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0
대련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원형의 경기장을 둘러싼 관중석에서 웅성거리던 소리가 단번에 잦아들었다·
늘상 보던 대련이지만 데미안의 입장에 이입한 탓에 헤일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헤일리도 데미안이 확실히 이길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객관적인 전력으론 루스커스가 우위였지만 그냥 막연한 직감으로 그가 선전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었다·
루스커스가 혼잣말을 하듯 주문을 작게 외며 선공을 준비했다·
마법사와 검사의 대련에선 거리가 좁혀질수록 마법사가 불리하다· 그렇기에 서로의 간격을 조절하는 게 승패를 가르게 된다·
마법사는 숨을 고르며 마법을 시전할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려 들 것이고 검사는 있는 힘을 다해 근접전으로 끌고 가 정신을 흐려놓을 것이다·
문제는 루스커스는 검술과 마법 이 두 분야에 능통하다는 것이다·
거리를 벌리면 원거리에서 마법 세례를 퍼부을 것이고 근접전으로 돌입하면 수준급의 검술이 그를 맞이해줄 것이다·
루스커스가 주문을 외자 허공에 수증기를 응결시켜 만든 얼음구 십수개가 붕 떠올랐다·
전투부 학생이 능숙하게 마법을 시전하는 기이한 풍경에 다들 감탄사를 뱉었다·
얼음구는 준비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데미안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상대의 전력을 탐색하듯 조심스럽게 접근하다 몸을 틀어가며 공격을 피하고 일부는 검으로 쳐냈다·
“저걸 방어구도 없이 맨몸으로 피한다고? 음 너무 무리하는데·”
얼음구의 수가 제법 많았다· 우박비를 감각으로 피하려는 모습이 무모해 보였지만 데미안은 예상외로 회피에 능숙했다·
주먹만한 얼음이 바닥에 단단히 박힐 정도로 매서운 속도였다· 한 대 맞으면 뼈가 부러지고도 남을 정도였다·
예상 외로 좋은 움직임을 보여주자 네리아가 머쓱하게 턱을 쓸었다·
“흠····”
단순히 반응 속도가 빠른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궤적에서 상대의 공격 의도를 다 읽은 것처럼 움직임이 간결했다·
하지만 잠깐의 움직임으로 역량을 다 파악해낼 수는 없었다·
데미안이 루스커스에게 근접하려 하자 허공에 얼음구가 다시 생성되더니 소나기처럼 퍼붓기 시작했다· 그 덕에 데미안은 쉽사리 근접하지 못했다·
루스커스는 서 있던 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주문을 외고 있었다·
헤일리가 이를 보고 말했다·
“루스커스가 큰 걸 준비하려나보네·”
네리아도 동의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 함정이군· 중급 마법에 해당하는 건데 방학 때 칼을 갈았나보군·”
캐스팅을 완료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집중력을 요구하는 마법이었다· 그럴 땐 무리를 해서라도 근접해서 마법을 끊어내야 했는데 데미안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네 후배님은 얼음구를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이는데·”
루스커스의 마법에 따라 공기가 응집하고 그라운드에 점점 습기가 들어차며 흙바닥의 색이 변해가는 중이었다·
캐스팅이 끝나면 단번에 응결하게 될 것이다·
검술 이외에 별다른 옵션이 없는 데미안이 마법 함정에 빠진다면 대련은 그대로 끝날 게 뻔했다·
그리고 데미안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다·
헤일리가 초조한 것처럼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신입이····”
네리아는 이미 결말을 다 본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데미안은 공격을 회피하는 것 외엔 다른 행동을 취하기 어려워 보였다·
몇 분이 지나도 데미안은 뚜렷한 수를 보이지 않고 얼음구에 농락을 당할 뿐이었다·
루스커스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은 것 또한 전력차를 여실히 보여주는 듯했다·
마침내 마법 함정 캐스팅이 끝났는지 루스커스는 입을 꾹 다물고 한쪽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러고는 데미안에게 도발하듯 말했다·
“그 실력으로 어떻게 비비 공녀님의 인정을 샀는지 의문이군·”
루스커스가 허공에 손바닥을 쭉 내민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데미안이 정신이 팔린 틈에 흠뻑 적셔놓았던 바닥이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더불어 얼음구를 피하던 데미안의 발 또한 대지와 함께 얼어붙었다·
“···!”
