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9
실베린이 어릴 때 다니던 식당이라· 나는 대리석 식탁과 고위 귀족들이 점잖빼고 늘어져 있는 내부를 상상했다·
그런데 창밖을 보니 내가 상상했던 그런 고급스런 식당의 위치할 만한 건물을 보이지 않았다· 해가 잘 들지 않고 주변을 돌아다니는 행인들의 옷도 후줄근하다· 하층민들이나 살 법한 그런 외진 구역이었다·
“내려 이제 식사 해야지·”
실베린이 먼저 내려서는 로브를 걸쳐 비를 막았다· 눈에 띄는 긴 머리와 차림새를 다 감춘 덕에 겉모습만 봐서는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왜인지 정체를 숨기려는 것 같았다· 실베린이 마차를 먼 곳으로 보내고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그 거리를 거닐다 보니 그녀가 왜 모습을 감추려는지 알 수 있었다·
거리의 부랑자들과 건달들이 실베린과 내 모습을 유심히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로브를 푹 눌러 썼어도 그 얼굴선에서 나오는 미색에서 시선을 끄는 듯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
“····”
“그냥 걸어가면 유괴당할 수도 있어· 잡아·”
“그 정도 나이는 지났어요·”
아니 이런 말까지 해야하나· 실베린은 가끔 보면 날 어린애처럼 대하는 경향이 짙다·
“아니 지금 네 모습은 정말 납치하고 싶게 생겼어· 어서 잡아·”
하도 요구하는 탓에 하는 수 없이 손을 겹치자 그녀는 깍지를 꽉 끼고 걸어나섰다· 실베린이 워낙에 장신이고 굽이 높은 구두까지 신은 탓에 나는 졸지에 어른 손에 끌려가는 아이 꼴이 되었다·
그래도 둘 사이의 묘한 거리감은 손을 잡으면서 전부 사라졌다·
그렇게 골목골목을 지나 그나마 양지라고 할 법한 대로변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부 불빛이 환하고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는 한 주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들어서서 우리는 빈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주정뱅이들의 고성 귀를 찌른다· 먼저 식사를 하던 손님들의 차림을 보아하니 귀한 신분으로 여겨지는 이는 없었다·
식탁에는 이상한 풀 쪼가리와 톱밥이 굴러다니고 칼이 찍힌 자국이 수두룩했다· 실베린은 거친 사내들이나 올 법한 곳에 어릴 때부터 드나들었단 말인가·
“선생님이··· 공국 출신일 줄은 몰랐네요·”
“유년 시절을 공국에서 가장 많이 보내긴 했지·”
“이런 곳에서 살았던 건가요?”
“응 옛날 생각이 나네· 그거 알아? 이곳 사람들은 날 세이렌이라고 불렀어·”
“왜죠?”
“내가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귀를 막고 픽픽 쓰러졌거든·”
“···마법인가요?”
“그때는 마법을 다룰 줄 몰랐어· 그냥 내 타고난 마력량에서 나오는 마압을 사람들은 견디지 못했던 거지·”
“천상 마법사였군요 선생님은·”
귀하게 자랐을 거란 내 추측과는 달리 실베린도 제법 거친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
“맞아· 그덕에 나는 이곳에서도 멀쩡히 잘 살아남았지·”
이곳에서 동생과 어떻게 지냈냐고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기껏 풀어낸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을까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종업원이 우리 식탁에 다가오자 실베린은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이 곧바로 주문을 했다·
염소젖 치즈 절인 생선 호박 파이 사슴 고기·
서민의 식사로는 풍족하고 귀족의 식사로는 조금 부족한 차림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어서 먹어·”
“선생님도 드세요·”
그녀는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내가 먹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각각 음식을 접시에 얹고 식사를 시작했다· 실베린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맛 자체는 뭐라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어때? 괜찮지·”
“굉장히 맛있어요·”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올 가치가 있었지·”
실베린에게 추억의 장소였던 곳을 나한테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가· 참 작고 별거 아닌 일 같지만 나한텐 가슴 깊게 무언가 후벼파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족이랑 같이 여행을 떠날 때 이런 기분일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선생님·”
“응?”
“선생님은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이유가 뭔가요?”
“갑자기?”
급작스럽게 꺼낸 질문이긴 하지만 생각해온 기간은 제법 오래 된 것이기도 했다·
“네· 궁금해서요·”
“넌 선생님이 갖지 못한 걸 가지고 있으니까?”
“선생님이 갖지 못한 것도 있어요?”
