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6
루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내 쪽으로 기울인 몸을 다시 원위치로 돌렸다· 그리고는 안절부절하며 서성이다가 출구쪽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다시 생각이 바뀐 듯이 몸을 돌려 내 침상 옆에 놓인 간병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무것도 안 했어·”
뭐 했냐고 먼저 묻지도 않았는데 루나는 뭔가 찔리는 듯한 기색이었다·
“여기 계속 있었던 거야?”
“아니··· 응 그러니까··· 여기서 간병하고··· 있었어·”
“방금 그건····”
“자면서 희미하게 무언가 말하길래··· 들으려고·”
“내가 뭐라 그랬는지 들었어?”
“그냥 자 잠꼬대···였어·”
뭔가 놓친 게 있는 것 같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루나는 가끔 덤벙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내게 이상한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다 여기 이러고 있어도 괜찮은 거야? 우리는 그렇게 친한척 하면 안 되잖아·”
그것도 그렇고 이 밤까지 루나는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걸까· 그 지루한 시간을 말없이 그냥 견딘 건가?
루나가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날 구해준 사람인데···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안 좋게 볼 거야·”
“···그래 이 기회에 친해졌다고 하면 의심할 일은 없겠네·”
“나도··· 그 생각 했어·”
지금 보니 그녀는 아직도 손수건 리본을 풀지 않고 있었다· 제법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문득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부탁했던 것이 어떻게 됐나 물었다·
“올리비아 선배는··· 어떻게 됐어?”
“잘 해결될 것 같아· 아이들이 공국의 대사를 루스커스 선배한테 안내해줬어·”
특별한 일을 부탁한 건 아니었다· 루나의 정령들이 루스커스와 올리비아의 개인적인 접선 장소를 찾아내고 공국의 대사를 그 곳에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이제는 가문의 명예까지 실추될 상황에 처하게 됐으니 더는 함부로 손을 놀리지 못하겠지· 공녀의 옆자리는 영원히 물건너 갔을테고·
루나는 모든 게 잘 해결 됐다는 것처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의도한 대로 그 폭력범을 현장에서 직접 맞이한 모양이었다·
“올리비아 선배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 루스커스 선배는 조만간 징계 위원회에 회부될 거야·”
나도 모르게 목에 힘을 주고 있다가 그녀의 말을 듣고는 긴장을 풀었다·
“그런데 루나 시간이 늦었는데 안 들어가봐도 돼?”
관통상을 입으면 수복 치료를 받더라도 조직이 하루만에 낫지는 않기에 하루는 꼼짝없이 안정을 취해야 했다· 그 덕에 나는 지루하게 병상에 누워지내야 했지만 루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괜찮아· 기숙사에 돌아가면··· 또 혼자 있어야 돼·”
내가 무심했구나· 루나의 기숙사도 따로 격리되어 있으니 돌아가면 혼자가 되는구나·
“그럼 같이 쿠키 먹을래?”
나는 침대 옆 협탁에 두었던 헤일리의 쿠키 상자를 집어들었다·
“좋아····”
그런데 가만보니 그 옆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상자가 하나 더 있었다·
“이건 못 보던 건데 이건 루나 네가 두 거야?”
“아니··· 그건 내가 오기 전에도 있었어·”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사탕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누가 놓은 것인지 이름이 적혀있지는 않았다· 내가 잠든 틈에 다녀갔다는 건데 내용물을 보니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다· 설마 내가 사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두고 간 건 아니겠지· 혹시 세실인가·
“왜···그래?”
“아무것도·”
***
더 늦어지기 전에 루나를 보내고 나는 홀로 밤을 보냈다·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해결했지만 아직 생각할 거리들이 있었다· 세실과 관련해서 트리샤를 심문해야 할 것도 있고 내 인챈트 소드를 부러트린 목검과 관련해서 알아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예지몽인지 뭔지 모를 의미심장한 꿈도 마음에 걸리고·
그리고 대련 평가보다 무시무시한 일정이 어느덧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이터니아는··· 무도회 행사를 보름 정도 앞두고 있다·
생각만 해도 진땀이 흐른다·
참 잔인한 행사다· 파트너를 구해서 무도회장에서 공개적으로 춤을 춰야 한다니·
실베린에게 속성으로 춤을 배우긴 했지만 내가 배운 리듬이 아닌 다른 템포의 곡이 나오면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실베린과도 춤추며 발을 열 번 정도 밟은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 무도회에서도 속수무책으로 잔뜩 실수할 게 뻔했다·
거기에 가장 큰 문제는 파트너 선정이었다·
파트너 선정은 남학생이 나서서 하는 게 전통이었다·
사실 어느 문화권에 가도 여자가 먼저 신청하는 경우는 드무니까 이 부분은 받아들여야 했지만 문제는 내가 직접 파트너를 골라야 한다는 거였다·
누구를 정해야 할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베린이 있었다면 나는 남 시선 신경 안 쓰고 한치의 망설임 없이 실베린에게 청탁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곳에 없다· 비비 공녀가 이터니아 학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와는 어렵지 않게 춤사위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보다 더한 일도 함께 했으니 말이다·
곤란하게도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그 둘은 너무도 멀리 있다·
손으로 허리를 감싸야 하는 신체 접촉이 요구되니 루나와는 버거울 것 같고·
트리샤는··· 솔직히 매일 얼굴을 보며 지내야 하는 입장에서 진지하게 눈을 마주하고 스텝을 맞출 자신이 없었다·
제니아나 헤일리 같은 미술부 선배라면 부담감은 확실히 덜할 것 같긴 하다· 다만 그 둘이 내 신청을 승낙해줄지가 문제였다· 그 둘에게 다른 파트너가 있을지 어찌 알겠나·
아침이 되자 간호 담당 메이드보다 먼저 트리샤가 문을 불쑥 열고 들어섰다·
“데미안!!”
