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3
트리샤가 손을 휙휙 내저었다·
“저리 가! 내가 방 다 뎁혀놨단 말이야·”
별다른 공격성은 보이자 않는다· 늑대 정령은 혀를 내밀고 헥헥거릴 뿐이었다·
트리샤가 보다 못한 나머지 손으로 낑낑대며 정령을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냅다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휴·”
트리샤는 몸을 툭툭 털고 방 안을 살폈다· 데미안은 목욕에 열중하는 중이라 비어 있었다· 벽난로에 타오르는 장작불이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데미안이 머물던 공간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을 안정시키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문 밖에 있는 루나의 늑대 정령이 거슬렸지만 루나가 직접 이 방 안에 들어올 만한 배짱은 없을 것 같았다· 트리샤 또한 루나의 특성을 잘 알고 있았다·
“흥·”
트리샤는 부지깽이를 들고 손빨래한 속옷을 걸었다· 그리고는 모닥불 앞에 앉아서는 휘휘 저어댔다· 늘 그랬던 것처럼·
“진짜 짜증나·”
***
초승달이 뜬 새벽·
트리샤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내 침대를 선점하고 먼저 잠이 들었고 나는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나는 실베린과 스티치 그리고 비비의 스티치도 챙기고 정원으로 나왔다·
구름 한 점 없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밤이었다·
나는 실베린의 스티치에 편지를 물려 보내고 그 다음 비비에게 보내는 편지를 물렸다·
백금 스티치가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선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러나저러나 비비의 병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얼룩처럼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일도 아니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마음에 걸리는 걸까·
생에 별다른 미련 없이 행동하는 걸 봐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편지가 잘 날아가는 걸 확인하고는 천천히 정원수를 가로지르며 산책에 나섰다·
그러던 중 내 맞은 편에서 간 머리를 한 어느 여자의 인영이 보였다· 그 인영은 서서히 나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달빛으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루나 안 자고 산책 중이었어?”
“···응· 엄청난 우연···이네·”
루나와는 우연한 만남이 잦다· 이 시각 이 넓은 곳에서 또 마주칠 줄은·
지금 보니 루나는 자다 일어난 듯한 부스스한 몰골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자다 일어나서 움직이게 한 것일까·
“안 피곤해?”
그녀는 냐 시선을 슬쩍 피하곤 말했다·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그리고 지금 공기가 딱 좋아····”
“그럼··· 같이 산책할까?”
루나가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응·”
그녀는 방향을 틀어서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란히 걸었다· 내가 먼저 질문을 건넸다·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내일 대련 추첨이 있어서··· 생각하고 있었어·”
“너랑 붙게 되는 상대는 걱정 때문에 잠도 설칠텐데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 거야?”
“응···· 성적을 유지해야 하고 가문의 기대도 받고 있으니까·”
맞다·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지 루나가 귀한 가문 귀한 태생 아가씨라는 걸 잊고 있었다·
“특별히 원하는 상대라도 있어?”
“그냥··· 공격적이지 않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루나는 선배들도 무서워하는 시온을 농락한 실력자다· 내가 볼 땐 딱히 걱정할 건 없어 보였다· 내가 걱정하는 건 전투 능력이 많이 부족한 트리샤다· 괜히 이상한 놈이랑 맞붙어서 고생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추첨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
“모두 모여서 아티팩트로 추첨할 거야····”
“음··· 그러면 내일 같이··· 아니다·”
얼굴을 드러낸 상태에선 루나와 같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잠시 아쉬움에 잠긴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그럼··· 우리 도서관에서 같이 확인하자·”
***
이터니아의 중앙 학생 광장에는 못보던 구조물이 놓여 있었다·
분수대처럼 생긴 동그랗고 하얀 구조물이었다· 거기엔 내부가 비치지 않는 허연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듣기로는 저 안에서 이름표가 적힌 상자를 뽑는다고 했다· 누가 짝으로 지어질지는 마법이 알아서 정해준다나 뭐라나· 교수에게서 직접 전달받은 내용은 아니라 확실하지는 않았다·
내 옆에 있던 트리샤가 기대감이 잔뜩 부푼 얼굴로 말했다·
“긴장돼!”
원래는 나 혼자 따로 추첨식에 참석할 생각이었지만 트리샤가 같이 갈 친구가 없다고 징징대는 바람에 같이 오게 되었다·
연금부와 마도학부는 이번 대련 평가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두 부서는 전투 능력보단 연구 실적이 더 중요한 학부이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세실 패거리도 없었다·
전투부와 마법부의 학생들은 제멋대로 구조물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데미안 너는 누구랑 붙을 거 같아?”
“몰라·”
솔직히 말해서 누구하고도 싸우고 싶지 않다· 지고 싶지 않지만 모든 능력을 드러내는 데에도 제약이 따른다· 그냥 뒤에서 구경만 하는 게 내 바램이었다·
나는 선배들이 밀집해 서 있는 곳을 슬쩍 바라보았다· 선후배의 위계도 있는 게 아니다· 같은 학년 끼리도 암묵적인 위계는 존재한다· 무리를 지은 구도만 봐도 누가 힘이 있고 누가 약한지 대략적으로 파악이 가능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학생들을 가르고 구조물 앞으로 나와 섰다·
일전에 순환계 수업을 담당했던 적이 있는 라캄 교수였다·
“자자 주목·”
교수가 나오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대번에 잠잠해졌다· 그가 한 번 크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 모인 건가? 후배들 앞에서 체면 좀 차리겠다고 바짝 준비했다고 들었네· 혹시 대비 안 한 사람 있나? 혹시 있다면 손 좀 들어보겠나?”
