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1
올리비아는 릴리트의 뒷모습을 보며 예상했다는 듯이 픽 웃었다·
“저럴 줄 알았다니까·”
“왜 그러십니까?”
“안 된다고 안 된다고 얼마나 빼던지· 근데 너 한 번 보고는 바로 승낙하는 거 봐·”
“···내내 거절하던 애를 부르셨던 겁니까·”
“결국엔 승낙할 걸 알았으니까· 너는 이터니아에서 친해지기 참 어려운 애거든· 얼마전에도 내 동기 몇명이 너랑 어떻게 알게됐냐고 캐묻더라니까?”
“대련 평가 이후로 얼굴이 좀 알려진 모양입니다·”
“그래 둘이 같은 미술부라면 말이라도 나눠봤을 줄 알았는데 안 친한 건 의외네·”
“릴리트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하고 친분이 없습니다·”
“릴리트는 사교성 좋으니까 괜찮을 거야· 걔 인기 많은 건 알지? 오다가다 남자애들이 메리골드관에 릴리트 한 번 보겠다고 기웃거리는 거 봤을 거 아니야·”
“몰랐습니다·”
메리골드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남학생들을 몇 보긴 했지만 그냥 친구를 기다린다고 생각했을 뿐 다른 목적이 있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릴리트를 보려고 서성이던 거였단 말인가· 조금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뭐 그래 아무튼 춤에 관해선 릴리트만한 애는 찾기 힘들 거야·뭐 하나 부족한 거 없는 집안에서 엄하게 자랐으니까·”
그건 그렇고 릴리트가 춤교습 부탁을 수락한 이유는 뭘까· 단순히 미술부 동기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내게서 뭔가 얻어낼 게 있다고 판단한 것일지도·
단순히 호의라고만 여긴다면··· 그건 순진한 생각이겠지· 뭐 그녀가 제공하는 교육의 가치만큼 나도 그 대가를 지불할 의향은 있었다·
앞으로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교회 자리에 참석하게 될 일이 제법 빈번할텐데 그쪽 세계의 예법과 룰을 배워둘 필요가 있다·
“우선 사람을 소개해주신 점 감사합니다·”
올리비아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아냐 네가 해준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간다! 이왕 알게 된거 친하게 지내!”
그녀는 그렇게 말을 남기곤 다음 수업을 위해 홀연히 떠났다·
그렇게 홀로 시계탑에 남겨진 와중에 내 옆에 무언가가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틈에 루나의 정령이 내 옆에 와서는 평소처럼 혀를 내밀고 앉아 있었다·
“···?”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걸까· 그리고 왜 내 주변을 떠도는거지?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떠나가는 올리비아를 가만 바라볼 뿐이었다·
***
연극부의 작가 중 한 명인 2학년 폰타나는 리허설이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객석 중간 쯤에서 종이를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있는 루나를 바라보았다·
폰타나는 루나가 앉아 있는 객석 중간열까지 살금살금 올라갔다·
루나는 불빛을 내는 작은 참새 정령을 어깨에 얹어 놓고 무표정한 얼굴로 한 편지를 읽고 있었다·
“루나!”
그녀가 부르자 루나는 화들짝 놀라 편지를 휙 접어버렸다·
“···선배·”
“뭐하고 있었어?”
“편지···읽고 있었어요· 가문에서 온····”
“가문? 레일리스 가문 말하는 거야?”
“네·”
레일리스 가문은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유서깊은 명문가였다· 정령왕과 관련된 발라드나 동화에서는 늘 레일리스 가문이 언급될 정도로 루나의 선조가 쌓은 업적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참 신기해· 나랑 같이 연극을 만드는 후배가 레일리스 가문의 딸이라니·”
“····”
“태어나보니 아빠가 레일리스 가문의 가주면 대체 어떤 기분이니?”
“아무 느낌 없어요····”
“그래 너는 너무 익숙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지· 근데 편지는 뭐라 적혀있었어? 표정이 너무 심각하길래·”
“···대련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냐고 묻는 거였어요·”
“그게 다야? 얼굴이 너무 안 좋아서 학교 그만두라는 말을 들었나 싶었다니까·”
“심각한 말은 없었어요····”
“그럼 왜 그런 건데?”
루나는 잠시 입을 닫고 침묵했다· 폰타나는 루나의 얼굴을 보며 속내를 읽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무도회 때문이구나· 남자랑 춤 추지 말라 그랬네· 맞지?”
루나 잠시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뻔해· 집안이 좀 엄격한 애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꼭 자기 수족처럼 통제하더라고· 어른들은 다 아는 거지· 춤이 얼마나 사람을 가깝게 만드는지· 눈을 꼭 마주하고 파트너와 몸의 언어를 나누는건데 눈이 안 맞을 수가 있겠냐구· 에휴 너뿐만 아니라 가문 때문에 춤 못추는 애들 제법 많아· 힘내·”
“····”
“작년에 있던 문예부는 대부분 자유로웠는데 연극부는 가문 때문에 마음고생 하는 애들이 많네· 아! 혹시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었던 거야?”
