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0
나와 함께 캠퍼스 정원을 거닐던 올리비아는 내게 몇차례 되물었다·
“춤?”
“네·”
그녀는 허공에 몸을 슥슥 움직이며 춤추는 시늉을 했다·
“그 춤 말하는 거야?”
내게서 춤 지도를 부탁받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맞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눈을 위로 치켜뜨고 생각에 잠겼다·
“가르쳐··· 줄 수야 있는데 난 엄밀히 약혼자가 있는 신분이라 당장은 곤란해·”
“····”
“돈 많이 벌고 파혼하고 독립한 뒤에는 가능한데 그 때는 많이 늦겠지?”
“네·”
“음···· 그리고 내가 아는 건 남부 쪽 템포가 빠르고 엄청 흔들어대는 춤 밖에 없어· 남자가 배우기는 쪼금 힘들 거야·”
아 올리비아는 남부쪽 사람이니 문화적인 차이도 제법 크겠구나·
“그럼 어쩔 수 없겠군요·”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직접 가르쳐주는 거 말고··· 사람을 소개해줄 수는 있어· 이쪽에는 되게 정통한 애가 있거든·”
“그쪽이 시간을 내줄 만큼 적극적일까요?”
“물론이지· 나랑 굉장히 친한 애니까 내가 부탁하면 들어줄거야· 그리고 걔도 너한테 관심이 없진 않을 걸?”
“그렇다면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올리비아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붙들어 매고 딱 기다려· 너도 보면 조금 놀랄 거야· 걔 진짜 진짜 이쁘거든· 여자인 내가 봐도 애간장이 녹는다니깐·”
그녀의 말이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지만 일단 믿고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올리비아는 돌연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꺅!”
“···?”
“아··· 씨 깜짝이야·”
그녀의 시선이 향한 풀숲에는 또 루나의 늑대 정령이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동글동글한 눈매에 기분좋게 혀를 내밀고 헥헥대는 걸 보면 적의는 없는 게 분명했다·
루나의 정령이나 내 정령이나 이터니아의 드넓은 캠퍼스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요즘 자주 마주치는 게 기분이 묘하다· 혹시 루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
리허설이 끝나고 트리샤는 대본을 더 공부하느라 뒤늦게 탈의실로 돌아왔다· 의상실에는 부원의 이름표가 붙여진 목재 트렁크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트렁크 앞에 서서 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평상복을 꺼냈다·
지친 얼굴로 양말과 치마를 꺼내 걸치고 마지막으로 상의를 꺼내는 순간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곱게 접어둔 갈색 양피지였다·
기억을 돌이켜 봐도 트렁크나 주머니에 저런 쪽지를 접어넣은 적은 없었다·
여자 탈의실이니 남자가 들어올 수는 없으니 동기나 친한 언니일 가능성이 컸다·
그녀는 쪽지를 들어서 천천히 펴보았다·
거기엔 날카롭게 휘갈겨 쓴 비아냥이 담겨 있었다·
[뭘 믿고 그렇게 나대?]
트렁크 안에는 또 다른 쪽지가 있었다·
그것도 들어서 펴보니 이전과 별발 다를 것 없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니랑 데미안이랑 하나도 안 어울려· 그만 집적대고 꺼져·]
[멍청한 년]
“····”
데미안과의 관계를 질투하는 듯한 악의적인 메시지였다· 누가 쓴 것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순간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코 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녀는 꾹 참았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그녀의 주머니에 누군가 몰래 넣어둔 적이 있었다·
연극부의 누군가가 그녀를 증오하고 있는데 문제는 표면적으로 안 좋게 지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다니면서 뒤에서는 더러운 짓일 일삼는 것이었다·
누가 넣은 걸까· 친한 언니? 아니면 주연 배역을 위해 경쟁하는 동기? 친구?
적대하지는 않지만 친분도 없는 금발의 정령사를 잠시 떠올렸지만 트리샤는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아무리 데미안을 공유하는 사이라 해도 루나는 그럴 만한 추잡한 인간은 아니었다·
트리샤는 옷을 마저 걸치고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리허설이 끝난 무대 앞쪽에는 연출가와 작가를 위한 테이블에 놓여 있었는데 루나가 홀로 남아 기름등을 피우고 책을 읽고 있었다·
트리샤는 성큼성큼 걸으며 출구쪽으로 걸어갔다·
루나는 새침한 얼굴로 그런 트리샤를 대놓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굴러가는 게 여간 거슬렸던 트리샤는 나가려다 말고 휙 돌아서서 소리쳤다·
“야! 금발!!”
“····”
“왜 자꾸 쳐다봐!”
