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8
컨디션이 온전히 복구하지 못한 것일까· 그냥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재판은 대체 무얼 위한 것이며 그 자리에 그리 높으신 분이 참석해서 뭘 한다는 말인가·
가이낙스 대공은 아무래도 내가 살면서 맞이한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일 것이다·
실베린도 높으신 분이기야 하지만 활동하는 영역이 다르다보니 대공 쪽이 맞이하기 훨씬 어렵다·
그래도 뭐 정말 중죄를 지은 것도 아니니 위축될 것도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보다 나머지 호위대는 어떻게 됐습니까?”
“대부분 무사히 송환되긴 했으나··· 모두가 살아남은 건 아닙니다·”
“유감이군요·”
“데미안 님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비비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요·”
“제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그보다 잠시 자리좀 비워주시겠습니까?”
이에 시종은 군소리 없이 고개를 꾸벅이고는 침실 밖으로 나갔다·
재판이든 뭐든 공국에서의 일정을 서둘러 끝내고 실베린을 만나러 가야했다·
그동안 나는 그동안 밀린 편지를 쓰기 위해 탁자 위에 놓인 양피지를 한 장 꺼냈다·
약속대로 꼬박 보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실베린을 보러 여기까지 왔다는 걸 알면 서운한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지 않을까·
그리고 나 또한 그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으니 이터니아에서의 일은 내려놓고 이제는 잠깐 쉬어도 되겠지·
***
비비의 침소에 시종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비비는 깨어난지 나흘 가까이 지났지만 몸이 온전하지는 못했고 그 덕에 한동안 병간호를 받아야 했다·
시종이 포션을 협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
“아미노스 공작가 차남 비시스 가문의 가주도 아가씨의 문안을 왔습니다·”
비비는 몸을 창가 쪽으로 돌려 누운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자 시종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비시스 가문은 유능한 이들이 많다고 반기시지 않았습니까?”
“돌려보내거라·”
비비는 병간호를 받는 동안에는 친지들을 제외하고는 문안을 받아주지 않았다· 공녀에게 점수라도 조금 따볼 기대로 먼 길을 달려온 귀족들은 머리털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비비는 이제 그런건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죽을 뻔한 경험을 한 것 때문일까· 사교행위에 그녀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아가씨의 뜻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안부 편지는 지겨우니까 한곳에 치워두거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름아니라 데미안 님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비비가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정말 그이가 깨어났다는 말이냐!”
이전과는 상반된 반응에 시종은 당황한 듯이 침을 꿀꺽 삼켰다·
“몸 상태는 어떠느냐· 심각한 병상이라도 발견된 건 없느냐?”
“부상의 대부분은 이미 충분히 회복된 상황입니다· 그 외에 다른 병증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구나· 그가 깨어나고선 어떤 말을 꺼내더냐·”
“···수갑을 보고 조금 불편해하였습니다·”
“그거는 곧 익숙해질 것이다· 절대 풀어주지 말거라·”
“흠 그거 말고 또 다른 말은 없었느냐?”
“바르비시아에 실종된 기사들의 생사여부를 확인했습니다·”
“그렇군· 인간성이 말라붙은 것처럼 보여도 속으론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구나· 다른 질문은 없었느냐?”
그러곤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이를테면 내 걱정이라던가··· 하는 것 말이다·”
시종이 알기론 그런 말은 없었다· 하지만 희미하게 기대감에 잔뜩 젖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셨는지 물러나라 하셨습니다·”
“····”
비비의 기대감에 젖은 표정은 점점 무미건조하게 식어갔다·
곧이어 그녀는 기운이 없어졌는지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나도 혼자 있고 싶구나· 나가거라·”
생소한 광경이었다· 좀처럼 타인에게 정을 붙이지 않고 늘 선을 긋던 그녀였거늘 남자에게 이토록 마음을 쏟고 있다니·
비비의 마음을 사겠다고 바르비시아 수색대에 기꺼이 자원하던 수많은 귀족들이 머릿속에 잠시 스쳤다· 돈과 힘 권세를 동원해 수 년간 공을 들여도 얻지 못한 걸 원수로 여기는 실베린의 제자가 홀라당 털어먹으니 이보다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저 공녀님· 간언해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이더냐·”
“먼저 찾아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데미안은 비비의 은인이 아니던가· 알랑한 감정싸움이나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보단 그냥 먼저 다가가는 게 좋아 보였다·
“···싫다· 손목은 날 보러 오겠다 할 때 풀어주거라·”
비비는 그가 먼저 찾아올 때까지 버틸 모양이었다·
시종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곧 대마법사님도 수도에 도착하실 겁니다· 제가 알기론 두 분은 사제지간이라 알고 있습니다만····”
“····”
비비는 등을 보인 채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시종은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고는 문쪽으로 향했다· 그가 나가기 전에 비비가 입을 열었다·
“···산크로티스식 애플파이를 만들 줄 아는 장인을 불러오거라·”
***
방 안에만 갇혀야 해서 지루할 줄 알았는데 그런대로 읽을거리들이 제법 갖춰져 있어서 걱정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실 창밖을 바라보기만 해도 재밌었다· 내가 서 있는 이 성은 도시를 내려다 보는 명당에 위치해서 전망이 기가 막혔다· 살면서 이토록 큰 도시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지평선 끝까지 도시가 이어진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는 것인가·
훗날 비비가 이 위에 군림하게 된다는 건가· 솔직히 실감이 안 난다·
그러던 중 문 밖 복도 쪽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달그락거리는 철갑 소리· 한 명이 아니다· 한 부대씩이나 되는 듯한 상당한 숫자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시녀들과 어느 한 남자가 실랑이를 해댄다·
“나와라!”
