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7
구속은 풀리고 나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끝내 젤단 하트의 시험을 통과한 녀석의 이름은 듣지 못했다·
비비의 마차와 어색한 동행은 숙소로까지 쭉 이어졌다· 실베린은 돌아가는 내내 불만이 섞인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녀는 턱을 괴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저 여자는 이터니아 복귀길마저 따라올 것 같구나·”
조금 과한 것 같긴 하다만 비비 공녀의 아쉬움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나는 그녀에게 몇 안 되는 의지할 만한 동료고 내가 이제 떠나면 그녀는 한동안 적적해지겠지·
“선생님도 이터니아로 같이 복귀하시는 건가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제 갈라져야 하나요?”
“응· 그렇지만 네 복귀길에 한동안 동행할 거야· 내가 배웅해주려고· 같이 가고 싶었던 곳도··· 하나 있고 말이야·”
“좋아요·”
공국에서의 일정이 마무리 됐으니 나도 이제 이터니아로 돌아가야 한다· 이터니아는 학기 중이고 내가 꾸물대면 그만큼 소중한 수업이 날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실베린과 바로 헤어지지 않는다는 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성 내부에 진입한 뒤로 마차가 멈춰섰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비비의 마차도 우리 뒤에 멈춰섰다·
실베린과 함께 마차에서 나오니 비비도 마차에서 내렸다· 비비는 혼자였고 어찌할 줄도 모른 채 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우릴 따라온 건가·
실베린을 어려워하는 모양이다· 실베린이 뒤쪽에 떨어져 있는 비비를 슬쩍 흘겨보았다· 어쩌면 실베린의 적대감을 감지하고 선뜻 다가오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기가 다소 무거워졌다·
비비가 이토록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건 처음이다·
실베린이 팔짱을 끼고 차갑게 말했다·
“네게 무슨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잠시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비비와 실베린 사이엔 차가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어떤 사연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눈치를 봐선 이 둘을 더는 가까이 둬선 안 될 것 같았다·
실베린이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다녀와·”
내가 비비에게 걸어가자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꼭 죄수가 가족과 면회를 하는 것만 같다·
비비가 종종걸음으로 날 맞이하고는 내 두 손목을 꼭 붙잡았다·
“참 멋지게 차려입었구나· 그대가 꼭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공녀님도 무척 아름답습니다·”
“빈말은 지겹도록 들어봤지만 그대에게 들으니 느낌이 다르구나· 전해줄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아버님이 그대를 보고 싶어한다·”
“따로 하실 말씀이 더 있나보군요·”
“그런듯 하구나· 죄지은 것도 아니니 너무 부담 말거라· 그리고··· 그대는 언제쯤 떠날 것이냐?”
“더 지체하지 않고 내일 떠날 겁니다·”
비비의 얼굴에 잠시 쓸쓸한 기운이 스쳐갔다· 하지만 크게 내색하려 들지는 않았다·
“···알았다· 이곳에 얼마든지 머물러도 되고 공국 어디에서든 환영받을 몸이 되었지만 그대에겐 끝내야 할 업이 아직 많겠지· 오늘 저녁 무렵에 아버님께서 이 성에 오실 것이다· 준비하고 있거라· 그리고····”
비비가 선뜻 말을 끝맺지 못하고 주저했다·
“또 남기실 말씀이 있습니까?”
곧이어 원망 섞인 눈빛으로 실베린을 슬쩍 흘겨보고는 말했다·
“그대가 떠나기 전까지는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내 착각이었구나··· 떠나기 전에 날 위해 시간을 내어줄 수 있겠느냐? 한 시간 만이라도 좋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떠나는 것이지만 일분 일초가 급한 건 아니었다·
“공녀님이 원하는 시각에 나와서 기다리겠습니다·”
비비가 이를 드러내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내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래 그거면 됐다···· 저녁 여섯시에 이 성의 서쪽 정원 느티나무 아래에서 보자꾸나· 꼭 둘만의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그러고는 휙돌아서서는 마차에 올라탔다·
나도 용무를 마치고 실베린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실베린의 기운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불같은 눈으로 비비의 마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선생님?”