데미안이 당황한 눈으로 루스커스를 노려보았다·
루스커스는 그를 보며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공국에서의 일은 잠깐의 꿈이었다고 생각해라·”
곧이어 땅에서 얼음 벽이 불쑥 솟아나와 데미안을 겹겹이 둘러싸버렸다·
데미안은 케이지 안에 갇힌 짐승처럼 그대로 완전히 밀봉되었다·
헤일리가 탄식했다·
“아····”
검으로 뚫어내는 건 불가능할 정도로 단단하고 두터운 얼음이다· 사실상 전투 불능 상태가 된 것이다· 완벽하게 루스커스의 승리였다·
그리고 이를 본 관중석의 학생들은 감탄을 쏟아냈다·
“우와아아아!”
루스커스는 마력 소모가 컸던 탓인지 얼굴이 창백했지만 입가에 미소는 잃지 않고 환호해주는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참관인 좌석에 앉아 있는 율리시아 공국의 대사에게도 가볍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투가 끝났음을 확신한 그는 대기실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그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다시 몸을 돌렸다·
관중들이 아무도 일어서지 않는다· 그리고 조교가 나와서 뒷정리를 하지도 않는다·
대련 종료를 알리는 타종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스커스는 이상함을 감지하고는 그가 만든 얼음 감옥을 다시 돌아보았다·
허여멀건 얼음의 벽 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크리스탈로 만든 마석등처럼 시뻘건 빛이 그 주변을 아름답게 밝히고 있었다·
“···?”
의문을 품고 다시금 그 얼음 감옥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벽에 잠시 손을 대는 순간·
시뻘건 검날이 얼음 벽을 뚫고 루스커스의 미간 바로 앞까지 튀어나왔다·
“으 으악!”
깜짝 놀란 그는 허겁지겁 뒷걸음치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벽을 뚫고 나온 검이 다시 들어가더니 그 구멍으로 화염이 맹렬히 뿜어져 나왔다·
위기를 직감한 루스커스는 주문을 더 외워 보강 마법을 시전했다·
땅에서 얼음판이 솟아올라 감옥을 사방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덧대는 속도가 녹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루스커스는
“이 이건 대체·”
곧이어 데미안이 두터운 얼음벽에다 칼을 꼽고는 버터처럼 손쉽게 잘라버렸다· 그리고 조각난 얼음벽을 걷어차버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데미안은 시뻘겋게 달궈진 검을 들고 흠뻑 젖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관중석에서 놀란 듯한 웅성거임이 가득 퍼졌다· 이를 지켜보던 헤일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서 소리쳤다·
“그래! 이거지! 신입아 다 조져버려!”
옆에 있던 네리아는 민망함을 참고 헤일리를 앉히려고 옷을 아래로 툭툭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직 끝난 거 아니야· 루스커스의 마력이 바닥났어도 검술로 제압하지 못하면 소용 없어·”
루스커스의 필살기를 방어했으니 이제는 정면승부를 할 차례였다·
데미안이 곧장 루스커스에게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캉!
그 둘의 검이 서로 맞부딪쳤다·
네리아는 데미안이 어떤 식으로 나올 것일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의 검술을 제대로 관찰할 기회는 나오지 않았다·
캉! 캉! 캉!
세 번의 합만에 루스커스의 검이 힘에 밀려 날아갔기 때문이다·
네리아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무리한 마법으로 인해 기력이 소진된 몸이라고는 해도 너무 손쉽게 루스커스를 제압해버렸다·
루스커스는 순발력 있게 손에 눈가루를 생성해 데미안에게 뿌리고는 다시 거리를 벌려서 칼을 잡았다·
데미안은 신호를 주듯 팔을 쭉 뻗고 손을 튕겼다·
곧이어 얼음 감옥 안에서 숨어 있던 주먹만한 새가 불쑥 튀어 나왔다·
“삐약!!”
그 새는 흥분한 것처럼 마구 날갯짓을 해대며 불꽃을 온 사방에 퍼트렸다· 대련장이 열기로 후끈해지고 사방에 가득했던 얼음구들이 녹으며 허연 수증기를 뿜어냈다·
그 모습을 본 관중석의 학생들이 이리저리 떠들기 시작했다·
“정령? 정령사였어?”
