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5
날 찾아온 여자는 제법 단아하고 얌전해보이는 인상이었다· 검보라색 단발머리와 붉게 칠한 입술이 나이에 비해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았을 때 단순히 루스커스의 친구 관계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보다 더 깊은 관계일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일단 나가보겠습니다·”
단아해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복식은 과감하기 짝이 없었다· 스커트가 짧아 허벅다리의 절반이 드러나 있고 상의도 쇄골 아래로 맨살이 민망할 정도로 노출된 상태였다· 사계절이 더운 남부 지방에선 저런 류의 옷차림이 일반적이라는데 실제로 보니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헤일리가 문 밖의 여자를 노려보며 떨떠름한 듯이 말했다·
“흠 루스커스한테 저런 아-리따운 친구가 있었나? 뭐 그래 일단 다녀와·”
나는 헤일리와 제니아의 시선을 뒤로하고 루스커스의 친구라는 여자와 함께 온실 밖을 나섰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시죠·”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우리는 캠퍼스 구석 인적이 드문 한 정원의 나무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쪽은 누구신데 찾아오신 거죠?”
지금 보니 그녀의 왼쪽 약지엔 보석이 박힌 반지가 있었다·
“마법부 2학년 올리비아야· 루스커스에게 들었어· 네가 대련 상대로 추첨됐다고·”
“네· 그분과는 정확히 무슨 관계시길래 찾아오신 겁니까?”
“···정확히는 루스커스의 약혼자야· 부모님의 요구로 약혼한 관계긴 한데 주변 사람들은 몰라· 너도 이건 비밀로 해주겠어?”
“저로선 발설해봐야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그런데 절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네가 루스커스를 꼭 이겨줬으면 좋겠어·”
“왜죠?”
뭘까· 약혼자가 이겨서 조금 더 주목받고 선배의 체면을 살리는 게 누가 봐도 좋은 거 아닌가· 그 둘의 관계가 머리 아프게 꼬여 있다는 건 어느정도 직감할 수 있었다·
올리비아는 힘없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자식이 싫으니까· 한때 좋아하기도 했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난 그 역겨운 자식이 무너지고 망신 당했으면 좋겠어·”
나름의 사연이 있다는 건 알겠다만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듣고 싶지는 않았다· 남의 치정 싸움에 괜히 엮여 봐야 내게 득될 건 하나도 없다·
“···저 나름대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지만 꼭 이길거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배의 복수심을 위해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당연히 넌 누구에게도 유감이 없겠지· 내 대신 복수해달라는 게 아니야· 널 도와주러 온 거지· 내가 네 편이 되어줄게·”
“선배가 제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루스커스는 강해· 일학년인 너는 무슨 수를 써도 이기기 힘들 거야· 그 자식은 마검사야· 기사 천 명 중 하나 있을까 말까 하는 그런 별종이라고· 그 자식을 상대할 방법을 알려줄게·”
“···마검사가 그렇게 흔했습니까?”
“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니? 천 명 중 하나가 흔한 거야?”
“이터니아에서 마검을 대련에 사용하는 걸 허락했습니까?”
올리비아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가만 있다가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너··· 설마 소드마스터들이 지니고 다니는 그 마검을 말하는 거야? 정말로? 그 마검을 루스커스가 진짜 다룰 줄 알았으면 내가 널 찾아오지도 않았어· 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혼절했을 테니까· 아니면 그냥 비명횡사했겠지·”
“····”
“내가 말한 건 마법을 병용하는 검사를 지칭한 거야· 공국에서 무슨 일을 벌였다는 소문이 들려서 조금 기대했었는데 아직 풋내기 티가 많이 나네·”
“1학년이 뭐 별거 있겠습니까·”
올리비아가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피식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자기 실력을 아나보네· 그래 그정도면 됐어· 내가 루스커스의 치명적인 약점과 대처법을 알려줄게·”
참 좋은 제안이긴 하지만 쉽게 내키진 않았다·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녀는 거절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왜? 왜? 더없이 좋은 제안이잖아? 같이 공통의 적을 상대하는 거라고·”
대련이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실전이라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이겼겠지만 이건 그럴 이유가 없다· 대련을 통해서 부족한 부분을 점검하는 게 수업의 주 목적이다· 꼼수를 써서 쉽게 이긴다면 난 배우는 게 없을 것이다·
뭐 이기면 어깨 좀 피고 우쭐댈 수야 있겠지만 내 실력 성장에는 도움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나 나름대로 정직하게 수련해서 싸울 것이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진다면 그거대로 의미가 있겠지·
“그냥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꼼수를 써서 비겁하게 이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상대는 내 정보를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련에 나설 것이다· 그러니 나도 비슷한 조건에서 나와야 공정하지 않을까·
나는 그대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그러다 올리비아는 다급한 듯이 내 뒤를 쫒아오며 호소했다·
“지금의 너라면 그 자식 절대 못 이겨!”
