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병력 충원은 필요 없어졌지만 사건 조사를 위한 추가 연금술사 인력이 필요해졌다·
포퍼는 뒷짐을 지고 저택의 정문을 밀고 들어왔다· 내부에선 기사들이 각목들을 나르고 있었다· 구울이 파놓은 굴들의 토사가 불안정했고 붕괴를 막기 위한 지지대 설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부관 베렐만이 경례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실베린님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말해보도록·”
“지하 실험실 천장에 있는 거대 마법진은 고위 마법으로 설계된 일종의 결계입니다· 구울이 외부로 빠져나가는걸 막고 있었는데 최근에 일부가 소실되어 그 효력을 잃은 듯합니다·”
“고위 마법이라····”
포퍼의 눈이 깊어졌다·
고위 마법을 익힌 연금술사는 좀처럼 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연금술사가 무슨 일을 벌이려 했는지 파악도 안 된 마당에 고위 마법 이야기까지 나오니 영 골치 아플 수밖에 없었다·
“마법진은 지하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설계된 것이 아니라 마법진이 그려진 수평선 위로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옆으로만 굴을 파냈던 겁니다·”
“구울이 벽을 부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나 보군· 굴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확인했는가?”
“좀전에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공동묘지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땅속에 묻힌 시체를 파먹고 일부는 구울화가 되어 무리에 종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굶어 죽어야 했던 실험실 구울이 이렇게 큰 무리를 이루게 된 경위가 그럴듯하게 설명 되었다·
포퍼가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묘지를 미처 생각 못했군·”
공동묘지를 집중적으로 수색했다면 구울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허나 베렐만은 우연히 공동묘지를 빗겨가고 지하실에서 교전이 일어난 게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
공동묘지는 구울의 파티장과도 같은 장소다· 울타리도 없이 사방이 뚫린 개활지에다 땅굴이 거미줄처럼 쳐져 있어 구울에게 최적화된 곳이었다·
“공동묘지에서 교전이 일어났다면 구울이 기사를 땅굴로 끌고 가는 식의 일방적인 전투가 됐을 거고 결국 대참사로 번졌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이거 그 어린 친구에게 큰 빚을 졌구만·”
대화를 하던 중 저택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부상을 당한 기사 하나가 부축된 상태로 밖으로 끌려나왔다·
부상당한 기사는 하반신이 피로 흠뻑 젖은 상태로 대문밖으로 격리됐다·
이를 유심히 바라보던 포퍼에게 베렐만이 덧붙여 말했다·
“아직 잔존해 있는 구울의 짓입니다·”
“허어····”
이로써 세 번째 부상자였다·
구울이 전부 정리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기사들이 남은 구울을 토벌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남은 한 마리까지 철저하게 정리해야 비로소 토벌은 마무리될 수 있었다·
남은 구울들은 전부 기사들에게 영역을 침범당했음에도 깊은 곳에 숨어 나오려 들질 않았다·
이는 공포에 질렸을 때 나오는 습성이었다·
남은 것들은 전부 ‘도망친’ 구울이었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들은 겁에 질려 혼자 저택을 뛰쳐나와 조이스에게 덤벼들었고 굴 속에 숨어 맹렬히 저항해댔다·
그리고 그 구울들을 겁에 질리게 만든 그 공포의 존재는····
포퍼는 정원 구석에 앉아 있는 한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년은 마을 주민들이 길어 온 물양동이를 머리 위로 촥촥 쏟아내며 태평한 얼굴로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저 친구의 정체가 갈수록 궁금해지는군·”
“저도 그렇습니다·”
“조이스도 불세출의 기재야· 몇 년 후면 충분히 검기를 발현해낼 수 있을걸세 헌데 저 친구의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 같군 그래·”
20세 정도의 나이에 희미한 검기를 발현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실로 엄청난 재능이었다·
“····”
베렐만은 데미안을 얕잡아보던 동료들의 언동에 은연중 동조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저 친구에게 의복을 가져다주게나·”
“제가 미리 명해 두었습니다·”
“우리 기사단의 복식을 마련해주는 건 어떻겠나?”
