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2
역시 트리샤까지 부르는 건 무리였다·
트리샤의 꿍한 표정이 더욱 진해진다· 여기서 더 자극했다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연극부는 단합같은 것도 없나· 미술부 같이 홀로 씨름하는 게 아니라 서로 기획하고 협력도 하고 그러면서 친해지는 거 아니었나·
루나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입꼬리를 수줍게 올렸다· 그녀가 웃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겠지만 이 삭막한 분위기 속에선 그럴 겨를이 없었다·
“흥 마음대로 해·”
트리샤는 불만스러운 한마디를 내뱉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불만스런 얼굴로 있다가 양말을 휙휙 벗어서 옆자리에 던졌다· 트리샤는 자기 몸에 붙은 천쪼가리들은 불편해하고 최대한 안 입으려 드는 습성이 있었다· 이것도 마차에서 늘상 하는 평소 습관이었기에 적응한지 오래다·
마차는 잠잠히 흘러간다· 트리샤가 가만있질 못하고 맨발을 앞뒤로 흔든다· 그러다 내 발등을 발받침이라도 되는 것처럼 슬그머니 올려다 두었다·
이것도 마차에 탈 때에 늘상 하던 짓이었지만 루나가 옆에 있으니 조금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엄연히 손님과 한 공간을 공유하는 상황 아니던가·
트리샤가 조금씩 내 눈치를 보더니 이윽고 보란듯이 한쪽 발을 쭉 뻗어 내 허벅지 위에 올린다·
루나가 손을 무릎에 올리고 다소곳이 앉아서 트리샤의 발을 벌레보듯이 바라보았다· 트리샤에겐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지만 루나에겐 남녀간의 신체 접촉이 그리 익숙한 모습은 아닐 거다·
“이 발은 뭐냐·”
“내 다리 이쁘지!”
“그래 알았으니까 내려·”
“나 오늘 엄청 걸어서 다리 아파· 잠깐만 올려둘래!”
루나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편하게 몸을 접촉하고 실없는 소리를 뱉는 의기양양한 모습이 루나에게는 문화적 충격을 안겨준 듯했다·
이런 거 보고 배우는 건 아니겠지·
***
마차가 실베린의 저택 정문 앞에서 정차한다· 우리는 차례대로 하차해 짐을 챙겼다·
곧이어 안뜰에서 누군가가 치맛바람을 붙잡고 종종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온다·
메이드 리리아였다·
“데미안님!”
그녀는 팔을 크게 흔들며 내게 반가움을 표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참 반가운 얼굴이다·
달려오는 그녀를 보고는 내 뒤에 있던 트리샤가 조용히 콧바람을 뿜었다·
“흥·”
그러고보니 이 둘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구나·
리리아가 나와 몸이 붙을 듯이 가까이 서서 올려다 보았다·
“데미안 님 공국에서 큰일을 겪으셨다는 소문을 듣고 엄청 걱정했어요!”
나는 팔을 쓱 들었다 내리며 멀쩡하다는 몸짓을 취하고는 말했다·
“보다시피 괜찮아요·”
리리아의 얼굴을 보니 묘하게 미안해진다· 그녀에게 친하게 지내는 또래라고는 나 하나 밖에 없을 텐데 내가 이리저리 싸돌아 다니느라 뜸해졌으니 말이다·
이 삭막한 성에서 얼마나 심심했을까· 리리아는 슬퍼도 다른 사람에게는 크게 내색하는 않는 성격이라 세심하게 지켜봐야 했다·
곧이어 내 뒤에 따라붙은 루나를 보고 리리아가 놀란 듯이 소리쳤다·
“루나 님?!”
그러자 루나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 둘이 서로 안면이 있는 걸 넘어 친분이 남아 있다니 의아한 모습이었다·
“둘이 알고 있었어요?”
“네! 루나 님은 실베린 님을 만나뵈러 찾아오셨을 때 친해졌어요!”
