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8
“버려진 땅을 원하는 이유를 듣고 싶군· 그 안을 표류하며 무슨 가능성이라도 발견한 것인가?”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내겐 가장 중요했다· 괜히 토지 떄문에 정치적 분쟁에 휘말릴 일이 없어야 했고· 기사 작위와 함께 받는 봉토는 최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정도에 그치는 게 일반적이다· 과수원이나 포도밭을 가꾼다고 해서 내 생계에 얼마나 큰 변화가 있겠나·
하지만 이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원시적 환경에서 자란 수많은 약초들· 그리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광맥들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가이낙스 대공이 입꼬리가 흡족한 듯이 움직였다·
“안정을 도모하기보단 도전을 택한다라· 사내다운 기백이 느껴지는 선택이군·”
도전이 아니라 그냥 두고 방치해도 무방한 곳을 찾은건데 느낌이 이상하다· 왜 이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
“····”
“순환계가 조성되는 데에는 대지의 마력이 필수적이고 그 대지의 마력은 필시 지저에 응축된 마석에서 나오는 것이지·”
“····”
“그 마석의 광맥을 찾기만 해도 막대한 부를 손에 거머쥘 수 있을테지· 과연·”
잠깐만 내가 생각했던 거랑 다른데· 일부러 생색내려고 버려진 땅을 고평가하는 건 아닐거라 믿는다·
“좋다· 그대의 요구는 재무관과 검토 후 반영토록 하겠네·”
“가 감사합니다·”
“용무는 끝났으니 가봐도 좋다· 내 딸이 많이 무료한 모양이니 남은 시간동안 그대가 같이 달래줬으면 좋겠군·”
“···명심하고 이행토록 하겠습니다·”
“강요는 아니고 권유라네· 그 아이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가급적 좋은 시간만 보냈으면 하는 바램이네·”
“···한가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좋다·”
“주제넘은 질문이 될수도 있습니다·”
“허락하겠다·”
“공녀님의 병은 정말 치유할 수 없는 것입니까? 정말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까?”
“방법이 있는데 우리가 찾지 못한 것 아니냐고 나무라는 것처럼 들리는군·”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 욕심은 나쁘게 볼 건 아니지· 다만 우리는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했고 결국 찾지 못했네· 그대의 스승도 ‘여신의 피’를 정화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수 년간 공을 들인 사람 중 하나일세· 그 여자도 끝끝내 방법을 찾지 못했지”
실베린이 그 병을 치유하려고 몇 년을 썼다고? 그런데 왜 비비랑은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 거지?
“스승님도 공녀님의 문제에 몇 년을 할애하신 겁니까?”
“아 대마법사는 개인적인 이유로 그 문제에 매달렸을 뿐이야·”
실베린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가이낙스 대공이 말을 이었다·
“엘프들의 기록보관소에는 어쩌면 그 해결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세상의 모든 기록이 그곳에 있다니까· 하지만 그곳은 공국 아니 어쩌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네·”
엘프들의 기록보관소는 대체 뭐길래· 이터니아의 교감이자 엘프인 에르제베트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인가·
아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실베린이 먼저 부탁을 해봤겠지·
“기록보관소는 인간의 출입이 금지된 곳입니까?”
“인간과의 교류가 끊긴지 사백 년도 더 된 곳이지· 출입이 금지되기는 커녕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그곳에 치료법이 있다고 확실히 장담할 수도 없어·”
정말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겠구나·
“···미약하지만 그 병의 치유법을 찾는데 제 힘을 보태겠습니다·”
가이낙스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리 기대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나 또한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들도 답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니·
***
십수 명의 기사들이 마찻길 양 옆에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자리를 지킨다· 비비와 그 신하들이 마차 앞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실베린이 나와 비비를 슬쩍 흘겨보고는 말했다·
“마무리하고 올라오렴·”
그러고는 먼저 마차 위에 올라탔다·
실베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비비가 리본으로 묶은 작은 상자를 하나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속에 담아둔 말이 있는 듯 했으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공녀님·”
“····”
“방학 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약속을 안 지치면 그대를 사형 시킬 것이다·”
웃자고 한 말이겠지· 표정이 너무 진지한데 비비는 농담에는 재주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내 약소한 선물이다· 열어보거라·”
리본을 풀고 상자를 개봉했다· 그 안에는 백금으로 된 스티치 그리고 같은 재질의 팔찌가 있었다·
팔찌에는 마법식이 새겨진 걸로 보아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리고 문득 비비의 손목을 보니 상자에 들어있는 것과 똑같은 팔찌가 장식되어 있었다·
“생명을 이어주는 아티팩트이니라· 그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아티팩트가 검게 반응하고 반대의 상황도 똑같다·”
“····”
“그대의 신변을 걱정해서 만든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나도 알아야 돕든 말든 할 거 아니더냐· 마음 같아선 강철 수갑을 채우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스티치는 무엇입니까?”
