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9
대련 평가는 다섯 개의 대련장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전투부와 마법부의 학생 대부분이 심사를 받는 것이고 워낙에 수가 많다 보니 관심도가 큰 대진과 그렇지 않는 것들이 나뉘어 있었다·
나와 루스커스의 대련은 다른 학생들에게 그리 우선도가 큰 행사는 아니었다·
몇몇 사건들로 내게 이목이 집중되긴 했지만 그건 이터니아까지 잘 닿지 않는 먼 타국의 일이고 내 실력 자체는 주목받을 만큼 기대를 사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 대진에 관심을 보이는 이도 제법 있었다· 주로 미술부 선배들이 그러했고 트리샤와 함께 다니는 무리 그리고 공국 출신의 동기들과 일부 교수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1학년 중에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이는 다름아닌 시온 그리고 루나였다·
시온은 전투부 3학년 바리온이라는 학생과 대진이 짜여졌고 루나는 2학년 마법부이자 내 미술부 선배인 파벨라와 대진이 붙은 상황이었다·
일학년을 대표하는 학생들이니만큼 친분과 상관없이 동급생들은 이들을 응원했고 선배들은 싸움 구경이라는 원초적인 재미 한편으론 공식적으로 허락받은 하극상에 대한 묘한 불안감을 껴안고 그 대련 평가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대련 평가가 치러지는 날의 이른 아침·
나는 미술부 부원들과 함께 대련 평가를 구경하기 위해 대련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신입아 방금 뭐라 그랬어?”
미술부 부부장 제니아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제차 되물었다·
“몸에 올라타서 주먹으로 때려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신입이 너는 가끔 보면 골 때리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그게 되겠니? 그건 개싸움이잖아·”
“그냥 호기심입니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제압해야 하지 않습니까· 힘이 비등하면 결국 주먹다짐까지 갈 수도 있겠죠·”
“금지된 건 아니지만 그 짓거리를 하면 도의적으로 문제가 되겠지· 선후배 중 한 명을 그렇게 미친놈처럼 패버리면 어떻게 되겠니· 어? 어?”
제니아는 타일르듯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역시 표면적으로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는 사람을 건드리면 문제가 되려나·
“···제가 그러겠다는 건 아닙니다·”
미술부 부장 헤일리가 어느틈에 내 옆에 슬쩍 다가와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루스커스랑 주먹다짐하려고? 나도 가급적이면 말리고 싶어·”
“····”
“루스커스는 반반하고 서글서글한 면이 있어서 추종하는 무리도 거느리고 있어· 또 굉장한 모범생이라 교수님들한테 신임을 받고 있거든· 우리 신입이 실력 있는 건 알고 있지만 명분도 없이 그런 놈을 다 보는 앞에서 냅다 패버리는 건 좋지 않아· 뒤에서 패면 모를까·”
약혼녀에게 마구잡이로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이 대외적으론 모범 학생의 평판을 유지하고 있다니· 인간은 겉만 보고는 판단할 수 없는 존재다·
“제가 그러겠다는 건····”
“근데 나도 그 자식 패고 싶긴 해· 딱히 잘못한 건 없는데 그렇게 성실하고 깨끗하고 무결점인 것처럼 행세하는 놈들은 뭔가 구리거든· 여자의 촉이라고 할까·”
제니아가 헤일리에게 슬쩍 딴지를 걸었다·
“믿지 마· 여자의 탈을 쓴 영감네가 무슨 여자의 촉?”
불쑥 들어온 공격에 헤일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말했다·
“신입아 루스커스한테는 안 되지만 저 년한테는 그래도 돼· 내가 책임질게·”
제니아는 이미 멀리 도망치고 없었다·
***
제법 이른 시간이라 생각했지만 대련장은 이미 구경하러 온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단순히 마법부와 전투부 뿐만 아니라 대련 평가와는 관련 없는 다른 학부의 학생들도 진귀한 구경거리를 위해 자리를 메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평가가 진행되는 다섯 개의 대련장 가운데 유독 한 곳에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
그건 바로 악명 높은 시온의 대련 장소였다·
“신입아 너도 저건 보고 싶지?”