“···아뇨·”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폰타나의 표정은 묘하게 즐거워하는 듯했다· 은근히 캐묻는 그녀에게 불편감을 느낀 루나가 말했다·
“잠깐 혼자 생각해도 될까요·”
루나가 다소 차갑게 나오자 폰타나는 곧장 한발 물러섰다·
“그래 기분 별로 안 좋겠구나· 나 잠깐 탈의실에 다녀올게· 마저 정리하고 있어·”
“네·”
폰타나가 떠나고 루나는 다시 숙모의 편지를 집어들었다· 오랜만에 날아온 친족의 편지· 그 속에 담긴 건 사실 폰타나에게 말했던 거와는 다른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루나는 착잡해져서 한숨을 쉬었다·
남자와 어울리지 말라는 강요보다 더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이었다·
[루나 이터니아에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고 들었단다· 이제 봄이 무르익고··· 이터니아도 이제 무도회를 앞두고 있더구나· 꼭 마음에 드는 남자아이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 참 궁금하구나· 네가 누구를 선택하든 우리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응원할 거란다·]
편지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무도회에 임하길 권하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눈에 자꾸만 걸렸다·
[우리는 네 파트너가 될 아이를 레일리스 가문의 영지로 꼭 초대하고 싶구나·]
친족들은 루나의 마음 속 상처를 잘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파트너 여부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하지만 무도회 춤 초대· 이 셋 모두 루나에겐 아직 힘에 겨운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트너로 삼고 싶은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긍정적인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마음가는대로 할 수 없다· 춤은 반드시 남자가 신청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나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둑어둑해진 때에 시계탑 앞으로 향했다·
약간은 쌀쌀해진 바람이 불었다· 다들 기숙사에 들어간 시각이라 시계탑 주변은 인적이 없고 한산했다·
그렇게 십여 분쯤 혼자 서 있으니 긴 머리의 여자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릴리트는 단색의 민소매 원피스를 걸치고 차분하게 걸어왔다· 그렇게 나와 다섯 걸음 간격을 두고 멈춰서서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
“····”
그녀는 기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인사조차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부탁하는 건 내 쪽이니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시계탑으로 오라고 한 이유가 있어?”
“···난 시계탑 앞이 좋아· 누가 약속에 늦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잖아·”
시계탑을 좋아하는 걸 보면 얘도 세실과인가· 전에 동행했을 때는 그런 성격 같지는 않았는데·
“여기는 춤 추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닌 것 같은데·”
릴리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나는 우선 릴리트의 목적에 대해 물어보았다·
“근데 올리비아 선배의 부탁을 왜 수락했는지 물어봐도 될까?”
“대단한 이유는 없어· 너한테 빚을 지워두면 유용할 것 같으니까· 너 좀 유명하잖아· 단순히 호의가 아니란 것만 알아둬· 날 속물로 봐도 상관없어·”
기억 속 흐릿했던 릴리트에 대한 이미지가 점차 선명해진다·
괜한 수를 부리지 않고 솔직하게 내뱉는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아니면 입학 이후에 바뀐 건가· 이렇게 나와주는 게 내 입장에선 훨씬 편하다· 어릴적 알고 지내던 그 회색머리 여자애와 비슷하게 행동했다면 많이 거슬렸을 것이다·
확실하게 가르쳐준다면야 대가는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고 문제될 건 없다·
“그래 교습은 어디서 할 거지?”
릴리트가 돌연 난감하다는 듯이 내게 따졌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네가 구해둔 곳은 없어?”
“사람들 시선에서 떨어진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겠지·”
그러자 릴리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구두를 신고 움직이기 편해야 돼· 내 옷을 더럽히는 산속도 안되고· 풀밭도 싫어· 무엇보다 음악이 있어야 해·”
“그냥 입으로 박자를 맞추면 충분하지 않아?”
릴리트는 내 시선을 피하고 손으로 머리를 빗으며 말했다·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데 무슨 음악인지도 모르는 게 말이 될 거라 생각하니· 뭐 당장은 필요 없겠지만· 제대로 배운다면 꼭 필요한 거야·”
“····”
춤도 까다로운 조건이 요구되는 거구나· 이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전문 음악가를 따로 고용해야하는 건가·
“보아하니 아무런 계획이 없었던 모양이네· 뭐 기초 단계에선 입으로 박자를 맞춰도 되겠지·”
그녀는 내 쪽으로 한발짝 다가와서는 마저 말을 이었다·
“조용하고 사람들 시선이 안 닿는 곳으로 데려다 줘· 어디든 좋으니까 네 마음대로 해·”
그리고는 손을 내쪽으로 살짝 내밀었다· 마치 자신을 에스코트 해달라는 것처럼·
뭘 하든 간에 시계탑 앞은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
해가 다 저문 저녁· 루나는 윗드러프관 기숙사 뒤편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기숙사 뒤편의 숲에서 서늘한 산들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냈다·
그 바람에서 무언가를 감지한 루나는 몸을 뒤로 돌렸다·
열 걸음 쯤 떨어진 곳에 새하얀 몸통과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의 맹수가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 짐승은 루나의 앞에 와서는 몸집과 안 어울리게 강아지처럼 얌전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곳에서 정령의 보고를 전해들었다·
정령의 말을 이해한 루나의 눈이 일순 커졌지만 이내 차분함을 되찾고 고개를 가만 끄덕였다·
“괜찮 괜찮아···· 미술부 동기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다른 건 없었어?”
정령의 말을 전해듣던 루나의 표정이 잠시 굳어가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너한테 매번 손인사를 해주고 오늘은 배를 문질러 줬다고?”
“월월!”
늑대 정령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한 번 크게 짖었다·
루나는 순간 힘이 빠져서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얼굴에 열기가 차서 어쩔 줄 몰라 옆 머리카락을 당겨 얼굴을 가려버렸다· 그러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어떡해· 내가··· 눈에 띄지 말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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