루나도 리리아의 말을 거들었다·
“리리아 한테는··· 많은 도움을 받았어·”
리리아는 역시나 트리샤한테는 별다른 반가움을 표하지 않았다· 그저 사무적인 말투로 한마디를 남겼을 뿐이다·
“데미안 님 친구분도 또 오셨네요·”
“응 제일 친한 친구라서 앞으로도 자주 올 거야·”
또 둘이 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루나 트리샤 리리아 이 셋 다 어리게 느껴지긴 하지만 루나가 그나마 성숙한 편이고 트리샤와 리리아는 아직 앳된 기운이 조금 강하다·
그래서 그런지 둘이 묘한 경쟁 의식 같은 게 생기는 모양이다· 리리아는 그렇다 쳐도 트리샤는 어깨에 짊어진 게 다른데 언제쯤 어른이 될 수 있으려나·
***
나는 냄비를 젓고 루나는 나를 등지고 재료를 손질했다·
“와이번 프루트 좀 가져다 줄래?”
“···응·”
기척이 없어서 감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너무 조용해서 돌아보니 루나가 요청한 물건을 앞에 내밀고 가만히 서 있었다·
옆에 와서 준다거나 아니면 내 등을 툭툭 쳐서 알린다거나 그런 방식은 안 내키나· 내가 돌아보지 않았으면 해가 뜰 때까지 그러고 서 있었을 것 같다·
“고마워·”
부탁한 재료를 건네받으며 손가락 끝이 살짝 닿았다· 그러나 루나는 깜짝 놀라서 손을 뒤로 뺐다·
“···더 필요한 건 없어?”
“응 충분해· 루나 넌 뭐 만들려고?”
“베도니아 전통 고기 스튜·”
“그런 것도 만들 줄 알았어?”
“응····”
루나가 도마에 재료를 올리고 칼로 썰기 시작했다· 물이 지글지글 끓고 리듬감 있는 도마 소리를 들으니 꼭 평범한 가정집을 꾸린 기분이었다·
“몰래 따로 준비한 건 없어?”
“응····”
“살인 포션이라던가 그런 거 말이야·”
“···!”
칼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그냥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루나가 당황한 듯이 얼어 붙었다·
“그··· 내가 빌린 건 어떻게 알았어···?”
“도서관 나가면서 봤어·”
슬쩍 뒤를 돌아보니 루나가 손을 이상하게 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중이었다· 깜짝 놀라서 칼에 손을 벤 모양이었다·
“이런 잠깐만 기다려·”
나는 주방에서 응급 약품들을 담아둔 바구니를 꺼냈다· 포션 양조나 재료 손질시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구비해 놓은 게 있었다·
나는 루나의 손을 덮석 잡고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뼈까지 닿은 것처럼 상처가 깊었다· 통증이 상당할 텐데 루나는 소리 한 번 내질 않았다·
“가만히 있어· 지혈해야 하니까·”
나는 루나의 손을 입에 넣고 서둘러 지혈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순간 경직된 게 느껴졌다· 뭐 어쩌겠나 피가 철철 흘러서 연못이 생길 지경이니 어쩔 수 없다·
일 분여간 침묵이 이어졌다· 피가 거의 안 날 즈음에 천천히 입을 뗐다·
그리고 입구에 서 있던 트리샤와 눈이 마주쳤다·
“···?”
언제부터 이렇게 소리도 없이 와서 지켜본 건지 알 수 없었다· 쟤는 무슨 용건이 있어서 온 거야?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심술이 가득 돋아난 얼굴로 우릴 노려보았다·
“···흥·”
그러고는 휙 돌아서서 떠나갔다·
잘못한 건 루나가 요리하다 손을 베었다는 것 뿐인데 왜 이렇게 사람을 죄인처럼 노려볼까·
나는 루나의 손을 마저 소독하고 포션을 도포했다· 그녀는 남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머리카락으로 나머지 얼굴을 가린 채로 돌이 되어 있었다·
***
식탁의 분위기는 삭막했다· 잘 차려진 음식에 김이 모락모락나는데 아무도 손 댈 생각을 안 한다· 이런 걸 예상하지는 못했는데· 말 한마디 없이 고요했다·
트리샤는 여전히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팔짱을 끼고 혼자 꿍하게 볼을 부풀렸고 루나는 아직도 낯선 접촉이 적응이 안됐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계속 꼼지락거렸다·
나는 우선 트리샤의 접시를 들고 음식을 담아 건넸다·
“자· 율리시아 공국 특제 소스가 들어간 양고기야· 이런 거 좋아하잖아·”
트리샤가 시무룩한 얼굴로 답했다·
“이런 거 좋아한다고 한 적 없어·”
“너 양고기를 제일 잘 먹으니까 한 말이야·”
“····”
나는 루나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손가락은 이제 안 아파?”