헤일리가 내 팔뚝을 붙잡고 구경하기 가장 좋은 장소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런 수고가 무색하게 우리가 도착한 이후로 대련은 정말 눈 깜짝할 새에 끝나버렸다·
이제 좀 자리 좀 잡고 구경좀 해보겠다 싶은 참에 시온의 마검이 상대가 선 곳의 지면을 갈라버린 것이다·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으아아아악!”
시온의 상대인 바리온은 여자애처럼 소리를 지르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대련장이 두동강 나고 갈라진 틈에서 섬뜩한 푸른 빛이 반짝였다·
그래· 시온에게 검으로 합을 맞추면서 친목을 다지는 일 따위는 기대해선 안 된다·
“우오오····”
그리고 관중석에서 감탄인지 경악인지 모를 소리가 울려퍼졌다· 거대 플랜테라도 단칼에 베어버리는 무시무시한 검· 나는 검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마검은 모든 종류의 검 중에서 정점에 위치한 무기라는 건 알고 있다· 일개 아카데미 학생이 저런 걸 상대할 수 있을리가·
시온은 땀 한 방울 안 흘린 걸 보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바리온이 이를 뿌득 갈며 소리쳤다·
“초장부터 마검을 들고 오는 건 너도 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냐?”
시온은 차갑게 선배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검을 그의 앞에다 던졌다·
그녀의 마검이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푸른 광채를 뿜어냈다·
“그럼 네가 그걸 잡고 날 상대해 봐·”
오만하고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듯한 말투·
바리온의 얼굴이 굴욕감과 당혹감으로 뒤덮였다·
그는 선뜻 마검을 집어들지 않았다· 그걸 집는다고 해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이리라· 그 대신 자신의 검을 쥐고 다시 일어섰다·
“다시 덤벼 동등한 조건에서 제대로 붙어라·”
시온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자신의 두 번째 검을 꺼냈다·
곧이어 그녀의 아티팩트가 가동하고 전광석화 같이 달려나갔다·
챙!
그녀의 올려베기 한 번에 상대의 검을 날려버렸다· 한 호흡만에 열 걸음이나 되는 거리를 좁히고 일격을 날린 것이다·
관중석까지 날아가던 검은 마법 결계에 부딪혀 맥없이 바닥에 꽂혔다·
조교가 대련장에 난입하고 그렇게 평가는 종료됐다· 그러나 시온은 대련장에서 나오지 않고 말을 남겼다·
“네가 부족한 걸 말해주지· 마검과 합을 맞출 내성이 없을 뿐더러 방어형 검식에 대한 이해도 없고 그렇다고 타격형 검식에 뛰어난 것도 아니야· 빈틈도 너무 많고 반응도 느려·”
시온은 망연자실한 바리온의 면전에 대고 고쳐야 할 점을 모조리 쏟아냈다· 그것도 3학년 선배한테·
잔인한 여자다·
옆에서 보던 헤일리가 오만상을 찡그렸다·
“실력은 흠잡을 게 없는데··· 나 쟤 싫어·”
“···쟤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남자들 사이에 차가우면서 이쁘장한 인상에 더해 외로운 늑대 같은 시온을 동경하는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여자애가 시온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공녀의 신임을 받는 신입이가 보기엔 어떤 것 같아?”
“저도 시온은 상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건 진심이다· 심지어 내 전력을 다 할 수 있다 해도 시온은 많이 껄끄러운 상대였다·
“일학년 중엔 신입이가 그나마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쉽네·”
“선배분들 중에는 시온을 이길 실력을 가지신 분이 얼마나 됩니까?”
헤일리가 한숨을 쉬었다·
“확답하기는 어려운데 삼학년 중에도··· 저런 놈이 하나 있긴 해· 걔도 소드마스터 밑에서 수련했으니까· 그보다 신입아 너는 대련 평가 언제 보는데?”
“제 3대련장 21조라고 편성되어 있는데···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헤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한 듯이 물었다·
“잠깐 이거 다음 다음인데···너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네?”
