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5
선서문 제창이 끝나자 곧이어 서임식이 진행되었다· 내 옆에 실베린은 다리를 꼬고 앉아서 단상을 주시했다·
곧이어 가이낙스 대공이 몸을 일으켰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매부리코와 두꺼운 목· 두드러진 광대와 사각턱· 그리고 짧게 다듬은 수염· 유별나게 큰 체구탓에 의복이 꽉 낀 것처럼 보였다· 가이낙스 대공은 수려한 군주의 의복이 아니었다면 길거리 싸움꾼으로 봤을 법한 다부지고 강인한 인상이었다·
그 모습을 보노라면 사윗감으로 강인한 남자를 찾는다는 소문이 과연 납득이 갔다· 그의 눈에는 다른 사내들이 다 약하고 비실하게 보일테니 만족이 안 되겠지·
돔에 달린 천창에서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고 그 빛은 정확히 서임식을 위해 대표로 단상에 나선 기사들에게 집중되었다·
대표로 서임식을 받는 기사의 수는 고작 다섯 뿐이다· 나잇대는 이십대부터 손주를 두고 있을 것 같은 노인까지 천차만별이었고 외형에선 그 어떤 공통점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떤 공을 세운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은 견습 기사들에게 굉장한 존경의 눈빛을 받고 있는 걸로 보아 저마다 제법 굵직한 업적을 등에 얹고 있는 듯했다·
기사들의 은색 갑주가 눈부시고 아름답게 빛나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가벼운 바람에 망토가 펄럭인다·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마치 종교의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메모리얼 홀은 고요하고 엄숙했다·
“레드필드의 로나운은 단상 위로 올라오라!”
가이낙스 대공이 이름을 호명하자 단상 아래서 대기하고 있던 삼십대 무렵의 기사 하나가 계단을 타고 올라선다·
모든 이들이 부러움과 선망이 담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먼저 나선 기사가 대공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레드필드의 로나운· 그대는 빈곤과 기아 속에서도 정직함과 명예를 잃지 않고 타인의 귀감이 되어 왔다· 여신의 축복 아래 그대는 더욱 장성할 것이며 나 또한 그대의 등뒤에 함께할 것이다· 하늘의 뜻에 따라 그대에게 기사 작위와 여신의 축복이 담긴 은검을 수여하겠다·”
로나운이라는 기사는 투구를 벗고 말했다·
“이 제 오른팔이 백골이 될 때까지 검을 쥐고 기사도의 덕목을 위해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신관 한 명이 비단으로 받쳐든 은색 검을 그의 앞에 내민다· 그가 검을 받아들자 좌중들의 정갈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곧이어 다음 기사의 이름이 불리고 작위 수여가 이어졌다·
“빈 대평원의 소렐 그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혜를 발휘해 가엾은 어린 영혼들을 구제했다· 그대의 머릿속에 깃든 축복을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쓰도록·”
내 옆에서 턱을 괴고 지루한 얼굴로 지켜보던 실베린이 조용히 내게 귓속말을 했다·
“소렐은 들어본 적 있어·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악명 높은 흡혈귀과 대면하고선 오직 혀 하나로 구워 삻아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포로들을 모두 생환시켰다고 하더라구·”
“대단···하네요·”
“맞아· 싸우지 않고 얻은 승리는 더욱 값진 법이지· 너무 인상적이라서 그 이름이 쉽게 안 잊혀졌어·”
“····”
실베린이 이렇게 기억해줄 정도면 대단한 게 맞다· 세상은 넓고 대단한 사람은 많구나·
그들은 각각 기사도의 덕목에 부합하는 업적을 세웠고 그로인해 칭송받는 모양이었다· 실베린이 눈을 얇게 뜨고 내 얼굴을 가만 뜯어보았다·
“제자야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실베린 같이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 소렐이란 남자를 좋게 말하니 솔직히 속이 좀 쓰렸다· 내 또래에 가까운 젊은 남자라 더욱 신경이 쓰였다·
“아닙니다·”
실베린이 픽 웃으며 달래주듯 말없이 내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나도 무언가 공적이랄 걸 세우긴 했지만 공국의 기준에선 조금 부족한 모양이었다· 내게 뭘 하사할 것이었음 저 다섯의 기사들 속에 껴넣었겠지· 일전에 내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낸 고위 귀족을 마주하기도 했으니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에서 다섯 명의 기사를 대동한 서임식이 마무리되었다· 행사는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것일까· 단상에 있던 신관이 어딘가로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리고 좌중들고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있었다· 모두 마무리를 준비하는 듯했다·
하지만 가이낙스 대공은 기사들이 돌아갔음에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서임식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신관 다섯이 무언가를 들고서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좌중들이 볼 수 있도록 반듯이 세워 받쳐들었다·
그건 공국의 상징인 사자의 문장이 새겨진 백금의 방패였다·
곧이어 숨소리조차 안 들리는 고요함을 뚫고 가이낙스 대공의 단단한 외침이 메아리쳤다·
“위젤의 기사 데미안은 율리시아 대공국의 부름에 응하라·”
그리고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가이낙스 대공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아직도 메아리친다· 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좌중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자리에서 기립했다· 그들은 전원 그렇게 서서 부름을 받은 인물이 앞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실베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로 날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베린은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보렴 내 사랑스런 제자야·”
나는 다녀오겠단 말을 하는 것도 미처 잊어버렸다·
