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9
열댓 명의 공국 기사들이 두 줄로 대열을 유지하며 이터니아의 마차에 탑승한 귀빈을 위해 의전하고 있었다·
가이낙스 대공의 부탁을 받고 공국으로 향하는 실베린을 위한 것이었다·
이동하는 와중에 실베린은 마차 창들에 양팔을 기대고 턱을 괸 상태로 늘어져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속이 잔뜩 상한 표정과 고양이 같은 큰 눈매로 하늘을 올려다 보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모습이 대마법사라는 위명과는 조금 이질적이고 또 한편으론 사랑스럽고 아름다워서 의전하는 기사들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향했다·
맨 뒤쪽에 있던 말단 기사들이 조심스레 속삭였다·
“근데··· 우리가 뭘 잘못한 건 아니겠지···?”
“멍청아· 퍼시발 녀석이 의전 수칙 3항 28조를 어겼잖아·”
“그 그것 때문인가? 나도 아직 1년차라 헷갈리는 거긴 한데·”
“미심쩍긴 한데· 그거 아니곤 설명할 게 없어·
그러던 중 하늘에서 말벌과 비슷한 날개 소리가 울렸다·
스티치가 돌연 실베린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녀는 냉큼 손으로 낚아채고는 마차 창문을 쾅 소리나게 닫아버렸다·
“···?”
“퍼시발 녀석 이젠 끝이군· 확실해· 상급자한테 연락하려는 거야·”
잠시 뒤 실베린이 마차 밖으로 손을 뻗고 스티치를 날려 보냈다·
기사 의전대는 그 뒤로 침묵을 고수했다· 햇볕은 쨍쨍했고 봄날 치고는 날이 더웠다·
뒷술에 말단 기사 하나가 또 다시 소근거렸다·
“···봄날 치고는 좀 덥구만·”
시간이 갈수록 해가 뜨거워져서 기사들은 땀을 뻘뻘 흘려댔다· 심지어 말까지 더위를 먹고 축축 늘어졌다·
“이 근방이 원래 이렇게 더웠나···?”
***
제럴드는 굳이 강요하지 않고 은근하게 날 추스르고 있었다·
그는 내 속내를 다 꿰뚫어 본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대마법사님께서도 때마침 공국에서의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서로 각별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스승님이 공국으로 오시는 게 정말입니까?”
제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오래 전에 계획된 일정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실베린도 오니까 괜히 싸돌아 다니지 말고 여기 박혀 있으란 소리처럼 들리는데·
좋다· 괜히 나서다 엇갈릴 수도 있으니 여기 대기하는 게 좋겠지· 성도에서 숲지기의 영혼이 말한 다섯 개의 루비인지 뭔지를 찾지 못하게 되는 건 아쉽다· 언제 쯤 찾을 수 있으려나· 방학때는 트리샤네 집에 찾아가야 하니··· 올해 안에 성도로 가는 건 무리 같다·
“수갑은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자유로이 다니셔도 됩니다· 그건 공녀님의 미숙한 관심표현이니 너그러이 넘어가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뻐근한 손목을 마사지하며 말했다·
“모처럼의 자유가 참 반갑긴 한데 제게 반감을 가진 귀족을 때문에 맘편히 움직이질 못하겠군요·”
제럴드가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모처럼의 기회인데 주변을 둘러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 케머런 성은 제국의 대사관마저도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로 정원이 아름답죠· 그리고 그 인근엔 기사 양성소가 있습니다· 데미안 님과 동나잇대의 수련생들을 구경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재판까지 남은 기간동안 시간을 떼우기엔 충분한 곳이죠·”
나한테 뭔가 암시를 건네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탓일까·
“겸사겸사 공녀님께 안부를 전하는 것도 좋겠죠· 필요하시다면 견문을 도와줄 시종을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제럴드는 바쁜 사람처럼 고개를 꾸벅이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가볍게 몸상태를 점검할 겸 방에서 나와 안뜰을 산책했다·
케머런 성은 과연 제럴드의 말대로 아름다웠다· 이곳은 산 하나의 윗동을 잘라 평지로 만들고 거기다 정원과 성채를 지어 놓은 독특한 곳이었다· 담장이나 계단 분수대 등의 석재 조형물들에게서 장인의 기품이 느껴졌다·
산책로엔 연못과 버드나무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인공 냇물이 흘렀다·
속된 말로 돈을 무지막지하게 쳐바른 것 같달까· 하기야 지평선까지 늘어진 멋드러진 도시의 건물마다 은전 하나씩만 세금으로 걷어도 이런 건 수십개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무 걸음쯤 뒤에선 안경을 쓴 중년의 시종 하나가 말없이 따라붙는다· 그는 미행하는 것처럼 주위를 맴돌며 내가 뭘 할 때마다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댔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그렇게 한동안 걷는 동안에 스티치가 편지를 물고 날아왔다·
실베린의 답장이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날아온 것이다· 이는 우리가 물리적으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내 정성어린 편지에 실베린은 간단한 답변만 남겼을 뿐이었다·
[넌 이제 죽었어·]
“····”
격한 애정표현을 받으니 심장이 뛴다·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설레임이랄까· 얼마나 남았을까· 어쩌면 내일 빠르면 오늘 저녁이 될지도 모른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편지는 주머니에 넣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내 뒤를 미행하던 시종을 손짓으로 불렀다·
***
비비는 여전히 굴 안에 들어간 생쥐처럼 문쪽에 등을 보이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종이 뒤늦게나마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데미안 님께서 홀로 사색하시다가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 받으셨습니다· 그분의 표정을 보아 상대방과 좋지 않은 일이 있으신 듯 합니다·”
“더 말해보거라·”
“그리고··· 아가씨께 문안을 오신다고 합니다·”
비비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궁정 미용사와 시녀들을 불러오거라·”
“알겠습니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비비의 품위유지를 위한 전담 관리사들이 들어왔다·
비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옅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화장대에 걸터 앉았다·
“가벼운 접선이니 크게 꾸민 티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시녀 일부가 고개를 끄덕이곤 의상실로 떠났다· 미용사는 서둘러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빗질하고 나머지 시녀들은 손톱을 다듬었다·
수수한 흰 드레스까지 갈아입고 비비는 시종들을 전부 돌려보냈다·
그리고 데미안이 올 때까지 거울 앞에 서성거리며 단장을 점검했다· 단아하게 올려 묶은 머리· 과감하게 드러낸 어깨라인· 연분홍색 입술· 조약돌 만한 에메랄드 목걸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대에 다시 베개를 등에 대고 앉았다·
그렇게 약속한 시간이 오고 누군가가 그녀의 방에 노크했다·
비비는 손을 몇번을 쥐었다 폈다 꼼지락거리고는 말했다·
“들어오거라·”
그리고 문이 열리고 데미안이 들어섰다·
그는 인사도 없이 들어와서는 작은 티이블에 있는 의자를 덥석 들고는 비비의 침대 앞에 두고 앉았다·
비비는 단전 위에 손을 가지런히 모은채로 데미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데미안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짓궂은 첫마디를 건넸다·
“왜 이렇게 꾸미셨습니까?”