그녀는 손에 커다란 바구니를 이고는 내 앞에 다가와 앉았다·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바보 친구 생각해서 내가 간식거리 가져왔지!”
트리샤가 바구니를 내 배 위에다 올리고는 덮개를 열었다· 그 안에는 말린 과일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어때· 잘했지·”
“그···래 잘했네·”
“내가 먹여줄까?”
트리샤는 약간 신이 난 듯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왜? 부끄러워?”
“···부끄럽다고?”
“자! 내가 먹여줄게· 아!”
트리샤가 냅다 말린 과일을 내밀자 나는 떨떠름하게 이를 받아먹었다·
그녀는 깨작거리며 먹는 내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뭘까 이 위화감은·
트리샤를 주로 챙겨주는 건 내 역할이었는데 그게 역전되어서 그런 걸까·
나 몰래 또 무슨 사고라도 쳤나? 왜 갑자기 잘해주는 것 같지·
“트리샤 너····”
“아! 맞다· 칸디넬라 교수님이 오늘 너 좀 보자고 하셨어·”
“···그래·”
“데미안 너 어제 너무 사고를 많이 쳐서 자꾸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너에 관한 걸 물어봐· 그래서 너무 피곤해!”
“···고생이 많네·”
“그러게 아무대나 몸을 막 던지면 어떡해!”
“막 던진 건 아닌····”
“몰라! 나 수업 받으러 가야 돼! 간다!”
트리샤는 시종일관 내 말을 끊고는 자기 할 말만 쏟아냈다·
그러곤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자리를 떴다·
“····”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
똑똑·
나는 칸디넬라가 있는 교수실 문을 노크했다· 칸디넬라 미술부의 조르지아 교수 다음으로 자주 만나는 교수가 아닐까 싶다·
“들어와·”
내가 교수실 안으로 들어서자 집무를 보고 있던 칸디넬라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가면돌이 왔구나·”
“···따로 보자고 하셔서 찾아왔습니다·”
“그래 그래 앉아·”
내가 응접용 소파에 앉자 그녀도 내 앞에 착석했다·
“미술부는 어때· 지낼만 해?”
“좋습니다·”
“트리샤랑은 어때·”
“아무 문제 없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어?”
“어떤걸요?”
“트리샤랑 어떤지·”
“제일 가까운 친구입니다·”
“음··· 다른게 아니라 먼 나라에 트리샤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들이 트리샤가 어떻게 지내는지· 제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어해·”
평상시엔 잊고 있던 사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트리샤는 그 누구보다 귀한 사람이라는 걸·
“많이 친해지면 안 좋은 겁니까?”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반대야· 많이 친해지면 좋아· 그 사람들은 트리샤가 상처받고 삐뚤게 성장하는 걸 원하지 않거든·”
“가끔 이해 못할 행동을 해도··· 트리샤는 나쁜 애는 아닙니다·”
갑자기 이런 걸 묻는 이유가 뭘까· 트리샤가 갑자기 잘해주는 거랑 관련이 있을까·
“그래· 잘 됐네· 어제 각각 기숙사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학업 적응 평가를 했었거든· 간단한 설문 같은 건데 트리샤는 가장 친한 친구로 널 적었어·”
“저도 해야 됩니까?”
“너는 잘 적응하는 거 같으니까 굳이 할 필요는 없어· 그런데··· 잠시만·”
그녀는 책장에서 서류를 꺼내오고는 잠시 뒤적거리며 말했다·
“데미안 너랑 관련된 것 중에 미심쩍은 게 있어서 말이야·”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가장 친한 동기 또는 선후배가 누구냐는 물음에 너라는 답을 한 아이가 열다섯 명이야·”
“···네?”
“네가 생각해도 그 수치는 이상하지?”
“많이 이상합니다·”
나랑 친한 인물들이라 하면 트리샤 루나와 세실 미술부 선배 정도가 끝이다· 그 외의 인물들과는 관계를 맺을 기회가 없었다·
“그래 대부분 그냥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적어둔 거겠지· 그보다 문제는····”
칸디넬라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한숨을 뱉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 애들 대부분이 같이 지내기 어렵고 불편한 친구 항목에 트리샤의 이름을 적었어·”
“····”
“그 문항의 숨은 의미를 좀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가장 싫어하는 학생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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