그러자 선배로 보이는 몇몇 이들이 당당하게 손을 번쩍 들었다·
라캄 교수가 마치 대련 결과를 확인이라도 한 것처럼 질색하고 고개를 저었다·
“쯧쯧 똥배짱 부리다간 큰코 다쳐· 이번 1학년들은 만만치가 않아· 그대들이 1학년 때 못 구한 환수의 뿔을 올해 입학생은 구해왔네·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라캄 교수는 잡담은 거기서 마무리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굼뱅이처럼 아무 준비도 안 한 녀석들이 있겠지만 신입생들 제대로 교육하겠다고 칼을 간 녀석도 있겠지· 자 이 분수대 물에 손을 넣고 손에 걸리는 것을 가져가면 된다네· 이 마법의 액체가 그대들의 운명의 대련 상대를 정해줄 게야· 뽑는 순서는 자유· 대련 평가일 전까지만 뽑으면 되고 추첨을 거부하면 최하점을 받을 걸세· 간단하지? 자 이해 못 한 사람?”
학생 광장은 여전히 고요했다·
곧이어 한 학생이 대범하게 분수대 쪽으로 다가갔다·
시온이었다·
전투부 선배들이 실소를 하며 옆사람과 귓속말을 해댔다· 분명 좋은 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상급생조차도 아직 시작을 안 했는데 시퍼런 1학년이 앞으로 나서니 몇몇은 경악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선배들의 따가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언가를 뽑아내고선 주머니에 넣고 그대로 사라졌다·
앞뒤 없는 그녀의 당당한 행동을 보며 라캄 교수는 재밌다는 듯이 껄껄 웃고는 말했다·
“자 나도 뽑아볼까·”
“···!”
“···!”
농담인줄 알았는데 라캄 교수도 진짜로 손을 넣고 무언가를 뽑고는 떠나갔다·
저 교수··· 마법부 교수였지? 마법부 학생 한 명은 교수를 상대하게 될 텐데 누가 걸릴지는 몰라도 참 안타깝다·
이제 점점 한 두 명씩 나와서 추첨 상자를 뽑아가기 시작했다·
“후···아!”
트리샤도 크게 심호흡을 하며 분수대에 다가가선 그 안에서 상자를 뽑아 내 앞으로 왔다·
“누구 걸렸는지 보자·”
그러자 트리샤는 두 손으로 꼭 감추고 말했다·
“안 돼! 아직이야·”
“···그거 아껴서 뭐 하려고?”
“몰라! 네 상대 알려주기 전까진 나도 없어!”
“···”
나는 슬쩍 분수대로 시선을 돌렸다· 루나가 소리없이 나와서 추첨 상자를 뽑아갔다· 그녀는 멀찍이서 나와 시선 교환을 하고는 떠나갔다·
그러는 틈에 트리샤가 내 등을 밀며 재촉했다·
“데미안! 너도 어서 뽑아!”
나는 가급적 시선을 끌지 않고 조용히 뽑아가려고 했지만 학생 광장에 온 순간부터 날 지켜보던 이들이 제법 있던 모양이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데미안 데미안·”
“진짜 데미안이 쟤야?”
“호위 임무에 대한 소문이 진짜야? 너무 멀쩡한데?”
나는 못 들은척 주의를 돌리고 분수대에 손을 넣었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뒤통수가 영 따가웠다·
잠시 뒤 물 안에서 기포와 함께 무언가 두둥실 떠올라 내 손에 닿았다·
아는 이를 움켜뒤고 곧장 안주머니에 넣었다·
돌아와보니 트리샤가 저혼자 상대를 확인하고눈 혼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
“큰일···났어·”
***
나는 약속한 장소인 중앙 도서관의 ‘가정불화를 해결하는 연금술’책이 꽂힌 책장 앞에 섰다·
루나는 이미 책장 맞은 편에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루나?”
“···응·”
“상대가 누군지 확인했어?”
“아니··· 아직·”
“나도 아직이야· 같이 확인해볼까?”
“···응!”
나는 주머니에서 추첨 상자를 꺼냈다·
“자 네가 내 추첨 상자를 가져가· 서로 교환해서 서로 누가 뽑혔는지 말해주자·”
“···응·”
루나가 책장 빈 칸으로 자기것을 슬쩍 밀었다· 나는 이를 받아들고 내 것을 그녀에게 넘겼다·
“준비 됐어?”
“응·”
“하나 둘 셋!”
우리는 동시에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이름이 적힌 작은 양피지가 있었다·
루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루스커스·”
내 상대가 될 사람의 이름이었다·
“처음 들어보는데 누군지 알아?”
“응···· 전투부 2학년 상급반이라고 들었던 것 같아·”
쉬운 상대가 걸리지는 않았다·
나도 서둘러 쪽지를 꺼내 루나의 상대를 확인했다·
거기엔 많이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파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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