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7
“대체로 이 항목엔 신분차가 너무 많이 나거나 서로 적대하는 가문 출신을 적곤 하는데 트리샤의 경우엔··· 사적인 감정이 깊게 관여한 듯한 느낌이 든단다·”
“····”
내 표정이 굳어버리자 칸디넬라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손을 휘휘저었다·
혹시 트리샤가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걸까· 나라면 그냥 감당했겠지만 그녀는 워낙에 주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기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트리샤가 괴롭힘 당하는 상황을 상상하니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음 자발적으로 나서준다니 기특하네· 사실 학생의 일에 어른들이 끼어들면 항상 더 악화되거든·”
“····”
“트리샤를 잘 지켜봐 줘· 그리고 혹시 여유가 된다면 세실이랑 시온도 챙겨주고· 둘 다 요즘 상태가 안 좋아보인단다· 그 둘이 학부의 얼굴인데 말이야·”
“세실은 조만간 다시 볼 생각이었는데··· 얼마나 안 좋습니까?”
칸디넬라는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음··· 심적으로 약간 혼란스러운 모양이야· 교수한테 속내를 털어놓는 경우는 없어서 말이야· 네가 가서 이야기 좀 해볼래?”
눈시울을 글썽이던 채로 칼부림을 하던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무슨 일인지는 다시 만나서 확인해야겠다· 세실한테는 받은 게 많으니 보답할 방법도 미리 생각해두고·
“세실은 조만간 만나보겠습니다· 그런데 시온··· 저도 버거울지도 모릅니다·”
“그건 걱정 마· 시온도 널 친구라고 생각해·”
“네?”
칸디넬라가 서류를 뒤적이다 어느 양피지를 하나 꺼내서 내 앞에다 쓱 밀었다·
바로 시온의 적응 평가지였다·
“평가지를 막 보여주면 안 되지만 시온은 제대로 작성한 게 거의 없어서 상관 없을 거야·”
그녀는 참 비협조적으로 평가에 임한 모양이었다· 문항이 제대로 체크된 게 하나도 없었다·
“다른 건 볼 필요 없고 마지막 문항을 확인해볼래?”
“···?”
마지막 문항은 가장 친한 동기나 선후배에 관한 것이었다·
“시온이 거기다 네 이름을 적었더구나· 엄밀히는 조금 다른 사람이지만·”
시온이 적은 건 내 본명도 아닌‘사탕이’였다·
말문이 턱 막혔다· 얘는 적을 사람이 없어서 날 적었나· 시온과는 친구라 하기 애매할 정도의 관계다· 사적인 교류나 접촉이 사실상 거의 없었으니까·
이걸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시온은 친구가 없다·
“목격자들이 제법 많아· 그 개차반 성격에 사교성 없는 시온이 사탕이를 만나서 같이 데이트했다고·”
이건 사심이 있는 게 아니라 소드마스터의 수고비를 받고 행해진 거다· 그때 받은 금화는 그때 잔뜩 쓰고도 아직도 남았을 정도로 상당한 액수였다·
“···정확한 사실은 아니고 말 못할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 귀걸이도 사 줬다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잠깐 장신구점에서 들러 시온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혹시 마스터스 클래스는 감시라도 받는 겁니까?”
“무심하구나· 넌 시온이 네가 사 준 귀걸이 매일 끼고 다니는 것도 모르니?”
“····”
사실 가까이서 마주한 적이 거의 없어서 잘 모르겠다· 내가 줬을 때는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이었는데 이제 마음이 바뀐건가·
칸디넬라가 이상하다는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가만보면 기쎄고 성깔 있는 애들이랑만 노는 것 같기도 하고···· 네가 느끼기에도 그러지 않니?”
“····”
사실 엄밀히 말해서 내 주변 인간 관계의 대부분은 타의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심지어 내게 가장 소중한 실베린과의 관계도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맺어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관계는 루나와 비비 정도가 다다·
***
나는 칸디넬라 교수와의 면담을 마치고 사탕이의 모습으로 세실에게 스티치들 보냈다·
그녀의 답장을 받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 시계탑에 있었어·]
이상하게 글씨가 발로 쓴 것처럼 삐뚤빼뚤하고 엉망이다· 세실의 필체는 원래 명필가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상태가 안 좋다는데 정말 괜찮은 걸까· 지금도 그 칼부림을 하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혹시나 옷차림에서 실수한 게 있나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시계탑 마법 승강기를 타고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시계탑 승강기가 최상층에 다다르자 난간 끝자락에 주저앉은 세실의 등이 눈에 들어었다·
그녀의 웨이브가 들어간 흑갈색 머리카락이 맥없이 바닥까지 늘어져 있었다·
“세실·”
그녀는 내 부름을 듣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이제 보니 그녀의 손에는 와인병이 쥐어져 있고 입술엔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볼에는 홍조가 진하게 돋아났고 눈은 반쯤 풀려 있었다·
세실은 늘 어른스럽고 소녀 가장스런 성숙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아버지의 술창고를 몰래 털어온 꼬마처럼 보였다·
“사타앙이·”
그녀는 나지막히 부르고는 자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격하게 쾅쾅 쳐댔다·
이번 세실과의 대면은 쉽지 않게 굴러갈 것을 직감했다·
그녀의 옆에 다가가 앉자 진한 포도주 향이 훅 풍겨왔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그-으냥 술이 마시고 싶어서· 여기가 몰래 마시기 좋은 곳이고·”
“그래 발 헛디뎌서 사고나기 좋은 곳이기도 하지·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안 좋은 일? 우-우리 동기들 중에서 가장 재수없고 인기 많은 애한테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고 옷을 딸꾹 벗기려 들었는데 맨정신으로 있을 수 있겠어?”
“데미안?”