루나는 표정 변화 없이 고양이 같은 눈망울을 깜빡이고는 아무런 대꾸도 안하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
나는 일과와 수련을 마치고 가시정원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 땀에 젖은 셔츠의 단추를 풀던 중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내 침대엔 트리샤가 제 방이라도 되는 것마냥 자리를 잡고 드러누워 있었다·
“나 옷 갈아 입어야 돼· 나가·”
내 요구에도 트리샤는 들은척도 안 하고 가만 누워서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조용하다·
그녀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묘하게 다른 것 같아서 다시 물었다·
“트리샤·”
적응 평가지에 트리샤의 이름이 적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왠지 모르게 트리샤를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
이렇게 평소보다 가라앉은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응·”
“아카데미에서 혹시 너한테 안 좋게 대하는 사람 있어?”
트리샤는 여전히 천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잠시 침묵해 있다가 말했다·
“아니· 그건 왜?”
“무거운 짐을 혼자 나르고 있는 거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
“연극부에서는 아무 문제 없어· 문제가 생겨도 이쁘고 착한 내가 참아야지·”
“참는 게 능사는 아니야·”
“근데 진짜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데미안 넌 어떻게 할 거야?”
“그 자식은 반쯤 죽여버리고 넌 연극부에서 빼다 미술부에 넣어버려야지·”
트리샤는 잠자코 있다가 이불을 살짝 들어올려서 자기 얼굴을 반쯤 가려버렸다· 그리고는 눈을 돌려 날 곁눈길하며 말했다·
“바보야· 그러면 어떡해· 나 연극부에서 얼마나 잘하는데!”
트리샤의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조금 과장되게 말하기는 했지만 내 진심도 어느정도 섞여 있었다·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한들 당장 조치를 취하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트리샤의 편이고 그녀가 이를 알았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별일 없다면 다행이네·”
“응!”
트리샤는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내려와 벌떡 일어났다·
“난 올라가서 잘게! 데미안 너도 푹 쉬어!”
그러고는 방을 나서더니 계단을 우당탕 소리가 날 정도로 요란하게 올라갔다·
그녀는 다시 평소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
이터니아의 시계탑 종이 울리자 그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올리비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인가?”
그 옆에서 원소 마법 서적을 품에 안고 난처한 듯이 발을 구르던 한 소녀가 말했다·
“언니 이러시면 조금 곤란해요·”
“잠깐이면 돼·”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한테 어떻게 춤을 가르쳐요·”
올리비아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소녀를 붙잡았다·
“기다려 봐· 보고나서 판단해·”
“죄송해요 언니 저 수업 준비 때문에 먼저 가볼게요·”
“기다려 릴리트!”
올리비아는 도망치려는 릴리트의 팔뚝을 붙잡았다·
“얘 왜 이렇게 달라졌어? 전에는 그래도 적당히 상대는 해주고 친절하게 대해줬잖아·”
“···이제는 안 그래요·”
“나를 봐서라도 한 번만 만나 줘· 너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선배도 아시잖아요· 저는 잘 모르는 사람하고는 춤 추지 않아요· 그리고··· 최소한 누구인지는 알려주셨으면 해요·”
올리비아는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저었다· 무작정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릴리트는 점점 인내심이 고갈됐다·
“선배!”
릴리트가 최후통첩을 던지려는 순간 올리비아가 한곳을 보며 소리쳤다·
“여기야 여기!”
그녀가 반갑게 손을 흔드는 곳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선 릴리트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어버렸다·
상상도 못한 인물이었다·
올리비아는 데미안을 불러들이고선 릴리트에게 소개했다·
“여기는 데미안 그리고 이쪽은 내 친한 후배 릴리트·”
올리비아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본 채로 굳어 있었다·
특히나 릴리트는 봐선 안 될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사색이 된 상태였다·
“릴리트?”
올리비아가 슬쩍 건드리자 릴리트는 굳어버렸다가 안고 있던 책을 툭 떨어트려버렸다· 그녀는 곧장 책을 다시 집고는 이름을 재차 확인하려는 것처럼 그를 불렀다·
“데미안· 데미안·”
올리비아는 그 둘의 부자연스런 모습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둘이 아는 사이야?”
그러자 데미안이 말했다·
“저와 같은 미술부 동기입니다·”
“어? 그럼 둘이 잘 알겠네?”
“아뇨· 사실 친해질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번이 처음 대화하는 것일 겁니다·”
릴리트의 기억에도 그랬다· 데미안은 늘 릴리트에게 말이 없었다· 그리고 릴리트는 거기에 굳이 부연을 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데미안에게 직접 물었다·
“춤을··· 배운다고?”
데미안은 잠시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응·”
릴리트는 자기도 모르게 팔에 힘을 꽉 주어 교재를 끌어안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면 일과를 다 끝내고 저녁 일곱 시까지 시계탑 앞으로 와·”
그녀는 그렇게 아무런 협의 없이 통보를 날리고는 휙 돌아서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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