나는 무시하고 걸어갔다·
“그 자식은 네가 공국의 총애를 받는 걸 알고 더 칼을 갈고 있어· 널 이기면 본인이 더더욱 고평가 받게 될 걸 알고 반칙이라도 써서 널 박살낼 거야·”
올리비아는 내 앞에 달려와선 팔을 벌려 가로막고는 말했다·
“그리고 지 아버지 인맥을 동원해 그 소식을 공국에 퍼트리려 하겠지· 자기가 백금 방패의 기사를 끔찍하게 박살냈다고·”
“백금 방패는 강하다고 주는 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싸우다 보면 질 수도 있는 거죠· 진다면 그게 제 실력인 겁니다·”
“보기보다 융통성이라곤 없는 녀석이네· 좋아· 그럼···네 수련을 직접 도와줄게· 내가 루스커스의 마법 스타일을 모방해서 대련상대가 되어줄게· 그럼 됐지? 이건 전략의 일종이잖아·”
“···루스커스라는 분을 그렇게까지 박살내려는 이유가 뭡니까?”
“그 자식은 나 하나로 만족을 못 하거든· 왜 얼굴 반반하고 능력좋고 가문도 빵빵한 남자가 한 여자로 만족하는 경우는 드물거든·”
“····”
“대놓고 바람을 피는 것도 모자라 일학년 여자애들한테 집적대기까지 했지· 약혼녀가 타지에 있는 것도 아니라 같은 학년에 있는데 말이야! 평생 함께하자느니 졸업하면 바로 식을 올리자느니 별별 소리를 다 하더니만!”
“····”
“솔직히 말하면 너랑 친해져서 히히덕 거리는 모습을 보면 그자식도 열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접근한 것도 있어· 너도 좀 멀쩡하게 생겼기도 하니까·”
그녀가 어떤 심정일지 너무도 잘 파악되는 내 머리가 싫어졌다· 마음이 약해진 나는 결국 올리비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모의 대련을 도와주십쇼·”
***
올리비아와 그레이스산 초입부의 어느 인적이 없는 숲에 나란히 마주보며 섰다·
그녀는 데미안의 무장을 보고는 의아한 듯이 말했다·
“주무기는 뭐야?”
“검입니다·”
“그거 전부 다?”
데미안은 허리춤에 강철검 하나· 그리고 벨트에 다섯 자루의 단검을 걸어두었다·
일반적인 검사들의 무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롱소드를 무장해도 마법사를 상대로는 리치가 턱없이 부족할 텐데 저 단검 가지고 뭘 하려는 것일까·
“네· 다 씁니다·”
“너 혹시 암살단 같은 곳에서 수련했니?”
“····”
“농담이야· 바로 대련 시작하자·”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올리비아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데미안이 단검 한 자루를 뽑았다·
백금 방패의 기사이자 실베린의 제자이기도 한 데미안은 과연 어떤 실력을 지녔을지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데미안이 과연 루스커스를 상대할만한 깜냥을 가지고 있는지도 테스트하고 싶었다·
“루스커스는 여러 마법을 다루지만 화염계 원소 마법이 주특기지·”
올리비아의 양 손에 화염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바닥의 풀과 낙엽들에 물을 뿌리듯 불씨를 휙휙 집어 던졌다·
그러자 그녀의 발 아래로 삽시간에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공격에 나서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큰일날걸?”
“····”
“라우라 미지아 글랜!”
