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0
“기 기다리거라· 나들이용 옷으로 갈아입고 오겠다·”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아니다· 여기 있어도 된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옷장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옷장 부스 안에서 하얀색 벨뱃 커튼을 쳐냈다· 거기서 속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는 비비의 그림자가 커튼에 비췄다·
그러곤 옷들을 몸에다 이리저리 맞춰보며 콧노래를 부른다·
“흐음음 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데미안도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다 포기하고 우울하게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문득 자신이 한 일이 의미없는 일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제법 즐거워 보입니다·”
“즐겁다마다· 밑바닥에 처박혀 봐야 진정한 삶의 즐거움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난 정말 싫어했었다· 이제 다시 돌이켜보면 그 말도 나름 맞는 구석이 있는 것 같구나· 난 생애 몇 없는 삶의 즐거움을 누리는 중이다·”
“···보기 좋습니다·”
“그래 그리고 그대는 내 여흥을 위해 조금 더 수고해주어야겠다·”
“···영광입니다·”
비비는 시녀의 도움도 없이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긴 치마의 검은 린넨 드레스로 갈아입고는 걸어나왔다· 드레스와 깔맞춤한 검은 단화와 검은 보석이 박힌 머리핀까지 꼽아놓았다·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데미안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좋구나·”
한데 비비는 가만 서서 그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귀족과의 나들이가 처음이더냐· 그대가 날 에스코트해주어야 한다· 이대로 그냥 나가면 시종들이 그대를 보고 혀를 찰 것이다·”
“····”
데미안은 뭘 빠트린 게 있나 고민하다 예법에 맞게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왼팔은 뒷짐을 지고 비비에게 팔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꼬리에 살짝 웃음기가 감돌더니 곧이어 데미안의 손 위에 깃털을 올린 것처럼 자신의 손가락을 살짝 얹었다·
“우악스럽게 거머쥐는 법만 배운줄 알았더만 귀족스런 몸짓도 익혔구나·”
“···어릴 때 익혀둔 것입니다·”
데미안은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예법은 리자에게 배운 것이었다· 둘만의 놀이에서 종종 활용했을 뿐· 공방에서 쇳가루를 뒤집어 쓸 때만 해도 분명 평생 활용할 일이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그는 지금 공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인물과 함께 나들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가족이 없었다고 했거늘· 피는 귀한 가문에서 물려받았나보구나·”
“아뇨· 처음부터 끝까지 천한 피였습니다· 그리고 이건 눈요기로 배운 것입니다·”
비비가 인자하게 미소짓고는 말했다·
“사내의 가치는 태어날 때 무얼 가지고 있느냐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역경을 버티고 거듭나면서 완성되는 것이지· 그대의 피는 이제 더는 천하지 않다· 내가 보증하겠다·”
“···감사합니다·”
거기에 이어 비비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리고··· 재판이 끝나면 그대도 몸소 깨닫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우악스러운 그대의 몸짓도 사실 나쁘지 않았다·”
데미안이 픽 웃으며 말했다·
“···가시죠·”
데미안이 비비의 손을 살짝 쥐고 문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복도에서 대기하던 시종 한 명이 다가와 비비에게 말했다·
“항상 명하시던대로 파라솔을 들고····”
그러자 비비가 말을 끊었다·
“괜찮다·”
그리고 데미안이 보지 못하는게 등 뒤에 손을 돌리고 수신호를 보냈다·
단 한 명도 따라붙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
약간 경사진 잔디밭에 한 그루의 고목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데미안과 비비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그늘에서 데미안은 미리 챙겨온 손수건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비비가 그 위에 털썩 쪼그려 앉고는 기지개를 켰다·
“이 날씨가 늘 그리웠다·”
바르비시아에서 보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푸른 하늘이었다· 뭉게구름이 둥둥 떠가는 것만 봐도 마음에 평온해졌다·
데미안은 비비와 한발짝 떨어진 자리에 나무를 등에 기대고 앉았다·
그러자 비비가 데미안을 보고 말했다·
“조금 더 가까이 붙거라· 누가 보면 싸운 줄 알겠구나·”
“보는 눈이 제법 있습니다· 오던 중에 다른 이들의 눈길도 많이 끌었고요· 아가씨는 추문을 신경써야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 성은 귀족들의 휴양지 같이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휴양객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막무가내인줄 알았더니 이럴 때는 꼭 고양이 같이 조심스럽구나· 추문을 신경쓰기엔 이미 늦었단 건 알고 있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인도에 젊고 혈기왕성한 두 남녀가 표류되었다 살아 돌아왔다· 세상과 차단된 곳에서 단 둘이 말이다· 그러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 생각하겠느냐·”
비비가 본인이 말해놓고도 약간 민망한 듯이 데미안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데미안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간의 일을 실베린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거긴 무인도보단 지옥에 가까웠습니다·”
“저들은 그런 건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앞에선 아무 말도 안 하겠지면 뒷방에선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겠지·”
“추문이 돌면 저보단 공녀님이 더 타격이 크지 않겠습니까·”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기엔 내게 허락된 시간은 짧다·”
지금 그녀의 활기 넘치는 모습을 보면 서른 즈음에 죽을 사람 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비비가 시한부라는 걸 잊어버리곤 했다·
“···그 남은 기간동안 어떻게 지내실 겁니까?”