“···그건 실베린님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미 이터니아 행이 확정된 상황에 함부로····”
실베린 문하에 있는 이에게 함부로 기사단 인장을 갖다 붙이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포퍼가 베렐만의 말을 끊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그렇겠지· 그냥 해 본 말일세·”
베렐만이 느끼기엔 단순히 그냥 던져 본 말이 아니었다· 소년을 바라보는 포퍼의 눈빛은 금맥을 찾은 광부처럼 반짝이고 있었으니·
기사들은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를 비웃었다· 그리고 이제는 경외감 섞인 눈으로 흘끔거린다· 소년은 그러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포퍼는 한동안 데미안을 신비한 동물을 대하듯 지그시 바라보다 이내 침음을 뱉었다·
“흐음····”
이내 포퍼는 데미안에게 할 말이 생겼는지 천천히 다가갔다·
***
조이스는 지하 실험실에 남아 전투 현장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의문이 응어리처럼 맺혀 있었다·
벽과 바닥· 그리고 바닥에는 검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적어도 구울을 쓸어내는 과정 중에 마법의 개입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단단한 돌벽과 철창이 마치 케이크를 잘라 낸 것처럼 매끄럽게 파여져 있다· 그 깊이만도 무려 손목이 다 들어갈 정도였다·
완력만으로는 불가능한 경지다·
그 평범해 보이는 검으로 이렇게 해내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볼크 그리고 조이스의 동기인 펠릭스 또한 그의 옆에서 전투 현장을 조사하고 있었다·
펠릭스는 경험과 실력이 한참 떨어지는 탓에 후방에서 이들을 보조하고 있었다·
펠릭스가 볼크에게 물었다·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검을 휘두른 궤적을 보면 굉장히 투박하다· 엄밀히 봐서 검을 오래 배운 솜씨는 아니야·”
볼크는 데미안의 실력을 얕잡아 보고 평가절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 현장엔 많은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기록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읽어낼 수 있는 자들에겐 데미안의 재능을 평가절하 하려는 행위는 사실상 멍청한 짓에 가까웠다·
단순히 현장 검증을 위해 감정을 빼고 볼크가 도출해낸 정보를 펠릭스는 이를 비하의 의도로 받아들였다·
지금 상황에서 데미안을 시기하고 얕잡아보는 건 펠릭스가 유일했다·
그는 경험이 부족했고 사춘기 소년답게 기사단에 소속되고 자아가 과하게 부풀어 있었다· 더군다나 일전에 볼크를 비롯한 선배 기사 몇몇이 그를 얕잡아보던 그 분위기에 아직도 휩쓸려 있는 상태였다·
“운이 엄청 좋았군요·”
볼크는 펠릭스의 말을 무시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검기 혹은 고위 마법이 각인된 검일 것이다·”
조이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인챈트 된 검이라····”
펠릭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다면 검의 힘이지 본인 실력이 아닌 거군요· 뒷배를 잘 둔 덕이네·”
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려면 검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열여섯의 나이에다 검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상태라면 검기는 재능의 영역을 떠나 이치에 완전히 어긋난 소리다·
실베린 같은 대마법사를 스승으로 두고 있으니 인챈트 소드라는 가설도 나름 설득력 있었다·
하지만 조이스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가 검을 뽑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가 가진 검은 인챈트 소드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인챈트 소드는 수명이 짧고 마력이 새나가는 걸 막기 위해 평시에도 특수 인챈트 된 검집에 보관해야 했다· 데미안은 평범한 검집을 차고 있었다·
더군다나 돈만 냅다 쏟아넣으면 구할 수 있는 인챈트 소드를 가졌다고 실베린이 이터니아에 추천서를 써줄 리가 없었다·
그보다 더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볼크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면 마검이다····”
조이스는 그의 말을 들곤 잔잔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검이란 단어 자체가 현실성 없었지만 모든 정황을 종합해볼 때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둘 다 같은 거 아닙니까? 뭐 어느 쪽이든 자력이 아닌 게 확실하잖습니까·”
펠릭스는 마검과 인챈트 소드가 같은 것인 줄 알고 있었다·
볼크는 펠릭스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전혀· 그 반대다·”
“예?”