***
루스커스는 빙결 마법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특수 장갑과 아대· 북부 지역에서 공수해 온 서리 악어의 가죽으로 맞든 갑옷을 걸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데미안·
그가 대련 상대로 추첨된 건 어쩌면 신이 준 기회와도 같았다·
루스커스의 일생에 가장 이루고 싶은 목표는 바로 비비 공녀의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이터니아에 입학한 것도·
특이 유형인 마검사가 되기 위해 피가 나도록 수련한 것도·
대공 가문에 그토록 오랜 기간 조공을 상납한 것도·
올리비아를 진짜 약혼녀라 여기지 않고 도구처럼 이용했던 것도·
공녀의 옆에 서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잠깐동안 마주했던 비비 공녀의 매혹적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공녀님··· 비비 공녀님····”
그것을 일생일대의 목표로 여기고 살아왔기에 최근에 데미안을 둘러싼 소문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공녀의 호위임무를 거절하는 미친 짓거리를 벌인데다 초면에 비비 공녀에게 불경스런 언사를 행하고 제멋대로에 실력도 불분명하다고 했었다· 그런데 공녀의 실종 이후로 중간 과정은 생략되고 돌연 총애를 받는다는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루스커스는 그저 데미안을 이기기만 하면 됐다·
도무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승부를 압도적으로 결정지으면 데미안에게 쏠리는 관심은 단번에 루스커스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각오를 다지던 차에 대기자 천막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약혼녀인 올리비아였다· 그녀는 하인이라도 된 것처럼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말했다·
“이번 평가의 참관인으로 공국의 대사가 찾아왔어·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 대련을 지켜볼 건 확실해·”
“···하늘이 내게 기회를 주려는군·”
“····”
***
미술부 부장 헤일리는 대련장에 먼저 나와 우두커니 앉아 있는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승패에 상관없이 접전을 펼치기만 해도 1학년이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이다· 신입이 상급생을 이기는 건 드문 일이지만 데미안이라면 뭔가를 해낼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 있던 그녀의 옆에 4학년 네리아가 접근해 앉았다·
“후배 신경써주는 건 여전하네 헤일리·”
“이렇게라도 안 하면 죄다 도망가거든· 설마 우리 신입 염탐하려고 온 거야?”
“아니 교류전 선발 문제로 루스커스를 보러 온 거긴 한데 뭐 나름 흥미로운 대결이긴 하지· 남매가 각각 추천한 후배끼리 맞붙는 거니까·”
“하 그 자식이 루스커스를 지명했나보네?”
헤일리 조소를 머금었다· 같은 학년에 쌍둥이 오빠가 있었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이터니아에 거의 없었다· 그녀가 무슨 성과를 내도 쌍둥이 오빠와 비교될 것이었기에 비밀로 하고 있었다·
네리아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대련장을 내려다보았다·
데미안의 맞은편에서 루스커스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헤일리가 네리아에게 물었다·
“누가 이길 것 같아?”
네리아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루스커스·”
***
“다음 호명하는 학생들은 대련장 앞으로 나오도록· 루스커스 데미안·”
루스커스는 대련장 시작 위치로 섰다· 가까운 곳에서 데미안의 모습을 보니 전의가 끓어 오르는 것 같았다· 곧이어 조교의 지시에 따라 앞으로 나와서 데미안과 악수를 나눴다·
“잘 부탁드립니다· 루스커스 선배·”
루스커스는 다소 진지하게 데미안을 맞이했다·
“반갑다· 네가 공녀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 소문을 들었다· 그게 사실이냐?”
데미안이 루스커스의 속내를 읽어내려는 것처럼 정적인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리고 도발하듯 한마디 던졌다·
“총애 그 이상입니다·”
곧장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뻔한 헛소리였지만 루스커스의 질투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건방지다는 소문이 맞았어· 그런 입버릇으로 어떻게 목이 아직 붙어 있는지 의문이군·”
데미안이 픽 웃으며 말했다·
“공녀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더 놀랄 겁니다·”
그의 능청스런 도발 덕에 루스커스의 말투가 더욱 싸늘해졌다·
“네가 정말 그럴 자격이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도록 하지·”
그리고는 휙 돌아서 원위치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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