“내 인생을 위해 시간을 쏟을 생각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곳을 찾아다니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함께 여생을 즐길 것이다· 그대는 어찌할 것이냐·”
“이터니아를 졸업해야죠·”
“···꼭 그곳에 머무를 필요가 있느냐? 그대의 능력은 아카데미에 가두기엔 이미 차고 넘친다·”
“아직 부족합니다· 거기서 배운 게 아니었으면 바르비시아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알겠다· 혹여나 갈 곳이 없게 되면 공국으로 오거라·”
“···기회가 되면 한 번 들르겠습니다·”
대화는 거기서 잠시 끊겼다· 비비가 흘끔흘끔 데미안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날을 구체적으로 정하거라· 그리고 소풍 약속은 언제 지킬 것이냐· 여기서 이틀 쯤 가면 에메랄드빛 물과 반딧불이 같은 요정이 사는 호수가 있다·”
“여기서 떠나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 며칠의 시간도 투자하기 아깝다는 것이냐? 방학도 넉넉하게 주어질 텐데·”
비비의 눈썹이 서운한 듯이 살짝 처졌다·
“····”
“됐다· 약속도 못 지킬거면 뭣하러 말을 꺼내느냐·”
비비가 팔짱을 끼고 등을 돌리며 서운한 티를 잔뜩 보냈다·
데미안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오겠습니다· 다만··· 저 말고 누가 한 명 더 따라올지도 모릅니다·”
“상관없다·”
“어쩌면 두 명이 더 올지도 모르고요·”
“두 명은 싫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좋다· 그대는 언약을 목숨걸고 지키지 않더냐· 믿어보겠다·”
“하지만 중요도에 따라 우선 순위를 두기도 합니다·”
비비가 치마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언덕 아래로 펼쳐진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일어나보거라· 저기 보이느냐?”
그러고는 손으로 한 곳을 지목했다·
도시 중심을 가로지르고 대로를 군대가 행진하고 있었다· 멀어서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는데 퍼레이드를 하는 것처럼 화려했다·
“저게 뭡니까?”
“아버님이 돌아오셨구나·”
“···!”
“공국의 국경일 중 하나인 ‘성 루미나스 기념일’엔 항상 큰 행사를 치른다· 아버님은 이를 위해 움직이신 모양이구나·”
“공녀님이 마중 나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괜찮다· 아버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일이다·”
“···그 기념일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대공께서 직접 행차해십니까?”
비비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공국의 몇 없는 축제일이지· 내 오랜 선조이자 과거 성녀 중 한 분이셨던 루미나스께서 이날은 세상의 모든 악귀를 잠재우고 인간을 축복하신다 하여 기념한 날이다· 그렇기에 오랜 안녕을 기원하는 중요한 행사는 그날에 치르지· 집 계약도 이날에 하고 갓난아기에게 하는 세례도 기사 서임식도 아카데미 입학식도 이날에 한다·”
“여신의 피가 무엇인가 늘 궁금했었는데 성녀를 선조로 두고 계셨군요·”
“그래 알다시피 난 실패작이고·”
“···그 기념일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바로 내일이다· 공교롭게도 그대의 재판일과 겹치는구나·”
그러던 중 하늘에서 스티치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와 데미안의 앞에 멈췄다· 거기엔 이터니아의 봉인이 찍힌 두루마리가 물려 있었다·
데미안이 조심스레 두루마리를 쥐고는 펼쳤다· 그렇게 일 분 가량을 묵묵히 읽다가 말했다·
“저 도시의 행렬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립니까?”
“빠르게 간다면 삼십 분이면 충분할 것이다· 무슨 일이더냐?”
“···저 행렬에 제 손님도 있었군요·”
***
기사들을 대동한 공녀의 마차가 광장 대로에 멈춰섰다· 군중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구석진 곳에 대기했지만 주렁주렁 딸려온 호위병 덕에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마차 밖에서 휘장과 나팔수까지 동원한 큰 규모의 행렬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비비는 군중들이 너무 운집한 탓에 차마 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이 자리를 썩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시간이 차차 흐르자 그 긴 열병 대열의 꼬리가 서서히 광장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후미엔 기사들이 신주단지를 지키듯 겹겹이 둘러싼 마차가 하나 있었다·
마차의 외관에서부터 말까지 전부 검은색에 문짝엔 이터니아의 문양이 고풍스럽게 그려져 있다·
이를 보니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대감인지 아니면 긴장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군중의 경계선 앞에 서서 가만 서 있자 그 앞을 지나가던 기사들이 말고삐를 당기고 돌연 마차의 행렬이 우뚝 멈춰섰다·
저들만 멈춰선 덕에 대열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사고라도 벌어졌나 싶은 표정을 짓고 목을 위로 쭉 빼서 눈알을 굴려댔다·
웅성대는 소리들 때문에 제대로 듣지는 못했는데 무슨 명령이 떨어졌는지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꺾어 날 내려다 본다·
곧이어 기사들이 옆으로 비켜나와 마차쪽으로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차와의 일직선으로 통로가 뚫렸다·
마차의 창문은 굳게 닫혀 있고 새까만 커튼까지 쳐져 있다·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기는 한 걸까· 날 어떻게 확인한 것일까·
군중들과 기사들 모두가 날 쳐다본다· 시선이 굉장히 따갑다·
나는 앞으로 걸어나섰다· 왜 이리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위젤에서 함께 지낼 때는 이런 고민을 한 적은 없었는데· 떨어져 있던 시간이 너무 오래된 거 아닐까·
마차 문 앞으로 다가서서 크게 숨을 한 번 고르고 노크하려는 순간·
문이 덜컥 열린다·
그리고 익숙한 검붉은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칠렁거렸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 다음은 새하얀 팔뚝이 보였다·
검은 커튼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내 멱살을 잡고 마차 안으로 잡아당겼다·
“···!”
완강한 힘을 못당한 나머지 그대로 마차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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