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3
루나를 보면 섬세하게 다듬어진 유리 조각상을 보는 것 같았다· 참 아름답고 완성도도 높은 창조물이지만 누군가가 툭 치면 그대로 모두 부서질 것 같았다·
루나 스스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곁에서 지켜본 내 느낌은 그랬다·
내가 이렇게까지 찾아온 건 사실 불안해서다· 괜히 다치고 상처 받아서 또 어둠 속을 빠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대련 평가 하나로 그렇게 될 일은 없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생각한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루나가 잠시 조용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들어···와도 돼·”
“···응?”
“아이들이 말해줬어· 우리를 볼 사람이 없대·”
“····”
그래도 혹시 몰라 주변을 더 살피고 대기자 천막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루나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장비를 점검하거나 몸을 푸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울 앞에 얌전히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한 번 보고는 말했다·
“응원··· 고마워·”
미술부 선배들과 함께 있었으면 영락없이 파벨라 선배를 응원해야 했을 거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낼 생각이라면 선배들과 함께 있는 게 맞겠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파벨라보다 루나가 엄밀히 내 사람에 가깝고 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감정을 투자하고 싶었다·
“내 도움이 필요한 건 없어?”
“응 아 아니·”
루나가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필요하다는 건가 아님 필요 없다는 건가·
“왜 그래?”
“···머 머리 묶어줄 수 있어?”
다소 의아했다· 머리야 묶을 줄은 안다· 어릴적 나와 리자는 서로를 돌봐주면서 많은 것들을 익혀왔고 그 덕에 머리 묶어주는 법을 모를 수가 없었다·
“····”
루나의 목소리가 살짝 주늑들었다·
“대련 전에는 항상 묶었는데··· 메이드가 없어서····”
머리카락이 워낙에 길었던 탓에 다른 사람이 도움이 필요했던 거구나· 귀한 집 자식이라 혼자 묶을 일이 없기도 했을거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신체보다 더 민감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괜찮으려나·
나는 루나의 등 뒤로 다가가서 말했다·
“끈 있어?”
루나가 테이블 위와 거울 주변 살펴보고는 난감한 듯이 말했다·
“없어···졌어·”
“음··· 꼭 끈이 아니어도 괜찮지?”
“···으 응·”
루나가 당황해서 시선을 한곳에 두질 못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평소 가지고 다니던 하얀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는 루나의 금발 머리카락을 손으로 모아 손수건으로 묶었다· 그런 다음 손수건 티가 안나게 리본으로 매듭지었다·
살다살다 머리 묶는 기술을 이렇게 또 써먹을 줄은 몰랐다· 어릴적 장신구 살 돈이 없어서 리자 머리를 이렇게 묶어주곤 했었는데·
은발머리에 하얀 손수건 리본은 굉장히 잘어울렸었다· 물론 이제는 다시는 볼 일 없겠지만·
이제보니 금발 머리도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루나는 제법 민망했는지 두 손으로 무릎을 꾹 누른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다 됐어· 어때?”
루나가 쭈뼛거리며 고개를 살짝 돌려 머리끈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뻐···· 어디서 배운거야?”
“어릴 때 수녀님들한테 배웠어·”
“데미안··· 신전에서 지냈어?”
“응·”
그녀는 조심스러운 성격 탓인지 과거에 대해 더 묻지는 않았다·
루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른 질문을 이었다·
“···혹시 트리샤··· 라는 애 머리도 묶어줘?”
“트리샤 머리는 묶어준 적 없어· 이런 건 몇 년 만에 해보네·”
그러자 루나가 다소 자신감이 생긴 것처럼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입가에 미소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와 있었다·
“루나·”
“···응·”
“네가 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그래도 힘들다 싶으면 손수건 풀어서 백기로 흔들어·”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소리없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루나랑 조금 더 친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응···· 기억할게·”
“다치지 마·”
***
루나는 상대보다 먼저 대련장에 서서 대기했다· 그리고 몇분 지나지 않아 그녀의 상대 파벨라도 대련장에 들어섰다· 파벨라는 수호목 앞에서 만났던 바로 그 여자였다·
다만 수호목에서 마주했을 때와는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지금은 그저 이터니아에서 흔히 보이는 학생들과 다를 게 없었다· 외형은 같았지만 꼭 다른 사람이 대련장 앞에 선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파벨라 또한 루나와 똑같이 머리를 묶은 상태였다·
루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상한 건 파벨라 또한 루나를 보며 같은 감정을 느낀 듯한 것이었다·
파벨라의 눈빛이 동요가 깃든 것을 루나는 감지해냈다·
이는 대련을 앞둔 긴장이나 수석 후배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감정의 밀도가 진했다·
파벨라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거··· 뭐야?”