그리고 그들은 내 방 앞까지 밀고 들어오더니 덜컥 문을 열었다·
한무리의 무장 병사들이 돌연 내 방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맨 앞에선 살쾡이 같은 눈매와 갈색 수염과 구릿빛 피부의 한 중년이 나를 노려보았다·
“아아 퍽이나 호화로운 수용소로군·”
나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말했다·
“누구시죠?”
내 물음에 뒤에 있던 부하 기사가 버럭 호통을 쳤다·
“예를 갖춰라! 강철의 기사 아미노스 공작님이시다·”
“상대방이 갖추지 않으면 저도 똑같이 대할 뿐입니다·”
아미노스 공작은 날 보고는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한낱 죄수를 보러 오는데 예의가 필요한가?”
“용건을 말씀하십쇼·”
“아 공녀를 구했다는 그 잘나신 용사님의 얼굴을 한 번 보러 왔다· 나도 한 번 보면 공녀가 왜 그리도 감싸고 도는지 알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야·”
“····”
“보아하니 공녀의 발이라도 닦어주며 비위를 맞춰준 모양인데·”
“예 정성 좀 들였죠·”
이 사람이 왜 그리 내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도발을 그냥 흘러넘기자 공작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리고 공작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착각하신 모양인데 그 소년은 죄수의 신분이 아닙니다· 가이낙스 대공께서 직접 지정한 특별 보호 감찰 대상이지요·”
나에겐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거기서 한무리의 병사들을 가르고 비비의 보좌관이자 호위대 임무에 동행했었던 제럴드가 앞으로 나왔다·
저 사람도 살아 있었구나· 여기서 보니 참 반갑다·
제럴드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공작께서는 그 특별 보호 대상에게 군사를 대동하고 무단으로 들어오신 거고요·”
제럴드가 나타나자 공작은 미간을 잔뜩 구기고는 말했다·
“대공께서 참 재밌는 일을 벌이시려나보군·”
공작은 병사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한바탕 소란을 정리하고 제럴드는 내게 다가왔다·
“한동안 귀찮아지실 겁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그는 내게 높임말을 쓰고 있었다·
“저들은 왜 저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난 본 적도 없는 인간들이 대체 왜?
“그동안 시간과 돈을 들여 준비하던게 완전히 무산될 처지니 속이 타겠죠·”
“뭘 말입니까?”
“비비 공녀님과의 혼인 말입니다·”
“····”
“대공국이라는 호박이 넝쿨 채로 굴러들어올 기회였는데 하루 아침에 입장이 바뀌니 눈이 뒤집힌 겁니다·”
“···그게 저 때문이라는 겁니까?”
제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조금 귀찮아지실 겁니다· 공국을 집어삼킬 기회를 날릴 인간이 한 둘이 아니니까요·”
“그게 왜 제 탓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공녀랑 결혼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귀족들은 권력자들의 행동에 굉장히 예민합니다· 제스쳐 표정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죠· 그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에 그토록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일전의 사건 이후로 사교적이던 비비 님의 행동 양식에 나타난 변화를 저들이 감지한 것이죠·”
“뭐가 달라졌습니까?”
“공녀님은 본래 사교적인 성향이십니다· 한데 이번엔 병상에 누워계시면서 다른 이들의 면회는 모조리 거절하셨습니다· 방금 아미노스 공작은 바르비시아 수색대에도 자원했는데 문전박대를 당했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데미안 님만은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공녀님은 데미안 님이 찾아와주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짧지만 생사고락을 함께 했으니 나와 유대감이 형성된 모양이다· 방금 그 공작이 눈이 뒤집혀서 병사를 대동하고 달려든 이유를 이젠 조금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럴드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고는 내 손목에 걸린 수갑에 꽂아넣었다· 빙글 돌리니 수갑은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
“듣자하니 공녀님과 약속을 하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호수가 보이는 곳에서 돗자리를 깔고 애플파이를 함께 먹기로 했다고요·”
“····”
비슷한 말을 꺼내긴 했지만 그건 약속이 아니었다· 난 위젤에서 실베린과 함께하던 때를 추억하며 그냥 꺼낸 말이었고 함께 하자고 약속한 적은 없었다·
“공녀님은 아무하고나 그런 약속을 잡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절대 이유없이 행동하시지 않죠· 좀 전의 아미노스 공작은 산더미 같은 금화를 쏟아 붓고도 공녀님과 피크닉 한 번 즐긴 적이 없습니다· 그 약속의 가치를···잘 아실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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