몸을 일으키자 내 손을 붙들었던 실베린이 손이 스르르 떨어졌다· 홀 중앙을 가로질러 걸어나섰다· 정말 날 부른 것인지 믿기지 않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기립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날 바라본다· 그 눈빛에는 내게 과분하다 느껴질 정도의 꾸며내지 않은 존경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 고요함 속에서 내 발소리만 소리를 허락했다·
그리고 마침내 단상 위에 올라가 가이낙스 대공을 마주했다· 나는 다른 기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몸을 낮춰 형식을 맞췄다·
그는 인자한 표정으로 내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고는 강인해보이는 인상과는 안 어울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멸시 속에서도 원한을 품지 않았고 악이 모든 걸 집어삼켜도 홀로 희망을 놓지 않았다· 돌파구가 없는 곳에서도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극복하고 죽음을 눈앞에 마주한 상황에서도 용맹히 싸워냈다·”
“····”
“그 덕에 수많은 기사와 가신들 그리고 여신의 핏줄인 비비 공녀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대는 기사도의 덕목을 실현한 누구보다도 명예로운 기사이며 만인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러므로 이 백금의 방패는 그대의 것이며 그대의 업적은 공국의 역사 일면에 자리할 것이다·”
“···영광이오나 제게는 지극히 과분한 것입니다·”
가이낙스 대공이 작게 말을 이었다·
“···더불어 한 아이의 아비로서 그대에게 감사하고 싶다·”
신관들이 내 앞으로 다가와 백금의 방패를 건넨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방패를 받아들었다· 과연 그안에 담긴 의미만큼이나 무거웠다·
훗날 전해듣기론 ‘백금 방패의 기사’ 칭호를 받은 위인 중에 소드마스터는 젤단 하트를 포함해 세 명 대마법사는 한 명이라고 했다·
그 명성과는 안 어울리게 내 기억 속 그 소드마스터들의 초상화는 평범하다 못해 추레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패를 수여받을 당시엔 아무런 이력이 없는 떠돌이 농부 유랑극단원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름을 날리게 된 건 한참 뒤의 이야기였다·
***
루나가 장작을 한가득 안아들고는 화덕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이를 보던 주방장이 말했다·
“아이고야 그 여린 몸으로 또 그걸 어떻게 들고 왔어· 기다려 부싯돌을 가져올테니·”
“···괜찮아요·”
루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정령을 소환해 장작에 불을 피웠다· 풀무질을 할 것도 없이 불씨가 삽시간에 번졌다·
푸짐한 체형의 여자 주방장이 이를 보곤 눈이 놀란 듯이 동그래졌다·
“마 마법이구나? 이터니아 학생이라더니 역시·”
정령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삶을 살았던 탓인지 주방장은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 정령을 인식하지 못했다·
“···비슷한 거예요”
“그러니? 그 근데 불이 조금 센 거 같은데·”
말이 끝나자 마자 대장간 화로처럼 타오르던 불이 한층 사그라들었다·
“어머 어머·”
주방장은 놀란 얼굴로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루나는 뿌듯해하는 기색도 없이 긴 금발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앞치마를 동여매며 요리 준비에 임했다·
그러고는 커다란 항아리를 낑낑대며 옮기고는 화덕 위에 올렸다·
“준비는 됐어요····”
“그래· 고기를 약재를 섞어서 약한 불에 두시간 푹 삶아야 하거든? 월계수 잎이랑 후추 그리고 롱디널 뿌리를 챙겨와야 해·”
“···불은 이제 적당한가요?”
주방장이 고개를 숙여 화덕 불을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말했다·
“딱 좋아· 루나 너는 창고에서 재료 챙겨· 넌 몸이 얇아서 힘은 못 쓰겠다· 내가 그동안 솥에 물 채워 넣을게·”
“···네·”
역할을 분담하고 얼마뒤 루나가 재료를 가져왔을 땐 오크통 만한 솥의 물은 가득 채워지다 못해 이미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주방장은 스튜에 넣을 고기를 손질하고 있었고 루나는 말없이 그 옆에서 롱디널 뿌리를 물에 씻었다·
수증기가 주방을 가득 채울 때 쯤 주방장은 루나를 곁눈질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굳은살 없는 길고 가느다란 손· 고양이 같은 눈매와 인형같은 얼굴· 귀족스런 정갈함이 느껴지는 몸짓· 이 후미지고 고기 잡내가 가득한 주방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근데 귀하게 자란 아가씨 같은데· 아카데미에도 다닌다고 했고····”
“····”
“이런데서 일을 배우려는 이유가 있어? 난 피냐르 할매가 아가씨를 소개해줬을 때 깜짝 놀랐어· 주방일하고는 너무 안 어울려서 말이야· 학업에 집중하기도 바쁠 텐데 리그베드까지 와서 이렇게 고생하는 거 보니까 좀 안쓰럽네·”
루나는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괜찮아요·”
“혹시 학비가 감당이 안 되니? 있지 마법 같은 거 부릴 줄 알면 다른 좋은 일자리도 구할 수 있을텐데· 수석 애들은 어디서 데려가려고 여기저기서 안달이고 그러잖니· 너는 수석 정도는 아니라도 충분히 밥벌이 잘 할 것 같은데·”
루나는 괜히 민망해졌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소심하게 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너무 궁금해서 그래·”
“···요리 배우고 싶어서요·”
주방장이 고기손질을 하다 말고 루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귀하게 자란 아가씨면 밑에 부리는 사람들도 많을텐데· 뭐하러 여기까지 와서 고생해?”
“전··· 이게 좋아요·”
“참 별나· 요리는 배워서 어디다 쓰려고?”
“비밀이에요·”
“에이 뭔데? 뭐 대단한 일이길래 그렇게 감춰?”
“····”
“나한테만 말해봐· 뭔지 알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
그녀가 망설이다 수줍게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 친구랑 같이 집에····”
루나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주방장의 시선을 피했다·
“뭐? 뭐라고?”
“복귀하면···그···축하····”
루나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가더니 급기야 물 끓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어? 친구도 같이 일하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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