***
비비는 빗질을 하고 몸단장을 하는데 공을 들였다· 메모리얼 홀에서의 서임식이 끝난 뒤라 크게 손 볼건 없었지만 더 눈에 띄고 싶었기에 여기저기 손을 보고 있엇다·
그녀의 목적은 그저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기억에 남아야 때떄로 생각나고 생각나면 보고 싶고 그렇게 훗날을 기리며 씨앗이라도 뿌려놔야 공국에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나 싶었다·
그리고 준비를 마칠 즈음 시종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방장은 준비가 다 끝난 듯 보입니다·”
“알았다· 이제 가보자·”
비비와 시종이 방에서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정원에는 요리사가 카트를 하나 끼고선 대기하고 있었다·
고소한 빵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그녀가 물었다·
“식지는··· 않았겠지?”
“손이 데일 정도라 오히려 식혀야 할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리고 식었다 해도 맛이 변하지는 않을습니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다·”
비비는 걸음을 재촉했다· 저녁 노을이 지고 데미안과의 약속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약속했던 서쪽 정원 느티나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아래엔 사람이 앉아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카트 위에 올려진 접시를 두 손으로 직접 들고 나섰다· 기대에 찬 마음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러다 멀찍이서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비비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새하얀 피부와 바람이 흩날리는 검붉은 머리카락·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실베린이었다·
“····”
비비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녀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었다· 실베린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쿡쿡 찌르며 장난을 쳤다·
그림 같이 아름답고 잔잔한 풍경이었지만 비비는 마음 편히 감상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한 시간 조차도 허락되지 않은 것일까· 그렇게 부탁을 했거늘· 무기력해져서 뭘 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비비는 풀이 죽은 상태로 가만히 서 있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돌아가자꾸나·”
“아가씨?”
몸을 돌려서는 왔던 길을 힘없이 걸어나섰다·
시종들이 그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한 걸 옆에서 내내 지켜봤었기 때문이다·
비비는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걸어가다 가만 멈춰서길 반복했다·
그러다 무언가 북받친 눈빛을 하고는 또 다시 휙 돌아섰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데미안에게 다가갔다·
실베린의 적대적인 시선이 따갑게 쏘아붙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종들이 따라붙어서 데미안의 옆자리에다 돗자리를 펼쳤다·
비비는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접시의 덥개를 열였다·
일전에 데미안이 먹고 싶다고 언급한 산크로티스식 애플파이였다·
사람의 기척을 감지한 데미안이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오셨···습니까·”
그가 비비의 얼굴을 보고는 난감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건데 그도 어쩔 수 없이 불청객과 동행해야 했던 모양이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고 무거운 공기만이 흘렀다·
데미안이 신경전을 벌이는 두 여자 사이에서 어쩔줄 모르고 진땀을 뺐다·
독기가 가득 오른 비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혼자만의 시간도 허락되지 않다니 강압적인 지도를 받고 있나 보구나·”
실베린을 두고 비아냥대는 말이었다· 웬만한 강심장도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이었지만 비비는 남은 앞날이 짧았기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둘만의 시간에 마음대로 끼어드는 건 명백히 결례였다· 이 부분은 지적해도 충분했다·
실베린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자의 손목에 언제 또 수갑을 채울지 모르는데 그냥 내줄 수는 없어서 말이야·”
데미안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는 듯 보였지만 답이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비비는 애플파이를 한 조각 접시에 올리고 데미안에게 건넸다·
“난 그대를 곤란하게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 편하게 있거라·”
“하려던 이야기가 있으셨습니까?”