원하는 건 무엇이든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인데·
실베린이 소탈하게 픽 웃는다·
“나도 인간인걸·”
나에겐 있지만 실베린에겐 없는 게 정확히 무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잠시 그 귀한 걸 선사해준 신에게 감사했다·
“선생님은 언제 떠나시나요·”
“내일 아침에 떠날거야·”
“····”
“너무 일찍 떠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쉬워·”
“또 무슨 일이 선생님의 발목을 잡은 건가요·”
“공국의 지하 감옥에서 죄수가 탈출했대· 위험 인물은 아닌데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지 그런 존재가 돌아다니거든·”
“그걸 잡으면요?”
“그럼 북부로 떠나야지·”
“제가 도울수는 없는 건가요?”
실베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아직 더 성장해야 해· 내 일은 내 몫이고 너는 너의 길을 가야지·”
짧은 기간동안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실베린에게는 아직 부족한 것일까·
***
우리는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이동했다· 낡은 건물들을 지나 우리는 작은 오솔길이 있는 숲으로 들어섰다· 해는 이미 다 기울어 달이 뜨고 별빛이 반짝였다· 실베린은 행여나 날 놓칠까봐 내 손을 꽉 붙잡았고 도깨비불 같은 것을 소환해 앞을 밝혔다·
“여길 매일 다니신 건가요·”
“응· 사람이 하도 안 다녀서 이제는 풀이 가득하네·”
우리는 실베린의 옛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엔 잔디가 무성한 마당이 딸린 통나무 집이 보였다· 사람이 없는 것 치고는 제법 관리가 잘 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마당에서 들어서자 잠시 후 집 뒤에서 플랜테라 하나가 걸어나왔다·
“···!”
“내 별장인데 누가 마음대로 점거하면 곤란하거든·”
자세히 보니 녀석은 손에 잡초를 쥐고 있었다· 플랜테라를 시켜 집을 관리하게 한 모양이다·
실베린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집 내부는 거실 하나와 방 두개가 딸려 있었다· 그녀는 별다른 주문을 외지도 않았는데도 온방의 촛불과 기름등에 불이 피어났다·
하나는 실베린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동생의 방이었다·
그녀는 태연하게 로브를 벗어서 의자에 걸어두고는 말했다·
“장작 좀 벽난로에 던져줄래?”
“네·”
마당에 있던 장작을 가져와 던지니 이것도 저절로 불이 피어올랐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니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집은 금방 훈훈해졌다·
“앉아서 있어봐·”
그녀가 어디서 주전자를 들고 와 그 안에 찻잎을 넣고 벽난로 앞에 두었다·
물이 끓는 동안에 나는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집을 살폈다· 그곳엔 삶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실베린의 몸에는 안 맞을 것 같은 작은 체크무늬 원피스가 벽에 걸려 있다· 또 한쪽 벽에는 키 성장을 체크하는 빗금 표시가 있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곧이어 실베린이 내게 찻잔을 건넸다·
“마셔·”
나는 찻잔을 받아들고 말했다·
“선생님은 동생분하고 매일 이렇게 지내신 건가요·”
“아니·”
그녀는 잠시 차를 들이키며 뜸을 들이고 말했다·
“내 동생은 멀쩡했던 날보다 아팠던 날이 더 많았어· 그래서 같이 뭘 했던 추억이 거의 없어·”
“····”
그녀가 힘앖이 웃는다·
역시 동생 이야기는 괜히 꺼낸 것 같다· 나는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선생님 저건 뭐죠?”
나는 손으로 선반 위에 있는 은색 상자를 가리켰다·
“아 저거?”
실베린이 몸을 일으켜 집고는 내 앞에 내밀었다·
“열어봐·”
상자를 여니 그 안에서 잔잔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악기 서너 개 쯤 되는 게 단데 어우러져 화음을 내고 있었다· 이 작은 것에서 어떻게 이리 다채롭고 풍요로운 소리가 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법 오르골이야·”
“이건 어떻게 얻게 된 건가요?”
“날 이터니아에 넣기 위해 심사관들이 가져온 물건이야·”
“이걸 왜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야· 온갖 마법 쇼를 봐도 시큰둥 했는데 결국 이 오르골을 보고 홀랑 넘어가 버렸지·”
“저도 홀랑 넘어갈 것 같네요·”
“조만간 이 음악을 또 듣게 될 날이 올 거야· 이건 이터니아 무도회 대표곡 ‘벨라와 아벨’이거든·”
“····”
무도회 이야기가 나오니 돌연 속이 거북해진다· 실베린이 예민한 감각으로 내 미묘한 표정변화를 눈치챘는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날 보았다·
“다음달에 첫번째 무도회를 경험하게 될 텐데 파트너는 정했어?”
