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4
“짐승 치고는 치열이 사람하고 너무 비숫하구나 제자야·”
“···새로 사귄 친구가 한 짓입니다·”
실베린이 포옹을 풀고는 내 양 팔을 붙잡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친구?”
“···네·”
“얼마나 친하다고 네 어깨를 깨물어?”
“장난기가 많은 친구···입니다·”
“그리고 너는 이상한 거 못 느끼겠니?”
“흔적이 오래가는 것 말고는 잘 모르겠네요·”
“그거 말고 이 상처에 깃든 힘 말이야·”
“···네?”
그녀는 내 어깨의 흉터에서 쉽사리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제자야 네 상처에서 신성력이 깃들어 있어· 친구가 교단쪽 사람인가봐?”
“그건 저도 잘 몰라요·”
그녀는 내 속내를 해부하려는 듯이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 여자애 이름이 뭐야?”
무섭다· 성별 언급은 아직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트리샤라는 애입니다·”
실베린이 눈을 더 좁히고 한손으로 내 볼을 꼬집었다· 뭐지? 내가 또 뭘 놓친 거지?
“제가··· 뭘 또 잘못했나요?”
“아니· 그냥 꼬집고 싶어졌어·”
“····”
“말나온 김에 더 말해봐· 이터니아에서 친구는 얼마나 생겼어?”
부끄럽지만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은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다·
“세 명 만들었습니다·”
실베린이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듯이 눈을 몇차례 깜빡이고는 말했다·
“그게 다야? 이름은?”
“트리샤랑 세실 루나··· 이렇게 셋입니다· 이따금 서로 도움도 주고받고 하면서 잘 지내고 있어요·”
굳이 한 명 더 꼽자면 시온인데 그녀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아직 친구라 하기엔 애매한 위치였다·
“다 여자애네?”
“네·”
내 볼을 꼬집은 손에 힘이 살짝 실린다· 아무말 없었지만 어떻게 여자애만 골라서 만나냐는 핀잔이 들어오는 것 같다·
변명을 좀 하자면 사실 여자애가 조금 대하기 편한 감이 있다· 사내들 무래에 적응하고 어울리는 법을 알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혼자 지내고 외부 교류를 끊고 지내면서 그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나마 내가 교류할 수 있었던 건 리자나 수녀님들 정도였고 그래서 이성을 대하는 게 더 익숙했다·
“얼마나 친해?”
“밥 같이 먹을 만큼 친해요·”
“나중에 내가 이터니에가 복귀하게 되면 트리샤랑 세실은 따로 나한테 소개해주겠니?”
“세실은 제 정체를 몰라서 어렵고··· 트리샤는 마침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했어요·”
“흥미롭구나· 날 보고 싶어해?”
그녀의 말투가 제법 날카롭다·
“마음에 안 드세요?”
“···내가 확인하고 이상하거나 다른 의도가 있다면 너랑 격리할 거야·”
“····”
그녀는 내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농담이야· 친구를 만나는 건 네 선택이지 내가 어찌할 수 있겠니· 널 위험에 빠트릴 녀석이면 내가 간섭을 하겠지만 말이야·”
격리한다는 말은 분명 진심 같았는데····
“다만 어깨를 깨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이상한 것 같구나· 선생님은···네가 조금 더 밝고 건강한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어·”
트리샤가 이 말을 듣는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어쩌면 충격을 받고 눈물을 글썽일지도 모른다·
숙제가 하나 더 생긴 기분이다·언젠가 이 둘이 만날 때가 오면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갖도록 내가 잘 유도해야하지 않을까· 둘 모두 나에겐 중요한 사람이니 말이다· 한데 예측불허의 그 두 여자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만나면 꽤 괜찮은 애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실베린이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한숨을 쉬고는 내 볼을 꼬집은 손을 풀었다·
“좋아· 일단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움직이자·”
“어디로 가는 건가요?”
“공국의 메모리얼 홀이란 곳에서 행사가 있다네· 나는 책임지고 널 데려오기로 했어·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말없이 사라질까봐 다들 안절부절하더라고·”
뭘 위한 행사인지는 모르겠다만··· 이렇게 꽃단장을 시킨 걸 보면 제법 규모가 큰 행사인 건 분명했다·
실베린이 회랑을 가로지르며 앞서가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회랑의 끝에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번엔 실베린이 늘 타고 다니던 이터니아의 마차가 아닌 가이낙스 가문이 문장이 그려진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부와 그 뒤에 딸린 호위병들이 우리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대공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내 예상보다 더 큰 행사가 될 것 같았다·
***
메모리얼 홀은 공국 중앙 기사 양성소의 옆에 있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본 기사 양성소의 훈련장에서는 단 한 명의 기사도 볼 수 없었다· 중요한 행사를 앞둔 탓에 전부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햇빛이 반사되어 눈부실 정도로 하얀 대리석· 그리고 황금빛 돔이 도시의 한 가운데에 불룩 솟아난 덕에 메모리얼 홀은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마차가 지나는 길 중간중간엔 황금빛 휘장이 걸려 있었다· 삼엄한 경계와 황금빛 갑주를 입은 근위병들이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길을 지킨다·
심지어 더 가까워지니 마차로엔 고급스런 카펫까지 깔려 있었다·
생전 처음 맞이하는 호화스러움을 보곤 나는 잠시 숨을 죽였다·
실베린이 바깥 풍경을 보며 넌지시 내게 말을 던졌다·
“듣던 것보다 더 성대하게 치르는구나·”
“선생님도 처음인가요?”
