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0
“뽀뽀·”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로 인해서 실베린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마음 한구석에 증식한다· 만약 앞으로의 관계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하겠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최대한 조심하고 싶었다·
“뽀뽀!”
실베린은 내 의사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허리를 조인 팔뚝의 힘이 더욱 강해진다· 이건 내가 저항해서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보다 힘이 더 세다·
“고개 살짝 돌려주세요·”
실베린이 싱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는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했다· 입술에다 갖다 대라는 거 아닌가· 이거 정말 큰일이다·
“선생님 그건····”
“어서·”
그녀는 절대 고집을 꺾을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그런 짓을 하고서도 온전히 스승과 제자로 남을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냥 친밀감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
실베린의 몸이 뜨겁다· 연이어 공기가 달궈지고 땅에서 점점 열기가 올라온다· 마법이다· 화가 난 걸까? 표정을 보면 아니다· 참 해맑다·
이는 마치 자기를 실망시키면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무언의 메시지처럼 다가왔다·
실베린이 날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내려다 보며 붉은색 입술을 살짝 모았다·
나는 결국 마음을 잡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실베린의 입술에 천천히 가져다 댔다·
쪽·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리에 있는 혈관에 모든 피가 쏠린 것처럼 어지러웠다·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 번 더·”
내 모습을 보는 실베린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
“농담이야·”
그녀는 날 꼭 안은 채로 뒤통수를 쓸었다·
“편지 자주 해·”
“이제는 잊지 않을게요·”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실베린과 작별했다· 그녀는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지평선으로 멀어졌다·
그녀가 떠나고 나니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기분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걱정도 들었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항상 위험한 일을 찾아가니까·
최대한 빠르게 달렸고 지친 말을 바꿔가면서 움직였지만 이터니아로 돌아가는 데에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고 나는 이터니아로 복귀했다·
***
“환수를 퇴치한 부분에 관해선 공국 측에서 공표한 게 없다고?”
“네· 그 부분에선 함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정말 고생 많았어· 환수에 자세한 보고는 내일 마저 하고 우선 들어가서쉬어·”
“네 그리고 제가 부탁한 건····”
“세실 말이야? 걔는 일단 조치 취했으니까 크게 걱정하지 마· 혹시 그걸로 문제 생기면 나한테 보고하고·”
동시에 사탕이가 내가 자리를 비울 때에 맞춰 부재중이었다 내 복귀 타이밍에 맞춰 다시 등장한다면 여러모로 의심이 될만 했고 칸디넬라 교수에게 이 부분에 대해서 조치를 취해달라 일전에 부탁했었다·
대강 잘 수습이 된 듯한 모양인데 대체 어떻게 조치를 취했길래 의심을 푼 거지? 혹시 기억을 건드리기라도 한 건가·
칸디넬라 교수에게 복귀 수속을 마치고 교수실에서 나왔다·
어찌저찌 일이 꼬여 거의 한달 가까이 수업의 공백이 생긴 상황이었다· 호위 임무에선 공국 측의 요청으로 최고점을 얻게 되었다· 수업 불참으로 인한 불이익은 메꾸고도 남았지만 그 기간이 길었던지라 어쩐지 나는 외부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학기 초의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전부 이터니아의 분위기에 더 깊게 녹아든 것만 같았다·
수속을 마치고 오래 간만에 미궁의 가시정원 기숙사의 문 앞에 섰다· 트리샤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으려나·
외부에서 봤을 때 트리샤의 방 창문에는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여기 있는 모양이었다·
노크를 하려다 손을 내렸다· 내 기숙사이기도 하니까 노크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홀에 덩그러니 서서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트리샤?”
잠들었나 싶어 다시 한 번 불렀다·
“트리샤 있어?”
갑자기 2층에서 우탕탕하고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쿵쿵 소음과 함께 트리샤가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난간에 떨어질 것처럼 몸을 기대고 소리쳤다·
“왜 이제와!!!”