영창을 외자 땅에 붙은 불씨는 양 옆으로 선을 그리며 번져나갔다·
데미안은 단검을 든 채로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올리비아는 마력을 집중해 불길을 원형이 되도록 이동시켰다· 허리 높이까지 치솟는 화염이 데미안을 원으로 둘러쌌다· 단서너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데미안은 다섯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공간에 포위되어 있었다·
“마법사에게 마법을 시전할 공간과 시간을 내주면 이 꼴이 되지·”
마수에게 써먹는 포위술의 일종이었다· 그 불의 원 안에 갇히게 되면 타오르는 화염과 열풍 때문에 외부 시야가 완전히 차단이 된다·
데미안은 이제 올리비아의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었다·
이제 마법사의 농락에 당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위치를 알려주지 않기 위해 빙 돌아서 무영창으로 화염구를 소환했다·
이는 곧장 데미안의 등뒤로 쇄도했다·
스걱·
순간 칼날이 번쩍인다· 분명 헛점을 찌른다 생각했지만 그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 화염구를 베어버렸다·
“···?”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살벌한 반응이었다· 그저 우연일 뿐이란 생각에 다시 자리를 옮겨 다시 화염구를 던졌다·
그리고 데미안은 귀신같이 이에 반응해 화염구를 두동강 내버렸다·
“···어?”
쉬익!
올리비아가 소리를 낸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귓가를 빠르게 스쳐갔다·
“꺅!”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는 날아간 물건을 돌아보았다· 데미안의 단검이 나무에 깊게 박혀 있었다·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라우라 엔파실···!”
올리비아는 마력을 무리하게 끌어올려서 화염의 장벽을 더욱 키웠다· 그 안에 갇힌 이는 열기 때문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었다·
화염과 열풍으로 인해 소리도 시야도 완벽하게 차단될 수밖에 없었다·
쉬익!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화염벽을 뚫고 또다시 단검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정확히 귀 옆을 스쳐갔다·
“···!”
우연이 아니었다· 데미안은 정확히 그녀의 위치를 알고 날린 게 분명했다·
또 다른 단검이 그녀의 정수리를 스쳐 지나갔다·
“꺅!”
깜짝 놀란 나머지 그녀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집중력이 흐려지자 화염 장벽은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시뻘건 불길이 차차 사그라들고 허연 연기 속에서 천천히 올리비아에게 걸어나왔다· 그는 털끝 하나 불에 손상된 것 없이 깨끗한 모습이었다·
심장이 과하게 뛰는 탓에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고 있던 올리비아에게 데미안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차마 그 손을 잡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대체 뭐하는 애야· 혹시 서커스 출신이야? 내 위치는 어떻게 알았어?”
“···원래 좀 예민합니다·”
그녀는 데미안의 비정상적인 감각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욱 무서운 건 데미안은 제 실력을 발휘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느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
루스커스가 개인 정비실에서 손수건으로 검을 닦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의 목소리엔 신경질적인 기운이 묻어 나왔다·
올리비아는 약간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감각이 엄청 예민하다고 마법으로 교란시켜도 그게 통할지 모르겠어·”
“그게 그 자식 약점이야?”
“아니· 그치만 그 애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아야····”
“내가 분명히 말했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 자식이 뭐에 약하고 뭘 두려워하는지 알아내라고·”
“····”
루스커스가 검을 내려놓고 일어나 올리비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볼을 천천히 쓸어냈다· 그러다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가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밀어댔다·
“우리 가문의 돈줄에 달라붙어 기생하는 입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봐· 난 니들 가족한테 빠져나가는 가문의 돈을 생각하면 아까워서 잠을 못 자겠어·”
올리비아의 가족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나도 알아· 네 덕에 우리 가족이 풍족하게 지내는 거·”
“받아 먹는 게 있으면 최소한 책임 의식 정도는 가지고 임무에 임하라고· 어? 그 자식 이겨서 유명해지고 공녀님한테 인정받으면 내 약혼자인 너도 좋은 거 아니야?”
“····”
“가서 달라붙어· 가짜 연인 행세를 하든 불쌍한 척을 하든 해서 약점을 캐오라고· 좀 이쁜 짓을 해야 내가 이뻐해주지 않겠어?”
“너는 그런 거 없어도 이길 수 있잖아? 대체 왜····”
데미안이 나름의 실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루스커스를 상대하기엔 확실히 부족했다·
“확실하게 밟아버려야 내 능력이 더 부각되니까·”
올리비아는 그를 올려다 볼 수 없었다· 루스커스의 눈빛애 가득한 탐욕에 눌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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