기운을 찾으셔서 다행입니다·”
“그래 그대가 싸우는 걸 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더군· 다···그대의 덕이다·”
“영광입니다·”
비비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화를 마저 이었다·
“그동안 그대를 모질게 대한 건····”
“···?”
“아 아니다·”
좋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멀찍이서 발소리가 우릴 찾아오고 있었으니까·
나는 비비를 땅에 내려놓고 다시 전투 준비를 했다·
곧이어 구울이 우리에게 달려들었고 전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순식간에 처리한 구울의 사체에서 인식표를 찾아서 비비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이건··· 공국의 기사들이 차는 게 아니다·”
“···그럼 어디 소속입니까?”
“성도의 성기사들이다·”
이들 듣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신성력을 활용하는 성기사들이 구울이 됐다는 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그림이었다·
흑마법과의 연관성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이제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저 구울들은 절대 우연히 만난 게 아니다· 이 땅을 지배하는 무언가가 우릴 가지고 놀기 위해 일부러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상황이 재밌게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상황이 정리되자 푸른 사슴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에게서 나오는 푸른 광체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비비가 힘없는 눈으로 말했다·
“성기사들을 보면··· 우리가 맞이하려는 존재는 상상을 뛰어넘은 힘을 지닌 것 같다· 지금 다 포기하고 도망친다고 해도··· 그대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도망칠 바에야 그냥 죽겠습니다·”
“····”
비비가 결의를 다진 얼굴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길게 엮은 새끼줄을 내 손목에 매듭짓는다· 그 반대쪽 끝은 비비의 손목에 엮여 있었다·
“이 땅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해도··· 그대 같은 강인한 남자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겠지·”
***
푸른 사슴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섰다·
“여기는 대체···?”
그 사슴이 멈춘 곳 앞에는 장막이 쳐진 것처럼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
그 앞은 유리로 막혀 있는 것처럼 연기가 조금도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이 지역의 한 단면이 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비비가 그 앞을 손으로 살짝 대보고는 말했다·
“결계 결계다· 이런 최고위 결계가 어째서 바르비시아에 있는 거지?”
나는 비비를 뒤로 살짝 물러냈다·
“잠시만 기다려보십쇼·”
사슴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녀석은 결계 한 곳에 코를 가까이 대고는 숨결을 훅 불어 넣었다·
그러자 결계의 일부가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사람 하나가 드나들 정도의 통로를 만들고는 사슴이 옆으로 비켜섰다·
마치 우리보고 들어가라는 것처럼·
녀석의 푸른 빛은 이제 거의 희미해져 있었다·
“우리가 오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문이 열리는구나· 들어오라는 신호인 것이더냐·”
비비는 움츠러든 목소리였다·
“준비되셨습니까?”
비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모든 걸 그대에게 맡긴지 오래다·”
나는 비비의 손목을 붙잡고 그 결계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나아가는 도중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사슴은 그 입구에 서서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연기가 서서히 손아귀를 뻗더니 사슴의 목을 옭아매기 시작한다· 하지만 녀석은 저항하지 않고 우리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곧이어 통로가 닫히고 그 모습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대체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우리는 묵묵히 그 내부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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