“그동안 엄청 바빴다·”
“거짓말 수업 빠지려고 농땡이 친 거겠지!!”
“그렇게 보다니 섭섭한데·”
이래뵈도 난 거의 죽다 살아난 몸이다·
그러고는 다시 후다닥 튀어서 계단을 내려왔다· 얼마나 급했는지 그녀는 양갈래 머리에서 한쪽은 묶다 말았고 맨발에 잠옷차림이었다·
“진짜 뭐하다 이제 온 거야!”
트리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내가 온 게 그렇게 좋은 건가 싶었는데 잘 보니 정강이에서 피가 몽글몽글 솟아나고 있었다· 좀 전에 요란한 소리의 정체가 바로 이것인 모양이다·
“너 정강이 괜찮아?”
“안 아파!”
“····”
트리샤가 내 짐가방을 뺏고는 냅다 펼쳐서 뒤적거렸다·
“뭐하는 거야?”
그녀의 기행을 나는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먹을걸 찾나· 간단한 옷가지와 장비 뿐인데 뭘 찾는 걸까· 트리샤가 한참을 뒤적이다가 말했다·
“···없어·”
“뭐가?”
“방패! 네가 공녀한테서 그걸 받았다고 소문났었어· 역시 헛소문이 맞나보네!”
“내가 방패 받은 게 너한테 중요해?”
“학교에선 너에 대한 소문 때문에 한동안 떠들썩했어! 네가 공녀랑 약혼한다느니 뭐니 이상한 헛소문도 돌았고! 얼마나 신경쓰였는지 알아? 내가 수습하느라 엄청 고생했어!”
“···백금 방패는 무거워서 문 앞에 두고 왔는데·”
트리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땡그래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거짓말!”
“가서 확인해 봐·”
트리샤가 벌떡 일어나서 문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깜짝 놀라서 입을 가로막고 비명을 질렀다·
“꺅!”
“···?”
트리샤가 충격을 받은 것처럼 그 상태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아니 그게 그렇게까지 경악할 일인가·
“왜 그렇게까지 충격을 먹어?”
“그럼··· 공녀랑 결혼하는 거야?”
“아니 이건 그거랑은 상관없어· 약혼은 그냥 헛소문이야·”
“그럼 공녀랑은 무슨 사이야!”
대체 소문이 얼마나 과장되었길래 트리샤마저 이렇게 나오는 걸까·
“···친해지긴 했지· 방학 때 한 번 들르기로 했고·”
“싫어· 방학 때는 우리 집에 가기로 했잖아!”
“맞아 가는 김에 너도 데리고 갈 거야·”
트리샤가 뾰루퉁하게 날 올려다 보며 말했다·
“···대체 공녀랑 얼마나 친해졌어?”
“····”
“나보다 친해? 내 약속보다 우선이야?”
트리샤가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뭐라고 답해줘야 하나· 공녀랑은 극적인 일을 겪은 덕에 유대감이 형성되긴 했지만··· 아직은 트리샤와의 관계만큼 친밀도를 쌓지는 못했다·
“그건····”
“그게 고민까지 할 정도야?”
“그야····”
내가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자 그녀가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당연히 나랑 더 친하지!”
“···그렇지· 너랑 더 친해·”
같이 다니는 게 일정을 단축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생각한 건데 지금 보니 트리샤랑 비비 공녀를 만나게 하려는 좋은 판단이 아니다·
***
사실 이터니아에 복귀해도 내 마음은 비비 공녀에게 쏠려 있었다· 복귀하는 동안에도 나는 비비 공녀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히는 공녀의 병에 대해·
그래서 아침이 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도서관에 가는 것이었다· 여신의 피가 내리는 저주란 것에 대해서 조금의 단서라도 얻기 위해서였다·
절반은 호기심 나머지 절반은 공녀에 대한 동정심이 기인했다·
복귀 후의 어수선한 첫 수업을 듣고 다시 도서관에 향했다·
엘프들의 기록보관소에 관한 자료도 찾아봤지만 제대로 된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점심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내가 서 있는 제 3서고의 책장 너머로 소리가 들렸다·
3서고는 비인기 분야인 연금술 서적 구역이라 드나드는 학생이 여태껏 나 하나말고는 없었다· 이 넓은 구역에 있는 사람은 나 그리고 이름모를 사람 이렇게 둘 뿐이었다·
누가 있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자료 조사를 진행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뒤적거리던 차에 책을 뽑았다가 그 건너편에 있던 사람과 책장 틈으로 눈이 마주쳤다·
“···?”