“···으응·”
내가 이 둘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도록 주선한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미궁 속 도서관의 존재 이유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엘라 교수나 실베린에게 물어봐도 그들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아직은 이르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답변을 했을 뿐이다·
“루나는 필라이온 도서관에서 여전히 지내는 거야?”
이터니아에는 도서관이 둘 있다· 캠퍼스에 자리잡은 중앙 도서관과 미궁에서 허락받은 이들만 드나들 수 있는 필라이온 도서관이 있었다·
중앙 도서관에선 아무리 뒤져도 공녀나 엘프들의 기록보관소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귀한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필요했다·
루나는 고개를 살짝 들고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은 얼굴로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루나 너는 그 도서관에 어떤 서적을 보관하는지 알아?”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도 우리랑 비슷하게 아직 제공받은 정보가 없구나·”
“응 나는 열람 권한이 없어··· 그 도서관의 용도가 궁금한 거야?”
“응·”
“···필라이온 도서관에서 이상한 걸 본 적은 있어·”
“뭔데?”
“보름쯤 전에 북부로 파견되었던 사서들이 이터니아로 복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그래? 뭘 하고 왔길래?”
“스무 명을 파견했는데 열 여섯 명만 살아 돌아왔대· 그리고 그 사서들이 희생해서 얻은 건··· 책이었어·”
목숨을 걸고 파견나가서 공수한 게 고작 책이라고?
“음··· 이상하네· 타국에서 책을 공수해오는 건가?”
루나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어· 사서들이 가져온 책을 전부 평범한 게 아니었어· 대륙에 있는 언어도 아니었고· 북부 부족민 언어도 아니었어· 분명··· 뭔가 다른 거였어·”
“멀리서 공수하는 건데 잡다한 책은 아니겠지·”
“난 그 책들에서 마력을 느꼈어· 고대 마법서가 아니면 마력이 그렇게 담길 수가 없어·”
확실히 평범한 책은 아닌 모양이다·
트리샤도 어느 틈에 양고기를 한입 물고는 루나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다·
그러다 조용해지자 슬쩍 입을 열었다·
“나도 본 적 있는 것 같아!”
“트리샤 너도?”
“응· 입학식 한참 전에 나도 한 번 미궁 도서관에 들렀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아티팩트를 둘둘 두른 사람들이 책을 잔뜩 들고 왔었어·”
내부적으로 깊게 관여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걸 보면 기밀로 여기는 사항은 아닌 듯했다· 이는 즉 적절한 시기가 되면 우리도 자연히 알게 될 거란 말인데·
마스터스 클래스와도 깊게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선 비비의 병에 관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을까·
***
늦은 저녁 식사가 끝난 뒤 트리샤는 가장 먼저 샤워를 끝내고 나왔다·
트리샤는 속옷 한 장과 데미안의 긴 셔츠를 걸친 채로 계단을 올라나섰다· 원형 계단은 창문이 작아 달빛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혹여나 들킬까봐 촛불도 들지 않고 오로지 손의 감각에 의지해 벽을 짚으며 움직였다·
트리샤의 목적은 단 하나· 데미안이 다 씻고 오기 전에 먼저 방을 점거하는 거였다·
계단을 다 오르고 데미안의 방까지 이어지는 복도에 서서 주변을 경계했다· 안전한 걸 확인하고는 숨죽여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큰 창이 나 있는 덕에 눈이 금방 어둠에 적응했다·
그렇게 나아가다 멀찍이 데미안의 문 앞에 무언가 있음을 확인하고는 잠시 당황했다·
점점 가까워지며 형체가 또렷해졌다· 늑대 정령이 문지기처럼 가만 앉아서 버티고 있었다·
이를 본 트리샤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뱉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