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1
그날 밤 오랜만에 트리샤와 저녁 식사를 했다· 그녀는 나 없는 동안 뭘 먹고 지낸 것인지 조촐한 상차림에도 반쯤 눈물을 글썽이며 포크를 쉴새 없이 움직였다·
“너 그동안 굶었어?”
“아니!”
“그런데 왜 이리 안쓰럽게 먹어?”
“내가 요리하면 이 맛이 안 나· 그리고 매일 저녁밥 혼자 먹는 것도 너무 싫었어·”
트리샤는 한 달 가까이 이 기숙사에 혼자 지내야만 했다· 그녀의 성격을 감안하면 외로움을 많이 탔을 게 분명했다·
“요리 책들 많잖아· 그거 보고 하면 되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정말 그대로 요리 했는데 맛이 없어· 요리의 요정이 날 질투하나봐·”
그대로 했는데 맛이 없을 수가 있나· 손재주를 탓해야지· 나도 책보고 요리하는 건데·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눈시울이 그렁그렁한 건 어찌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요리하는 법 내가 알려줄까?”
“···나도 혼자서 잘 할 수 있어·”
“내가 또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되면 또 그렇게 지낼 거야?”
“···아니·”
“그럼 배워서 써먹어야지·”
“네가 안 떠나면 되잖아· 내 옆에 매미처럼 꼭 붙어서 매일 스튜 끓여주면 되는데·”
“같이 있을 때야 물론 해주겠지만 항상 네 식모 노릇을 해 줄 만큼 느긋하지 않아·”
트리샤의 한쪽 볼이 심술이 난 듯 볼록 나왔다·
“왜 그렇게 진지해· 그냥 말이라도 그렇다고 해주면 얼마나 좋아!”
“지킬 수 있는 약속이 아니니까· 이제 휴강일에도 또 하루 비워야 되는데·”
“그 날은 갑자기 왜? 뭐 하는데?”
“약속이 있어서 교수님 저택에 돌아가서 하루 쉴 생각이야·”
“뭐야· 그럼 나도 갈래!”
나야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이건 엄밀히 루나만 초대하는 자리이니 내가 아닌 루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문제다·
“한 번 물어는 볼게·”
“누구 허락이 필요한데? 교수님은 엄청 멀리 있는데 꼭 허락을 받아야 돼?”
“응 루나한테 식사 대접하기로 했거든· 원래 순환계 수업이 끝난 후에 하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미뤄졌어·”
“루나? 왜 나는 초대 안 해? 나도 같이 갈래!”
“루나한테는 순환계 수업에서 도움받은 게 많으니까· 그때 이후로 같이 제대로 대화 나눠본 것도 손에 꼽을 정도야· 그리고 너는 내가 오늘도 식사 대접했잖아· 앞으로도 쭉 그럴거고·”
“근데 그··· 아니···· ”
트리샤도 달리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그 이상으로 함께하는 건 스스로도 욕심이란 걸 알겠지·
외로움을 많이 타니 졸졸 따라붙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매사 함께할 수는 없었다·
트리샤가 의기소침해진 듯이 힘없이 포크질을 했다· 눈꼬리가 쳐져서 힘없이 깨작거리는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약해진다·
루나랑 트리샤가 친해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거나 우리의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동기이지 않은가·
루나한테 물어는 봐야겠지·
***
수업을 마치고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향해서 공녀의 병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데에 전념했다· 꽤나 진지하게 시간을 쏟았는데 정말 이렇다할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교수들을 찾아가 물어봐야하나 생각하던 차에 루나가 약속했던 그 장소로 돌아왔다·
그 뒤로 잠시 조사는 멈추고 루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트리샤에게 묻기엔 조금 못미더워서 루나에게 내가 없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고 앞으로의 일정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곧 대련 평가를 앞두고 있어서 다들 바빠· 특히 선배들은 1학년을 상대로 전력을 다 해서 본보기를 보여주려고 열심히 수련하고 있어·”
“대련 평가···?”
책장 너머로 루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응· 전학년이 섞여서 추첨으로 대련하는 거야· 마법부는 마법부끼리··· 전투부는 전투부끼리··· 일학년이 사학년이랑 붙을 수도 있고··· 그래서 다들 진지하게 임하고 있어·”
“음···· 캠퍼스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싶었는데 그것 때문인가?”
뭐랄까 다들 눈빛이 기대에 가득 차 있다고 해야하나· 큰 축제를 앞둔 사람처럼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건방진 1학년들을 혼내주려고 들떠 있는 건가?