얇은 틈 사이로한쪽 눈동자만 마주쳤을 뿐인데 화들짝 놀라 빠르게 걸으며 자리를 벗어나려 들었다·
이목구비의 일부만을 마주쳤지만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기억하고 있었다·
“···루나?”
그러자 멀어지던 발소리가 뚝 멈췄다·
곧이어 그녀는 조금 전에 있던 내 책장 맞은편으로 돌아왔다·
나는 책을 두 권 더 뽑아 얼굴을 확인할 수 있게 틈을 열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비쳤다·
역시 루나가 맞았다·
한데 그녀는 내 눈을 못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데서 보다니 기막힌 우연이네·”
“맞아··· 엄청난··· 우연····”
“연금술 책 찾으러 온 거야?”
“응···· 연금술 좋아해·”
그런데 남자 기피증이 다시 도진걸까· 그녀는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하기야 나랑도 한 달이 넘게 접촉을 안 했으니 다시 불편해졌을 수도 있었다·
“이야기 해도 괜찮아?”
“응····”
“전에 부적 고마웠어·”
“건강하게 돌아와서 다행이야·”
“잠깐 근처에 사람 없지?”
루나의 남자 기피는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만한 것이고 친한 남자는 그나마 사탕이 하나 뿐이라 알려져 있는데 나랑 태연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충분히 의심을 살만 했기에 조심해야 했다·
“응····”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마침 잘 됐다· 전에 식사 자리에 초대하기로 했던거 기억나?”
순환계 수업을 마치면서 루나를 저택에 불러서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루나는 기억을 못했다·
“그랬···었나?”
반응을 보니 루나한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남자가 사는 집에는 가기 싫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일수도 있었다· 뭐 그렇다면 약속은 그냥 없던 걸로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야 기억 안나면 말고· 그냥 없던 걸로 하고····”
그러자 루나가 갑자기 다급하게 말했다·
“기억났어·”
“···?”
“저녁 식사에 초대해주기로 했었어···· 정확히 기억나·”
“···그래? 그럼 이번주 휴일에 초대할까 하는데· 어때?”
루나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뜸을 들이다 말했다·
“···좋아·”
“루나 너는 뭐 좋아해? 요리는 별로 안 좋아하지?”
순환계 수업에 동행했던 내 기억으론 루나는 요리에는 별다른 재주가 없었다· 고기를 혼자 구우려다 전부 숯더미로 만들기도 했었지·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해· 나··· 요리 잘 해· 나도 도와줄게·”
“그래 정확한 일정은 다음에 봤을 때···· 생각해보니 따로 만날만한 장소가 몇 없네·”
가면을 쓰지 않은 상태로 지내는 동안에는 루나와 접촉할 만한 방법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고 지내야 했다·
“···여기도 나쁘지 않아·”
“그럼 앞으로 3서고 정확히 이 위치에서 만나자· 나도 있어보니까 조용히 만나기는 좋은 것 같네·”
나는 내 앞에 꽂힌 책 한권을 집어들었다·
“나는 ‘가정 불화를 해결하는 연금술’책 앞에서 루나 너는?”
그녀도 자기 앞에 꽂힌 책 하나를 뽑아들고는 말했다·
“살인 포션·”
“그래 내일 이 시각 이 자리에서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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