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7
환수는 죽었다·
그렇다고 뭐 대단히 좋은 일이 벌어진 건 아니었다·
숨겨진 보물창고나 신기한 능력을 지닌 아티팩트 같은 것도 없었다· 바르비시아의 신은 마법사의 영혼을 빨아먹으며 기생하던 놈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녀석을 죽이고 남는 건 없었다·
비비의 타고난 유전병을 낫게 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들은 수렁에 빠졌다가 간신히 기어나온 것일 뿐이다·
이 모든 건 뭘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긋난 걸 원래 있던대로 돌려놓기 위한 투쟁이었을 뿐·
나로선 지우고 싶은 기억으로부터 주의를 다른데에 돌리는 게 목적이었고 원하는 바는 이루었다·
내가 그나마 바라는 건 실베린을 만나기 전에 몸이 온전한 상태로 돌아오는 것 하나 뿐이었다·
그런데 비비는 날 빈 손으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환수를 잡고 이틀째 되는 날 밤 비비는 모닥불 앞에 다리를 끌어안고 앉아서 말했다·
“원하는 것이 있느냐···?”
“···아뇨·”
“그래도 말해보거라· 그대는 공국의 유일한 핏줄을 살린 것이다· 타국의 사람이라도 인종이 달라도 설령 죄인이라고 한들 공적에 걸맞는 보상을 내리는 것이 원칙이다·”
“제가 공녀님의 문제를 모두 해결한 건 아닙니다· 공녀님과의 연줄을 맺은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공국에 발 붙이고 살 것도 아니고· 이대로 무사히 돌아가게 되면 서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서 각자의 문제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비비가 손목의 새끼줄을 툭툭 잡아당기며 심술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주는 건 도움 될 게 없다 생각하는 것이냐?”
“아직 우린 여길 빠져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긴 공국에 도착하고 나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부족함 없이 지내는가 보구나·”
“····”
“···네 스승이 아무리 잘났다 한들 공국의 금고보다 많은 돈을 가지진 못했다·”
비비는 뭔지 모를 미련이 남아 있는 듯했는데 내가 공국에 가고 나서 이야기하자고 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우리 둘 다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국에 돌아가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었기에 괜히 설레발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헌데 비비는 곧 돌아가게 될 걸 직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다음날 우리는 예상보다 이르게 공국의 수색대에게 발견되었고 급하게 이송되었다·
마법사와 기사로 이루어진 수십명의 부대는 공녀와 함께 있는 날 보자마자 죽이려 들었고 비비가 세상이 떠나가라 빽 지르고 나서야 한바탕 난리가 수습되었다·
난데없는 비비의 호통을 들은 수색대의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아쉽게도 나는 그 뒤로 기억이 없다· 치료를 위해 포션을 들이키고 반강제적으로 긴 수면에 빠졌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깊은 수면이었다· 꿈조차 꾸지 않고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느끼지 못하고 무의식조차 일하지 않는 아주 깊은 잠이었다·
***
트리샤는 책상에서 엎드려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렇게 빈둥거렸다· 그러곤 아무 책을 집어서 읽기도 하고 책상에 낙서를 하기도 했다·
“심심해····”
그러다 벌떡 일어나서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러다 동물처럼 침구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고는 이불을 몸에 돌돌 말았다·
“심심해····”
평소랑 다른 것이라면 그녀가 빈둥거리는 방은 데미안의 방이라는 점이다·
트리샤는 의미없이 베개를 주먹으로 팍팍 때렸다·
“언제 와····”
***
미술부의 온실엔 늘 그랬던 것처럼 산뜻한 햇빛이 내리쬔다· 부원들은 부활동 시간이 끝났음 대부분 그곳에 남아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조용한 온실엔 오직 사각사각대는 붓질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러던 중 한 소녀가 온실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왔다· 그녀의 손엔 양피지가 펄럭이고 있었다·
“야 야! 야!! 이럴 때가 아니야·”
그림을 그리던 학생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은 미술부 3학년 로잘린이었다·
그녀는 정숙한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놨다는 걸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지 크게 소리쳤다·
“미친 사건이야· 우리 미술부에 어떤 미친 놈이 들어왔는지 니들은 알아야 돼·”
그러고는 곧장 미술부장인 헤일리에게로 달려갔다·
“이거 봐봐· 데미안 데미안 그 신입이 가이낙스 공녀를 따라간 건 알고 있지?”