“실베린 교수님 제자였잖아· 역시 뭔가 있긴 했었어·”
네리아는 수첩을 꺼내 교류전 1학년 후보 명단을 다시금 살폈다· 거기에 분명 데미안의 이름은 없었다·
네리아는 한동안 고민하다 거기서 시온과 게일을 제외한 다른 이름은 전부 빗금을 쳐버리고는 데미안의 이름을 추가했다·
그리고 다시 경기장을 내려다 보았다·
대련장에 둘러쳐진 마법 결계에 증기가 갇힌 탓에 순식간에 안개가 낀 것처럼 자욱해졌다·
마검사 유형도 드물긴 했지만 정령술을 겸비한 검사는 더더욱 희귀했다·
오랜 시간 캐스팅에 공을 들여야하는 마법과 달리 정령은 아무런 준비작업 없이 원소 마법을 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가치가 있었다·
승부의 주도권은 이제 데미안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다만 근접전에 불리한 안개를 만들어낸 의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루스커스는 기회를 엿보곤 곧장 수증기가 자욱한 곳으로 뛰어들어 모습을 감췄다·
***
루스커스는 몸을 숨겼다· 중급 마법을 위해 무리한 상황인지라 당장 정면 대결을 펼칠 수는 없었다·
데미안과 검을 맞댄 이후로 손목이 몹시 욱신거렸다·
“이··· 미친놈·”
그 녀석은 체구에 맞지 않게 괴물같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건 올리비아에게 전해 듣지 못한 거라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서로 시야가 차단된 틈을 타 남은 마력을 최대한 끌어 모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바쁘게 주문을 외던 와중에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공녀님의 신임은 거저 얻은 게 아닙니다·”
“···꼭 다 끝났다는 것처럼 여유부리는군·”
루스커스는 허공에 얼음 송곳을 소환해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날려보냈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주문을 외려던 순간·
쉬익!
반격처럼 무언가가 쏜살같이 날아와 루스커스의 심장부에 그대로 꽂혀버렸다·
“으아악!!”
루스커스는 화들짝 놀라 그대로 고꾸라졌다· 잔뜩 겁에 질린 그는 반사적으로 가슴을 매만졌다·
단검이 가죽 갑옷에 박혀 있었다· 이를 뽑고 확인하니 칼끝이 뭉툭하게 다듬어진 나무검이었다·
“하아 하아·”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다· 데미안은 시야가 차단된 상황에서 정확히 급소를 찌른 것이다· 이건 평범한 인간의 감각이 아니었다·
루스커스는 벌떡 일어나 칼을 꽉 쥐고 소리쳤다·
“나와라! 검을 들고 정면으로 싸워라!”
그러자 수증기 속에서 데미안이 불쑥 튀어나와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버렸다·
루스커스는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데미안은 냅다 그의 몸에 올라타 주먹으로 연달아 타격했다·
무자비한 타격음이 연신 울려퍼졌다·
그가 팔을 허우적대며 소리쳤다·
“그 그만!”
그러자 데미안이 코피를 줄줄 쏟아내는 루스커스의 멱살을 잡아 들고는 말했다·
“제 업적이 탐나십니까?”
“····”
루스커스가 그의 업적을 가로채고 싶어하는 걸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선배가 공녀님을 지킬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면 제 역할을 전부 그대로 넘겨드릴 수도 있습니다·”
“····”
“반대로 자격이 없다면 다시는 공녀님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십쇼· 아시겠습니까?”
“쿨럭 난 타고난 ‘별의 아이’야· 네 인정과는··· 상관 없이 난 충분히 자격이 있어· 이 새끼야·”
루스커스는 그 와중에 마법을 시전해 주변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순간 루스커스는 심장이 꽉 조이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커헉!”
곧이어 공기가 무거워진 것처럼 그의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데미안의 주변에서 갑자기 무시무시한 양의 마압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분명 데미안에게서 나오는 건 아니었다· 허공에서 형체가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강력한 존재감을 방출하고 있었다·
“허 허억 허억 무 무슨 짓을····”
고통에 절어 몸을 이리저리 뒤틀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순간·
대련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엄청난 마압은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데미안은 루스커스를 보며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의 아이는 개뿔·”
***
대련장에 트리샤와 그의 미술부 선배들이 내려와 무슨 토너먼트에서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데미안을 축하하고 있었다·
대련 평가 대기자 천막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전투를 전부 지켜본 루나는 데미안이 이긴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환호했다· 그녀도 함께 가서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그럴 수 없는 처지가 내심 아쉬웠다·
데미안의 모습을 감상하던 중 반대편 대기자 천막에서 흐뭇한 눈빛으로 데미안을 바라보는 사람을 발견했다·
“···?”
희푸른 머리카락·
수호목 앞에서 마주했었던 그 여자였다·
그녀의 애정이 담긴 듯한 눈빛은 루나에겐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데미안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삐약이와의 접점도 그렇고 의심가는 점이 많은 여자였다·
데미안이 주변 사람들에 이끌려 대련장을 떠나기에 앞서 루나가 있는 대기자 천막을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루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몸을 숨겼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뒤 그녀는 모습을 다시 살짝 드러내고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데미안이 루나의 인사를 확인하고는 대련장을 떠났다·
다시 반대편 천막을 확인하니 희푸른 머리의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루스커스의 얼음이 아직도 어딘가에 남은 것일까· 천막 안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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