루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없이 웃고는 말했다·
“그건··· 이터니아 무도회 때문일거야·”
“무도회는 아직 한 달이나 남았잖아?”
“응··· 한 달 전부터 준비하는 게 일반적이래····”
“루나 넌 준비 했어?”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 평가는··· 자신 있어·”
루나야 뭐 시온마저도 꼼짝 못하게 할 정도로 실력이 상당했었다· 더군다나 마법부 수석이니 오히려 선배들한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까 싶다·
그보다 내가 물어본 건 대련 평가가 아닌데·
“무도회는?”
루나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늘어진 장서들 틈으로 보이던 루나의 조막만한 얼굴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고는 조금 더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 할 거야·”
“····”
“데미안··· 너는?”
“글쎄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어· 다른 애들은 어떻게 준비하나 알고 싶긴 한데·”
루나가 책장 틈으로 밝아진 얼굴을 내보였다
“저녁 식사는··· 언제 할거야?”
“마침 그 이야기 하려고 그랬는데··· 손님 한 명을 더 데려와도 괜찮을까?”
“···누···구?”
“트리샤라고 들어봤지? 그 애도 우리랑 같이 놀고 싶어해·”
“····”
루나는 조용히 눈을 깜빡일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눈으로 날 가만히 바라본다· 무슨 생각인 건지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뭐랄까 사람말을 못 알아듣는 고양이에게 말하는 기분이다·
내 직감상 이건 분명 긍정적인 감정은 아닐 것 같았다·
루나가 천천히 입을 연다· 그 대답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좋아·”
“괜찮겠어? 거부한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고 트리샤한테 네가 거절했다고 알리지도 않을 거야·”
루나가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데려와도 좋아····”
아무런 표현도 없었지만 분위기를 보면 루나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막연한 추측이긴 하지만 기쁨의 감정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러고 루나는 앞에 있던 책 한 권을 뽑았다·
“그럼 이틀 뒤에 수업을 전부 마치고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어· 데리러 올게·”
“응·”
루나는 짧게 대화를 끝내고 몸을 돌려 서고를 떠났다·
나도 이제 그녀와 무관한 사람이 되어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도서관 복도를 지나는 길에 루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책을 한 권 꼭 껴안고 사서와 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책은 위험하다고 알려진 포션 제조식이 저술된 것이라 연금부 4학년이 아니면 대여할 수 없어요·”
루나가 안고 있는 책의 이름은 ‘살인 포션’이었다· 홧김에 뽑아서 들고 간 게 그거였나·
자세히 보니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사서와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빌려갈래요···!”
“말씀 드렸지만 그 책은 연금부 학생이 아니면····”
그 모습을 보니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진짜 죽이려고 그걸 빌린 건 아니겠지· 루나의 기분이 어떨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트리샤 이야기는···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
수업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로 돌아갔을 무렵에 실베린의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트리샤와 루나가 함께하는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루나와 ‘살인 포션’ 책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루나가 요리에 독을 탄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거다· 루나는 연금술 제조식들을 해독할 줄도 모를 테니까·
마차가 어느덧 약속했던 장소인 이터니아 정문에 가까워졌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금발머리가 보였다· 루나가 나무로 만든 바구니를 들고 인적이 없는 구석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와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 트리샤도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한숨이 푹 나왔다·
둘은 분명 같은 연극부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거리를 벌려야 할 정도로 친분이 없는 모양이었다·
마차가 멈춰서고 루나가 먼저 마차 안에 올라탔다·
“어서와·”
“···응·”
루나는 별다른 말없이 조용히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뒤이어 트리샤도 팔을 흔들며 마차로 달려왔다·
“기다려!”
트리샤는 마차 문에 서서 나와 나란히 앉아 있는 루나를 흘끗 보고는 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내 맞은편에 올라와 앉았다·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하지·
다행히도 트리샤가 평소처럼 실없는 소리를 했다·
“나 기다리면서 엄청 큰 까마귀 봤다!”
“그래 대단하네·”
루나도 질세라 내게 말을 건넸다·
“여기 바구니에 재료들 챙겨 왔어····”
루나가 든 바구니는 뭐가 잔뜩 들었는지 제법 크고 묵직해 보였다·
“비용이 제법 들었을텐데 나한테 따로 부탁하지 그랬어·”
루나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잘하는 요리 해주려고···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편하게 대접하려고 부른 건데·”
“나도 주방에서 널 도울게····”
루나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슬며시 올라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트리샤의 표정이 더욱 꿍하게 변했다·
“나도 요리 할래!”
“안 돼· 주방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힘들어· 그리고 넌 요리 못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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