무도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니 큰일이다· 나는 파트너는 커녕 춤 한 번 춘적이 없다·
“저는 춤을 좋아하지 않아요·”
실베린이 의심 가득한 시선을 거두질 않는다· 아니 대체 뭘 의심하는 건데·
“그래도 춤 정도는 배워둬야 하지 않겠어?”
“···언젠가 때가 되면 익혀두려고요·”
“에휴 언제까지 그때만 어영부영 기다릴거야? 일어나·”
“네?”
“선생님이 가르쳐줄게·”
“지금요?”
“때가 되면 익힌다면서? 지금이 딱 적기야· 선생님 아니면 누가 알려주겠니?”
아니 나는 준비가 안 됐다· 한 십 년은 있다 배울 생각이었는데·
보다못한 실베린이 내 팔을 붙잡고 강제로 일으켰다·
“선 선생님?”
그러고는 내 손에 오르골을 쥐어주고선 문 밖으로 등을 떠밀었다·
“신발 벗어!”
그렇게 소리치고는 그녀도 구두를 벗어서 옆에다 휙휙 던져버렸다·
나도 얼떨결에 신발을 벗어서 잔디 위에 맨발로 섰다·
하늘에선 달빛이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오르골 열어·”
지시에 따라 오르골을 열고 조금 떨어진 곳에다 올려두었다·
잔잔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풀벌레들이 화음을 넣는다·
나는 잔뜩 긴장한 탓에 몸이 잔뜩 굳어 버렸다· 티는 내고 싶지 않았지만 실베린의 눈썰미를 피하지는 못할 게 뻔했다·
실베린이 손 한뼘 거리만 남기고 내게 몸을 가까이 붙였다·
“선생님 허리에 손 올려·”
“···네·”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댔다· 호흡에 따라 몸이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그녀도 내 어꺠에 손을 올리곤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자라긴 했구나· 처음 봤을 때는 가슴에 딱 맞았는데·”
“···선생님이랑 눈높이가 비슷해질 날이 올까요?”
“올거야· 내가 걱정하는 건 그 날이 너무 빨리 올까 하는 거란다·”
“····”
실베린과 어꺠를 나란히 하고 싶다· 그리고 그녀에게 보탬이 되고 싶었다·
“준비 됐어?”
“네·”
“리듬에 맞춰서 처음엔 오른쪽으로 한발·”
나는 뻣뻣한 몸을 이끌고 옆으로 움직였다· 실베린은 미끄러지듯 내 움직임을 따라왔다·
“왼쪽으로 한 발·”
그렇게 지시에 따라 움직이며 춤을 추다 실베린의 발을 밟았다· 실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니 굉장히 민망했다·
“괜찮아·”
“죄송···해요·”
실베린의 고운 발에 혹여나 멍이 들까 나는 노심초사했다· 그녀는 날 달래려는 듯이 말했다·
“어느 유명한 연극에 이런 말이 있어· 스텝이 엉켜야 그게 춤이 된다고·”
“···검술이랑은 정반대네요·”
“그치 난 그게 춤의 매력이라고 생각해·”
시작할 때만 해도 실베린의 눈을 못 마주쳤는데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이 되었고 눈을 마주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어졌다·
춤도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음악에 맞게 흐름을 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은은한 달빛이 실베린의 얼굴을 비춘다· 옅은 미소· 그리고 그녀의 볼엔 붉게 홍조가 깃들어 있었다·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밤이었다·
***
아침이 밝고 우리는 다시 움직였다·
그렇게 이별의 시간은 쏜살같이 찾아왔다·
실베린은 내게 마차를 내주고 관청에서 말을 얻어 타기로 했다·
우리는 갈라지기로 한 지점에서 마차를 세우고 나왔다·
실베린이 나와 마주보고 서서 두 팔을 벌렸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 안았다· 그렇게 애틋하게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 또 볼 수 있을까요?”
“방학이 되면 다시 돌아올게·”
“알았어요·”
“근데··· 이제 뽀뽀도 해줄 수 있지 않아?”
“···네?”
실베린이 내 허리를 꽉 조인다· 몸을 움직여도 영 느슨해지질 않는다· 숨통이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날 내려다 보며 말했다·
“뽀뽀·”
“저···선생님····”
나는 곤란하다는 기색을 내비치며 그녀를 다그쳤다·
그러자 실베린이 조금 싸늘해진 말투로 제촉했다·
“조금 서운해지려 하는데·”
내가 시선을 피하자 실베린은 눈이 돌아간 쪽으로 목을 기울였다· 피할 길이 없었다·
“어서·”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스승과 제자의 친밀감 표현이라고 하기엔 조금 넘치고 그 이상이라 하기엔 부족하다· 애매한 지점에 걸쳐있는 행위다· 이런다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틀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기게 되는 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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