그녀는 순간 열이 뻗쳤지만 꾹 참고 대답했다·
“이게 내 평소 모습이니라·”
“····”
“그대는 원시인처럼 살던 내 모습만 보지 않았느냐· 그렇게 볼만도 하겠지· 나는 그대같은 평민과 다르게 항상 군주의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
“음···· 몸은 괜찮으십니까? 안색은 좋아 보이는데·”
“다 괜찮은데 몸에 열이 좀 많은 것 같구나·”
“어디 봅시다· 어쩐지 춥게 입으셨다 싶었는데·”
데미안이 비비의 이마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눈이 당황한 듯 순간 커졌지만 곧 잠잠히 받아들였다·
“···이 몸은 이마보단 볼쪽이 더 열이 많다·”
“음····”
데미안의 비비의 볼에 손바닥을 대고 잠시 체온을 확인했다· 비비가 본인이 말을 꺼내고도 부끄러웠는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는 순간 기류가 묘하게 흘러가는 걸 느끼곤 손을 뗐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고 비비가 말했다·
“왜 그러느냐· 너 답지않게 조심스럽구나·”
“여기는 공국이지 않습니까· 누가 본다면 절 지하 감옥에 가둘 겁니다·”
“이제와서 그런 걸 신경쓴들 무슨 의미가 있더냐· 우리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그보다 더한 유대를 맺는 게 있더냐· 더불어 그대는 내 나체도 보고 몸을 만지고 침소도 함께하지 않았느냐·”
“···감옥에 넣기 충분한 명분이겠군요·”
“걱정하지 말거라· 재판은 그저 공과 과를 가리는 자리일 뿐이다· 더불어 그대의 약혼자에겐 특별히 비밀로 해주겠다·”
“왜 그렇게 제 약혼자를 그리 신경써주십니까?”
“바르비시아에서의 우리는 부부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가까웠다· 물론 사심은 없었다고 하나 그대의 약혼자가 이를 안다면 가슴이 찢어지지 않겠는가·”
“부부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부부라 해도 될 정도로 가까웠다·”
“비밀로 한다는 이야기는 의미심장하군요 언젠가 제 약혼자의 신상을 알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비비가 뜨끔했는지 애써 차분하게 말을 둘러댔다·
“인정하마· 그대같은 막무가내 인간이 어떤 여자를 선택했을지 호기심이 갔을 뿐이다· 그러지 말고 내게 먼저 알려주는 건 어떻겠느냐· 나 또한 나의 비밀을 보여주었고 우리의 유대가 그것도 못해줄 정도로 미약한 것도 아니거늘·”
데미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약혼자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전 약혼자가 있다는 소리는 한 적 없습니다·”
비비의 눈이 놀란 듯이 커졌다·
“그럼 리··· 아니다· 알겠다· 내 착각이었구나·”
비비는 군소리 없이 빠르게 수긍했다· 왜인지 모르게 더 캐물어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한가지 부탁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대가 부탁을 다 하고 별일이구나· 말해보거라·”
데미안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인다· 어쩐지 속앓이를 하는 사람 같았다·
“만약 제가 감옥에 갇히게 된다면··· 꺼내주시겠습니까?”
“···설마 재판을 걱정하는 것이더냐? 공국은 야만 부족 같이 법도가 엉망인 곳이 아니다· 그 자리는 그대의 보상을 논하는 곳이다·”
“···아닙니다· 그냥 해본 말입니다· 신경쓰지 마십쇼·”
“그대 같이 강인한 남자를 누가 감옥에 넣을 수 있겠느냐·”
데미안은 착잡한 듯이 크게 한 번 숨을 고르고는 다시 평소처럼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햇빛을 볼 수 있을 때 애플파이가 먹고싶습니다· 열은 없으신 듯한데 같이 산책하시겠습니까?”
갑작스런 제안에 비비는 자기도 모르게 신난 어조로 대답했다·
“정말 좋···! 아 좋은 제안이구나· 그대의 부탁이니 친히 들어주겠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