“···뭔데?”
“봐·”
헤일리가 로잘린이 건넨 양피지를 받아 들고는 떨떠름한 얼굴로 살폈다·
“이건··· 토린의 편지잖아·”
그건 데미안과 같이 공녀의 호위대 임무에 파견되었던 전투부 3학년 토린이 쓴 편지였다·
“맞아· 토린 녀석이 호위대에서 데미안이 벌인 일을 다 알려줬어·”
“····”
다른 여학생들이 전부 붓을 내려놓고 그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헤일리가 편지의 내용을 천천히 읽었다·
“공국의 기사를 개잡듯이 패버려···? 공녀한테 제대로 밉상으로 찍혔다고? 얘 사고쳤어?”
“아 아! 내 정신좀 봐· 저번주 편지를 가져왔네· 아무튼 맞아 걔가 사고 친 게 맞는데 그보다 더한 게 있어·”
그러자 제니아가 뭔가 더 심각한 것임을 직감했는지 로잘린을 제지하려 들었다·
“야 안 좋은 소문이면 괜히 떠들지 말고 따로 둘이서 말 해·”
로잘린이 격하게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아니 아니 아 씨 내가 말해줄게· 이거 진짜 중요한 거야· 다 들어야 돼·”
“···?”
로잘린이 바르비시아를 지나던 호위대의 일을 낱낱이 설명했다· 밉상으로 찍힌 데미안 바르비시아의 축제 점점 미쳐가는 기사들 그리고 공녀를 죽이려 달려들던 것까지·
“데미안이 공녀의 면전에다 대놓고 그랬다는 거야· 자기는 그냥 머리 식히러 간다고·”
이야기기는 계속 이어졌다·
“···호위대가 전부 미쳐버리고 공녀는 영락없이 죽는 상황이었는데 누가 구했는지 알아?”
“···설마?”
“데미안 그 신입이 뛰어들어서 혼자 공녀를 구해냈대·”
이야기를 들으면 굉장한 영웅담이지만 소문은 언제나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헤일리가 가만히 듣다가 미심쩍다는 듯이 반문했다·
“좀 부풀려진 거 아니야?”
로잘린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퍽퍽 치고는 말했다·
“아니 지금 공국 분위기가 진짜 장난 아니야· 기밀사항으로 전말이 감춰져서 뭔지는 모르겠는데 무슨 심각한 사건이 또 있었던 모양인가봐· 근데 거기서도 데미안이 몸을 불사르면서 끝까지 공녀를 지켜냈대· 둘이 같이 바르비시아에서 일주일이 넘게 실종되었다 나타난 거야·”
“···그게 진짜야?”
“그게 다가 아니야· 더 더····”
로잘린은 말하다 말고 숨이 차서 침을 한 번 삼키고 말했다·
“공녀가 다른 남자들한테는 선 긋고 안하던 짓을 그 데미안한테는 한대· 그 그 그 밉상으로 찍혀서 괴롭히던 놈이 오히려 원한도 안 품고 자길 지켜주니 어떻겠어·”
헤일리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더 자존심이 상했으려나?”
그러자 로잘린이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아니! 홀딱 반했지!!”
로잘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메아리치고 한동안 온실은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이야기들 듣던 여학생들의 입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들은 공녀가 홀딱 반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 다음은 어떤 수순으로 흘러갈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화초들로 가려진 온실 뒤쪽에서 갑자기 깽그랑하고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가 퍼졌다·
“아 깜짝야·”
“뭐야 뒤에 누구 있어? 가서 확인 좀 해볼래?”