“그대와 편안한 시간을 보내려 한 것 뿐이다· 또··· 내가 특별해 챙겨준 것도 없었고 말이야·”
그리고 실베린을 흘겨보고는 마지못해 파이를 한조각 담아 앞에 슥 내밀었다·
“드시죠·”
그렇게 그들은 말없이 먹기만 했다· 무려 한 시간 동안·
***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는 다시 단정히 몸 단장을 하고 튜닉을 걸쳐 입었다· 가이낙스 대공과의 일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전날 한 번 보긴 했지만 긴장되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한 국가를 통치하는 최고 권력자를 알현하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귀족의 눈조차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일이다·
나는 가이낙스 대공이 머무르고 있는 귀빈실 문에 노크를 했다·
곧이어 시종 하나가 안쪽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전날 보았던 그 싸움꾼 같은 인상의 가이낙스 대공이 의자에 앉아서 날 맞이했다·
“아 기다리고 있었네·”
“다시 만나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인사는 됐고 악수나 한 번 하지·”
말투나 분위기가 시험 감독관 같이 차갑고 감정이 절제된 말투였다·
그가 건넨 손에 악수를 하자 손바닥을 타고 단단한 힘이 전해진다· 내 힘을 가늠해보려는 것일까·
가이낙스 공작이 독수리 같은 눈매로 날 뚫어져라 본다· 그 시간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벌거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좋아· 충분해·”
다행히도 대공의 기준을 충족한 모양이었다·
“앉게나· 비비의 성질을 받아주느라 고생했다고 들었네·”
“아닙니다·”
“부정할 거 없어· 비비의 성격은 나도 잘 알아· 일찍 어미를 잃어서 비비에겐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면이 많이 부족해· 고집과 집착이 무척 세고 원한은 평생 기억할 정도로 독기가 있지·”
“제가 본 공녀님은 단단하면서고 곧은 분이셨습니다·”
“딸아이가 자네를 두고 한 평가와 똑같군·”
“····”
“딸아이가 내게 하는 이야기 중에 절반은 자네에 관한 이야기였지· 비비가 알고 있는 정보 대부분은 나도 알고 있어·”
“저에겐 과분한 관심입니다·”
“아니 자네는 그럴 자격이 있어· 환수를 베어내지 않았던가· 비비가 말하길 그대에겐 남들과 다른 특별한 힘이 있다더군· 무슨 힘인지 내게 귀띔해줄 수는 없나?”
“····”
“역시 태도가 조심스러운 걸 보니 주변에 알려선 안되는 것이로군· 그 부분에 관해선 기밀을 유지할 터이니 걱정 말도록·”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네 또한 내 딸아이와 데이트를 즐겼다는 사실 또한 발설하지 않도록 하고·”
“···?”
내가 뭘 즐겼다고···?
“아 그리고 자네를 보자고 한 데엔 다른 이유가 있다네· 자네는 백금 방패를 받을 만큼 훌륭한 공적을 세웠어· 그리고 그 같은 공적엔 그만한 보상이 있어야 하지·”
“····”
그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고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원하는 땅을 말하도록·”
이럴수가· 봉토를 하사하려는 건가·
지주가 되는 건 어릴 때부터 꿈꿔오던 일이었다· 다만 난 공국의 지리를 하나도 모를 뿐더러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땅을 하사받는다 해도 어떻게 관리하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터니아에 입학하고부터 지주가 되는 것에는 흥미를 잃기도 했다·
“····”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나보군·”
땅이라 한다면··· 이터니아와 가까웠으면 좋겠고 관리를 하지 않고 방치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숨겨진 자원도 많으면서 다른 귀족들이 탐내지 않아서 정치적인 분쟁에 휘말리지도 않아야 한다·
그 좋은 곳을 내가 어떻게 알까· 공국의 지리를 꿰뚫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던 중 불현듯 내 머릿속에 한 지역이 스쳐갔다· 공국의 땅 중에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지역이 하나 있었다· 기회가 넘어가기 전에 나는 제빨리 대답했다·
“실은 눈여겨 본 곳이 하나 있습니다·”
가이낙스 대공의 눈썹이 한 번 씰룩이며 흥미를 보였다·
“말해보도록·”
“바르비시아 땅 일부를 봉토로 받고 싶습니다·”
바르비시아는 원시 상태의 자연을 보전하고 있었고 이는 즉 아무도 개발하지 않은 지역임을 의미했다· 그리고 누구도 원하지 않는 땅이었다·
그가 날 보며 말없이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단순히 검술에만 재주가 있는 게 아니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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