파벨라의 시선은 중심이 잡히지 않았기에 정확히 무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동요의 크기는 예민한 감각을 동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풀었다·
“네가··· 네가 그걸 왜····”
파벨라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따사로운 늦봄의 날씨에도 초겨울 같은 공기가 루나의 목덜미를 스쳤다·
곧이어 관중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한기는 비단 루나만이 느낀 것이 아니었다· 이 공간을 공유하는 모든 이들이 계절에 맞지 않는 기온의 변화를 감지한 것이다·
하늘엔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루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이 조교가 대련 시작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
제니아는 대련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음에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장 헤일리가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뭘 그렇게 봐?”
“이거 이상해· 이럴 수가 없는데?”
“뭐가· 그냥 비구름이잖아?”
“아니야· 저건··· 그냥 비구름이 아니야·”
“그럼 뭔데?”
“눈구름·”
제니아가 여전히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눈구름이 왜?”
“이터니아는 원래 눈이 올 수 없는 곳이야· 고대 마법으로 겨울이 올 수 없게 만든 곳인데····”
제니아는 평소답지 않게 심각해져 있었지만 헤일리는 마법에 관한 지식이 깊지 않았기에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심각성을 못 느끼던 헤일리는 순간 입가에서 김이 나오는 걸 보고는 변화를 체감했다·
“어···?”
곧이어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하나씩 내리기 시작했다·
이터니아에서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좀처럼 볼 수 없던 눈이었다·
관중들은 눈이 내리는 것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나머지 대련에 집중을 못했다·
루나가 황소만한 몸집의 늑대 무리를 주위에 현현시키고 나서야 그들은 다시 대련장에 눈을 돌렸다·
“거기 정신 팔 때가 아니야·”
헤일리가 제니아를 툭툭 치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루나의 주력 정령 중 하나인 바람의 늑대들이다· 각각의 개체들이 일반 마법사들은 삼십분도 못 버틸 마력을 소모하지만 루나는 어떤 비밀을 갖고 있는 것인지 몰라도 이들을 일상에서까지 쉽게 불러냈다·
이터니아에서 졸업을 앞둔 학생들 일부가 때때로 상급 정령과 계약을 하곤 했지만 루나처럼 어린 나이에 이처럼 많은 수를 다루는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 몇몇 학생들은 상급 정령을 처음 목격하고는 감탄을 내지르기까지 했다·
“제니아 너한테는 저 둘 다 마법부 후배들이잖아· 파벨라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사실 그녀는 헤일리나 제니아마저도 상대하기 어려운 부원이었다· 사교성이 그리 좋지도 않았고 주변 사람들의 눈에 띄는 걸 선호하지도 않았다· 깊게 친해지지 않고 그냥 서로 협조하는 선후배 관계로만 있을 뿐이었다·
약혼자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약혼자의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얼 하는지도 어디에 지내는지도 모른다· 파벨라는 자기 역할에 충실한 소녀였다·
교류가 많이 없었기에 파벨라의 전력이 정확히 어느정도인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루나는 오래 지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늑대들이 먹잇감을 포위하듯 파벨라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늑대들이 그녀 주위를 둥글게 뛰기 시작하자 기류가 요동치더니 순식간에 회오리가 만들어졌다·
제니아가 혀를 차며 말했다·
“루나 저 꼬맹이가 봐주면서 하네·”
“그래?”
“응 정령을 상대하려면 마압으로 기선제압을 하거나 같은 정령을 쓰거나 아니면 계약자의 본체를 쳐야하는데 파벨라가 어떻게 하겠어· 대마법사가 아닌 이상 마압은 말도 안 되고 정령은 못 다루고 본체를 치기엔 정령 호위도 만만치 않고· 승부가 뻔하니까 적당히 저항 불능으로 만들고 끝내려는 거 같아·”
“음····”
가만히 지켜보던 중 헤일리는 재채기를 했다·
“에 엣취!!!”
그녀도 모르는 사이 한기가 한겨울처럼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서리바람이 강하게 불어 눈조각들이 정수리가 아닌 옆볼을 때려댔다· 어깨와 겨드랑이가 드러나는 얇은 옷을 입었던 헤일리가 두 팔로 몸을 감싸고 말했다·
“미친 이거 왜 이래· 이것도 루나라는 애 능력이야?”
제니아는 바로 부정했다·
“그럴리가· 고대 마법을 뚫고 그게 됐으면 걔가 교수해야지·”
파벨라는 바닥의 흙먼지를 머금고 솟아난 회오리 속에 갇혀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끝나는 걸까·
잠시 뒤 파벨라가 모습을 천천히 드러냈다·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파벨라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다·
도리어 무슨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회오리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관중석의 학생들이 전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어떻게 한 거지?”
“저걸 어떻게 버텨? 최고급 아티팩트라도 숨기고 있나?”
제니아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먹구름이 더 짙게 껴서 대낮 시간대임에도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바람도 점점 매서워져서 마치 북부에 온 것처럼 살같이 얼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서 학생들은 이상을 감지한 듯이 크게 동요했다· 관중석에서 떠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제니아는 직감했다· 분명 뭔가가 잘못 굴러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곧이어 이상현상이 연달아 발생하기 시작했다· 원형의 관중석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무너질 것처럼 기이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파벨라의 반격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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