2학년 학생 한 명이 쭈뼛거리며 소리가 난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자리를 확인하고 돌아와서는 말했다·
“유리 화분이 깨진 거 말고는 아무도 없어요· 누가 옮기다가 떨어트린 것 같은데····”
“뭐? 없다고?”
헤일리가 곧바로 일어나서 그 자리로 가서 직접 확인했다· 유리조각들이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퍼져 있었다·
“···?”
후배의 말대로 그 근처엔 출구가 없는데도 사람은 사라져 있었다·
화분은 헤일리가 보기엔 떨어트렸다기보다 일부러 던진 것처럼 보였다· 악의적인 장난일까? 무언가에 무척이나 분노해서 화풀이를 한 것 같았다·
***
내가 눈을 뜬 곳은 비가 쏟아지는 늪지도 아니고 덜컹거리는 마차 내부도 아니었다·
정신이 들고 처음 맞이한 것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침대 커튼이었다·
천장의 샹들리에는 보석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는데 창문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서로 부딪히며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
그러고보니 창틀에도 금박이 씌워져 있다· 금속과 보석을 다루는 일을 했지만 저런 금빛 창문은 살면서 처음 본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창밖에 펼쳐진 대도시의 풍경을 보고 잠시 그 웅장함에 넋을 놓았다· 여긴 율리시아 공국의 수도인가?
그러던 중 왼쪽 손목이 뭔가에 탁 걸린다·
비비의 새끼줄이 엮여 있던 자리엔 굵은 수갑이 걸려서 바닥에 고정되어 있다· 이건 대체 뭐야·
내 소지품들· 목검을 비록한 다른 아티팩트들은 전부 침대 옆 협닥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리고 협탁엔 황금색 호출벨이 놓여 있었다· 나는 곧장 벨을 잡고 흔들었다·
사람이 올 때까지 흔들어대니 누군가가 다급하게 내 처소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멀끔한 하인복을 입은 한 남성이었다· 그는 내게 정중히 몸을 숙여 인사했다·
“이제 깨어나셨군요· 만나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데미안 님·”
“여긴 어디입니까?”
“율리시아 대공국의 수도 그랑카르디아 그 도시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리테스킬리스 궁전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나는 왼팔을 슬쩍 들고 흔들어대며 말했다·
“그래요·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이것 좀 풀어주시겠습니끼?”
“죄송합니다만 제 권한으로는 풀어드릴 수 없습니다· 데미안 님은 죄수의 신분으로 구류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제가 죄수라고요···?”
“그렇습니다·”
“누구의 명령입니까?”
“저희는 위대한 율리시아 대공국의 법도 그대로 이행할 뿐입니다·”
“····”
누군지 알 것 같다·
그가 내 얼굴을 보며 싱긋 웃고는 덧붙였다·
“정확히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이니 무슨 구실이든 만들어서 붙잡아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기에 데미안 님의 행적을 면밀히 검토해 법도에 어긋난 사항들을 전부 적용했고 지금 데미안 님은 죄수 신분이 된 겁니다·”
저런 소리를 할 사람은 단 한 명 밖에 없다· 비비의 명령이었다·
진짜 죄수가 아니란 건 애기들도 알겠다· 이런 호화스런 궁전에서 지내는 죄수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전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이터니아 측에 공국의 입장문을 보냈고 이터니아에서도 이에 수긍했습니다·”
“····”
난 이터니아가 아니라 실베린에게 가야한다· 늦어질수록 수업을 빼먹는 기간이 길어진단 말이다·
“데미안 님은 이제 곧 재판을 받게 되실 겁니다·”
“재판이요?”
구실만 만들어 놓은 거 아니었나· 굳이 재판까지 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
그는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재판에는 가이낙스 대공께서도 참석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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