볼크는 펠릭스의 반응에 구태여 부연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조이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마검일 수도 있다·’
마검이라면 전혀 다른 차원의 능력과 재능이다·
마검과 인챈트 소드의 대표적인 차이는 바로 자아의 유무였다·
그 자아가 인간처럼 복잡한 사고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검은 각각 그만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마검을 다루는 데엔 조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마검의 선택을 받는 것·
다만 ‘마검의 선택’은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었다· 소드마스터 몇몇은 마검의 선택과 의지를 완전히 무시하고도 이를 완벽하게 다루는 자들도 있었다· 다만 엄청난 부작용을 감수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조건· 그건 바로 마압을 견뎌내는 것이었다·
마검에는 초월적인 양의 마력이 고밀도로 응축된 탓에 힘을 발현하면 그 주변엔 마압이 발생했다· 그 때문에 훈련되지 않은 자들이 그 주변에 있으면 혼절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마검을 쥐는 자는 근처에 있는 것과 차원이 다른 강도의 마압을 견뎌내야 했다·
이를 무시하고 함부로 마검을 쥐었다가 혼절해 몇 달간 의식을 잃거나 백치가 될 수도 있었다·
마압에 대한 내성은 수련한다고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마검을 다룰 정도가 되려면 천부적인 내성이 있어야 했다·
검기를 쓰는 것보다 급이 더 높게 느껴지는 경지다·
볼크 또한 데미안이 마검의 소유자일 것이라 짐작하는 듯했다·
마검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면 데미안의 신변에 위협이 가해질 수도 있었다· 물론 실베린이 곁에 있는 한 변을 당할 일은 없겠지만 여러모로 귀찮아질 수도 있었다·
펠릭스는 별거 아니란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잖습니까? 나도 마검만 있으면 이까짓 구울이고 아카데미고 그냥····”
볼크 또한 조이스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펠릭스에게 경고했다·
“펠릭스 너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거다· 마검에 대한 이야기는 반드시 함구하도록·”
“네? 아 넵!···으아악!”
펠릭스가 대답과 동시에 구울의 살점을 밟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체구가 큰 탓에 요란한 소리가 메아리쳤다·
“아오 왜 아직도 살점을 안 치워놨어·”
조이스는 펠릭스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펠릭스는 이렇게 직접 경험하고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살점과 피 가시와 뼈가 발디딜 곳 없이 빼곡했던 이곳에서 상처 하나 없이 서 있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나 할까·
마검을 쥔들 뭐 하겠나· 이렇게 넘어지면 1초도 안돼서 구울에게 사지가 뜯겨나갈 텐데·
펠릭스 또한 아카데미를 입학을 준비하는 탓에 뭘 하든 조이스와 한 묶음으로 취급했다·
엄밀히 말해서 펠릭스는 아카데미 입학엔 어림도 없었다· 이곳에 견습 기사로 들어온 것도 막대한 후원금 덕이 컸다·
조만간 아빠한테 졸졸 달려가 인챈트 소드를 사달라고 징징거릴 것이 뻔히 보였다·
조이스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
포퍼는 뒷짐을 지고 데미안에게 다가갔다· 가슴이 펴지고 탄탄한 근육 덕에 그는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데미안은 차분히 앉아 포퍼가 용건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실베린을 대동하지 않고 이렇게 단독으로 포퍼를 대면하는 건 데미안에겐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택을 지키던 기사들 또한 데미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는데 포퍼가 그 의문을 해소해 줄 거란 기대에 전부 이목을 집중했다·
데미안을 잔잔히 주시하던 포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네의 검을 보여 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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