“나도 처음이야· 이 자리에 외부인을 부르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단다·”
“···선생님 덕에 귀한 경험을 쌓게 됐네요·”
나는 당연히 실베린의 제자 신분으로 함께하는 것이겠지·
그러자 실베린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네 덕에 그 자리에 끼게 된 거란다·”
“···네?”
그녀의 말은 내 뒤통수를 크게 한 대 떄리는 것 같았다· 그저 내 기분을 띄워주기 위한 말이 아닐까 계속 의심까지 들었다·
잠시 뒤 우리는 메모리얼 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고 보니 그 곳엔 입장을 준비하는 수백여의 기사들이 밀집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곳엔 견습 기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행사 준비를 도왔다·
그 외 다른 귀족과 여식들도 보였는데 가장 많은 머릿수를 차지하는 건 단연 기사들이었다·
우리가 마차에서 내리자 부담스러울 정도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귀족들은 우릴 보며 입을 가리고 쉴세없이 떠들어댔다· 처음엔 실베린의 외형이 눈에 띄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많은 수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 걸 느낄 수 있었다· 기분 나쁘지 않은 묘한 위화감이랄까·
마차에서 나오자 안내를 담당하는 열댓 명의 시종들이 우리에게 붙었다·
“귀빈 대기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다 덮어버릴 것 같은 웅장한 크기의 메모리얼 홀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복도를 지나는 도중 벽에 걸린 이름 모를 사람의 초상화가 보였다· 더 나아가니 또 다른 사람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이런데에 그림이 걸릴 정도면 높으신 분일텐데 고위 귀족이라고 보기엔 허름한 옷차림에 머리도 관리를 안 한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었다·
또 다른 초상화는 이상하게도 단정한 기사의 모습이다· 가면을 쓴 남자· 나이 든 노파· 중년 남성· 나이도 신분도 전부 제각각이라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던 도중 나는 궁금함을 못 참고 물어보았다·
“저 초상화는 대체 누굴 걸어둔 겁니까?”
그러자 옆에 졸졸 따라오던 한 시종이 답했다·
“백금 방패의 기사들입니다· 일개 농부에서부터 검신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출신을 막론하고 율리시아 공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검신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백금 방패의 기사’에는 대륙 제일의 소드마스터 젤단 하트님도 이름을 올리고 계십니다·”
시종의 말투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나친 초상화 중에는 젤단 하트의 모습도 있었다는 건가?
나는 실베린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선생님은 알고 계셨어요?”
“응·”
“···!”
그러고는 내게 힌트를 하나 던져주었다·
”내가 알기론 젤단 하트가 젊을 때는 얼굴을 보이길 싫어했다고 하더라구·”
복도를 지나치며 본 열댓 개의 초상화 중 얼굴을 가린 한 남자의 모습도 있었다· 잠깐 뒤돌아보았지만 너무 멀리 지나친 상태였다· 그 가면을 쓴 남자가 젤단 하트란 말인가· 비록 본 모습을 마주한 건 아니지만 검신의 모습 일부를 봤다는 것 하나만으로 심장이 뛰었다·
우리는 호화로운 황금색 통창이 있는 개별실로 이동했다· 시종들은 필요한게 있다면 종을 울려달라는 말을 남기곤 사라졌다·
사실 어느것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더럽고 불쾌한 환경은 얼마든지 적응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지나치게 격식있는 자리는 불가능했다·
우리는 개별실에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하고 얼마뒤 착좌식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메모리얼 홀의 중앙 돔에 귀족들과 수백여 명의 기사들이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멀찍이 그 행사장의 상석엔 비비의 모습도 보였다· 너무 멀리 있는 탓에 인사를 나눌 수는 없었다·
나는 실베린과 함께 정해진 자리에 착석했다·
수백 명이 앉아 있는데 기침소리 한 번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 행사가 무얼 위한 것인지 파악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사들은 전부 습관처럼 자신의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누구는 수시로 두루마리를 펼쳐보며 무슨 선언문 같은 걸 암기하고 있었다·
이곳은 기사 서임식이 행해지는 자리인 모양이었다·
행사의 주인공이 될 만한 사람은 아무래도 따로 고지를 하고 한 곳에 모여 앉는 듯했다· 나와 실베린은 뒤쪽에 마련된 귀빈석에 배치된 걸 보면 그냥 참가를 했다는 것에 의의를 둔 것 같았다·
잠시 뒤 시작을 알리는 웅장한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울리고 사회자가 누군가의 이름을 호명했다· 곧이어 견습 기사들의 대표가 나와 엄숙한 선서식이 행해졌다·
그 다음으로는 가이낙스 대공이 단상에 올라섰다· 그가 올라서자 좌중들은 숨소리조차 함부로 내지 못했다· 절도있는 몸짓과 눈빛에서 그 어떤 귀족도 흉내낼 수 없는 품위가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곧이어 가이낙스 대공이 기사 작위를 수여받을 이들의 이름을 직접 호명했다·
그렇게 부름을 받은 열댓 명의 기사들이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홀의 중앙을 가로지르며 단향을 향해 걸어나섰다·
나팔 행진곡이 울리고 시종들이 꽃잎을 뿌리며 그들의 발이 닿는 곳을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행사에 머릿수를 채우는 역할로 온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내 이름이 호명된 것도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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