“내가 인증한 사람이라는 증표다· 공국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 그 스티치를 내밀거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다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첨언했다·
“그리고 그 스티치는 내게 직통으로 전달되는 것이니라·”
“····”
이거 점점 스티치가 많아지는데 나중가면 어디에 쓰는지 외우지도 못할 것 같다·
“가끔 안부 전하겠습니다·”
“···나도 가끔 안부 전하겠다·”
그렇게 작별은 끝났지만 그녀는 아쉬움이 남은 것처럼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때로는 아쉬움을 남긴 채로 작별하는 게 나은 경우도 있다· 그 아쉬움이 다음 만남을 앞당기게 하니까·
나는 마차 위에 올랐다· 비비는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떠나가는 우리 마차를 힘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비비가 준 백금 팔찌를 왼쪽 손목에 걸었다· 거기엔 에르제베트의 아티팩트에 이어 두 개의 팔찌가 걸려 있다· 오른쪽 손목은 칼을 휘두를 때 거슬리니 아무것도 걸고 싶지 않았다·
실베린이 내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녀랑 많이 친해졌나보구나·”
“사실 이번 방학에 다시 찾아 뵙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만 좋은 사람과 유대를 맺는 건 좋은데 너무 깊게 들어가지는 마·”
“···네?”
“공녀에게 남은 수명은 어쩌면 십 년보다 더 짧을 수도 있어· 정을 붙이면 그 뒤론 고통 뿐이야·”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좋게 지낼수도 있잖습니까·”
“여신의 피는 신체에만 부담을 주는 게 아니라 정신과 성격에도 영향을 끼쳐· 죽을 때가 다가온 비비는 네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게 될 거야· 죽는 걸 지켜보는 것만 고통이 아니란다· 사랑하던 사람이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것도 엄청난 고통이란다·”
“어떻게 변하는 거죠?”
“앞으로 비비의 얼굴을 더 볼 거라면 차라리 듣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끔찍한 이야기였다· 그 병이 사람의 인격까지 무너트린다는 말인가· 나는 다시 마차 뒤를 돌아보았다· 한참이나 멀어졌는데도 비비는 그 자리에 남아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실베린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선생님도···한때 비비 공녀의 병을 연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누구보다도 열심히 매달렸을 거야·”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요? 엘프의 기록보관소라던가 비밀스런 마법이라던가 그런 건 가능성이 없습니까?”
“엘프의 기록 보관소는 인간에겐 허락받지 못한 영역이야· 심지어 에르제베트마저도 인간과 함께한다는 이유로 엘프의 영역에서 추방되었고 이젠 두번 다시 그곳에 발을 들일 수 없어·”
“인간이 엘프랑 전쟁이라도 한 건가요?”
“아니 그보다 더 강렬하게 인간들을 증오하고 있어· 이 대륙에서 아주 드물게 만나는 엘프들은 전부 추방당한 일족의 후손이지·”
“····”
“그리고 그곳에 해답이 있을 거란 보장이 없단다· 그저 이 세상에서 가장 기록이 방대한 곳이니 약간의 가능성만 두고 있을 뿐이지·”
비비의 미래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현실을 직면하게 되니 기분이 더 가라앉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어쩌다 그 병을 연구하게 된 거죠?”
실베린이 잠잠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동생이 같은 병을 앓았거든·”
***
나는 그 뒤로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게 건넨 조언은 그녀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베린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이의 초상은 위젤 저택의 서재를 뒤지다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었다· 무슨 이유로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비비 공녀의 병과 같은 것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런저런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입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내가 괜한 곳을 들쑤신 모양인지 실베린의 기분이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창밖엔 빗자루로 막을 수 있을 정도의 가랑비가 오랜시간 내렸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 나 사이에 묘한 거리감이 생겨났다·
실베린은 나와 어디까지 동행하고 어디서 갈라지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내가 입을 열면 실베린은 곧장 혼자 있고 싶으니 마차에서 내리라는 말을 꺼낼 것 같았다· 그만큼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공국의 수도를 벗어나고 한적한 조시를 지날 즈음 실베린이 마차를 세웠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말했다·
“제자야 배 고프지 않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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