“···흥·”
“걔가 신경쓰여?”
세실이 돌연 고개를 휙 돌려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넌! 데미안을 신경쓰는 내가 신경쓰여?”
“신경쓰이지· 질 안 좋은 녀석이랑 어울리는 건데·”
“그럼 좀 잘 해주지 그랬어? 나 잘생긴 사람 좋아하는 거 알면서 왜 그렇게 안심해? 데미안 그 자식 듣던 거랑 달리 괜찮아 보여서 더 짜증나·”
“그거 유감이네·”
세실은 병나발을 물고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는 내 어깨에 입술에 붙이고는 냅킨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옷에다 입가의 포도주를 닦아냈다·
“그러면 나한테 잘 해· 딸꾹! 너처럼 못생긴 애한테 나처럼 이-쁜 애가 친구해주고 잘해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안 그래?”
“····”
“그 놈의 가면은 왜 그렇게 써서 내 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날 노리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 사람들이 네가 나랑 친한 걸 보면 널 괴롭힐 수도 있어·”
세실이 병나발을 물고 다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 나도 위험을 감수한만큼 톡톡히 한 몫 챙길 거니까 걱정 마·”
“····”
“내가 장부에 다 기록해놨어· 너한테 해준 거· 서리 바람 폭탄에서부터 이상한 연구문 해독에 아티팩트 가공까지 전부 빠짐없이 적어놨어· 나 이거 다 받아낼 거야· 각오해·”
“다 갚을 거야· 걱정 마·”
세실은 내 가면의 입술 부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대며 말을 이었다·
“그게 어디 한두푼인줄 알아? 다 갚는데 한 학기를 쏟아도 모자랄 거야·”
“····”
“근데 특별히 내가- 딸꾹 정을 생각해서 기회를 줄거야· 딱 한 번· 네가 눈치껏 날 감동시키면 다 갚은 걸로 해줄게· 뭐 그동안의 의리를 생각해서·”
“눈치껏?”
“이거 맛없어 너 마셔·”
세실은 문득 정신이 든 것처럼 술병을 내게 떠넘기고는 일어섰다·
“그동안 진 빚을 한 번에 갚을 게 뭐가 있을지 잘 생각해봐· 난 갈거야· 사탕이 너 이제 밉상이야·”
“····”
세실은 날 그냥 두고 비틀거리며 승강기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몸을 휙 돌려서 말을 건넸다·
“아 그리고 이건 나만 알고 있는 건데 이번에는 가면무도회래·”
***
“블랑이 어떻게 했는 줄 알아? 기숙사까지 몰래 들어와서 베스 방 문을 계속 두드렸다는 거야· 자기 파트너 해달라고·”
“거절했는데 왜 자꾸 찾아와? 으 진짜 싫다·”
“그래서 블랑은 이제 징계 받고 마지막 한 번만 실수하면 그대로 정학처분이야·”
“이제 보면 계급도 중요하다니까· 교양있는 집안에서 자라면 정중하게 말할 때 알아듣는데· 평민들은 그걸 몰라·”
“아 아닐걸? 블랑은 작위 물려받지 않아?”
“아 아님 말고· 뭐 블랑은 예외라 쳐도 평민 출신들은 대부분 그랬어· 난 아무리 잘나도 평민 계급이랑은 춤 못 출 것 같아·”
“왜? 결혼할 것도 아닌데 안 될 거 없잖아·”
“자기랑 급이 맞다고 생각해서 들이대면 어쩌려고? 이터니아에서 아무리 잘나봐야 결국 졸업하면 귀족들 밑에서 일하게 될 텐데·”
“그런가?”
“생각해봐· 열린 마음으로 평민이랑 결혼하면 빨래 식사 청소 저택관리 이거 전부 자기 손으로 해야 돼· 그거 감당 가능하겠어? 맨날 냇물에서 속옷 비비적 거리는 거 할 수 있겠냐고·”
“돈으로 고용하면 되잖아· 졸업하면 그게 문제겠어?”
“그래 돈을 벌겠다고 고용주를 따라 먼 오지로 넘어갈 수도 있고 거기다 우리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결국 집안의 돈을 끌어다 와야겠지·”
“난 그나마 평민이라도 빅터나 데미안이면 고민 해볼 것 같은데·”
그곳에 있던 여학생들이 일제히 깔깔 웃어댔다·
“데미안이면 조금 고민은 해 봐야지·”
“우리가 춤신청 받아주면 데미안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아? 계급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춤동작이나 예법 모르는 거 하나하나 가르쳐줘야 하는데· 무대에서 스텝 엉키면 얼마나 쪽팔린지 아냐구·”
트리샤는 무용부 의상실 문 앞에 가만히 서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잠잠히 듣고 있었다·
여기서도 데미안의 이야기를 한다· 대련 평가 전까지만 해도 이정도로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았었다·
말소리가 잠시 잦아들때 쯤 그녀는 문을 노크했다·
똑똑·
“누구지? 들어와!”
트리샤는 문을 열고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무용부의 여학생들이 트리샤를 보고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녀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왜 왔어?”
“연극부 의상 빌려가신거 찾으러 왔어요·”
“아 그거?”
한 무용부 여학생이 바구니를 가져오고는 옷을 휙휙 던지며 거기 담아냈다·
“야! 빌린 옷 다 여기다 넣어!”
다른 학생들도 설렁설렁 와서는 옷들을 휙휘 던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구니를 가득 채워졌다·
“연극부 부장님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소녀 한 명이 들기 버거워 보일 정도로 양이 많아진 상태였다· 트리샤는 별다른 앓는 소리 없이 말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트리샤는 어렵사리 바구니를 들어 안고는 낑낑대며 문을 나섰다· 그녀의 뒤통수에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렇게 웃는지는 몰랐지만 마치 그녀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