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2
릴리트는 귀족같이 정갈한 몸짓으로 내 옆을 걸어가며 물었다·
“춤을 추려는 이유가 뭐야?”
우리 사이에 놓인 어색함의 벽은 아직도 단단했고 그래서 대화가 그리 매끄럽지는 않았다·
“이유?”
“그래· 이유·”
“무도회를 비롯해서 써먹을 데가 많으니까·”
“다분히 실용적이네· 상대는 정해놨어?”
“아직·”
“그래도 마음에 둔 상대는 있으니까 춤을 배우는 거겠지· 안 그래?”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럼 여자는 왜 춤을 추는지 생각해봤어?”
“파트너가 마음에 드니까?”
“마음에 드는 건 두 번째 문제야· 여자는 신분 상승을 위해서 춰·”
“····”
“속물 같지? 맞아 대부분은 속물이야· 단순히 춤이 좋아서 무도회에 오는 애들은 거의 없어· 자기보다 계급이 높은 잘난 부잣집 귀족에게 선택받아 귀부인이 될 기회를 잡기 위해 무도회에 가는 거라구·”
릴리트의 말을 들으니 이터니아 무도회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마음이 식어버릴 것만 같았다·
“····”
“흥이 깨지지? 이터니아 무도회는 그런 경향이 적겠지만 다른 무도회는 대부분 그런 식으로 굴러갈 거야·”
“흥미롭네·”
“춤을 도구라고 생각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이성의 환심을 사는 도구·”
“····”
“그러면 오히려 떨지 않고 잘 할 수 있어· 영혼과 몸의 조화니 뭐니 하는 고상한 수식어는 치워버려· 어린애도 길가의 주정뱅이도 시장통의 상인도 출 수 있는 게 춤이야· 거기에 너무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지 마· 그러면 몸은 굳어버리고 스텝은 잔뜩 꼬일 거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영양가 있는 조언이었다·
릴리트는 길을 걸어가다 말고 갑자기 멈추고는 내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나를 붙잡았다·
“여기가 좋겠다· 오늘은 여기서 해·”
이곳은 그냥 평범한 이터니아 산책로 한복판이었다· 해가 져서 어두웠지만 누가 지나가다 우리가 춤을 추는 걸 목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최소한 사람의 눈은 피해야하지 않겠어?”
“봐 아무도 없잖아· 여기서 해· 나 멀리 가기 싫어·”
“····”
“어서 자세 잡아·”
릴리트는 나와 딱 붙게 내 자세를 점검하려 들었다·
“····”
“내 허리에 손 올려·”
막상 하려니까 바로 포즈가 나오지 않았다· 릴리트가 답답하다는 듯이 내 팔을 잡고는 자기 허리에 바짝 붙였다·
“여자가 춤을 승낙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몸을 맡기겠다는 의미와 같아· 그러니까 자신에게 모든 걸 내던진 여자를 생각해서 남자가 단단하게 붙잡고 힘있게 리드해야 해· 여자들은 너무 예민해서 조금만 발을 맞춰도 알아· 이 남자는 마음이 불안정하구나· 이 남자는 나를 상대할 배짱이 없고 나약하구나· 느낄 수 있어· 몸짓에서 그게 드러나거든· 그러면 시시한 남자로 끝나고 다음 곡은 영원히 연주되지 않게 될 거야·”
조언들이 하나같이 뼈가 있었다· 실베린과 춤을 출 때가 떠올라서 은근히 속이 쓰라릴 정도니·
“내 손이랑 허리 잡고 움직여· 하나 둘 셋 하나 둘·”
그리고 그렇게 바로 교습이 시작되었다·
“다른 데 보지 마· 내 눈을 봐·”
릴리트가 단호하게 내 실수를 지적한다· 나는 릴리트의 눈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릴리트는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에 있어선 확실한 전문가였다·
한 가지만 빼면·
나는 떨지 않았지만 릴리트는 그런 조언과는 상반되게 몸을 조금씩 떨었다· 마치 잔뜩 겁먹은 아기새처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그러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
춤 교습은 무도회 날이 오기 전까지 매일 하기로 정해졌다· 꽤 많은 수고가 들어가는 일임에도 릴리트는 크게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뭐 훗날 고생한 대가를 내게서 받아낼 테니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늦은 밤 가시정원 기숙사로 돌아오니 내 방 침대에서 반쯤 잠들어 있던 트리샤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왜 이리 늦게 들어와····”
나는 옷을 갈아입기 전에 트리샤가 잔뜩 헤집어놓은 내 책상을 정돈했다· 운철석에 연금술 서적까지 마음껏 구경해놓고 정돈을 안 해놓은 상태였다·
“이거는 왜 이 꼴이 됐어?”
트리샤가 뭉그적대며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고는 말했다·
“원래 내가 정리할 생각이었어···!”
뻔뻔하기도 하지·
그녀가 내 물건을 뒤져볼 것이란 건 충분히 예상했던 거라 실베린과 공녀의 편지 같은 중요한 물건들은 이미 다른 데에 보관하고 있었다·
“내가 할 테니까 올라가서 자·”
“아니 나 오늘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뭔데?”
“나 요즘 금발머리 걔 맘에 안 들어!”
“···뭐?”
나는 책상을 정돈하다 말고 트리샤를 돌아보았다· 얘가 전에 대놓고 이렇게 누굴 싫어한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나?
표정을 보니 그녀는 농담하는 게 아니었다·
“요즘 각본 쓰는 언니랑 친해졌는데 그 언니랑 놀고 있으면 계속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 거 있지·”
“금발이 누군데?”
“걔! 너 졸졸 쫓아다니는 애!”
헤일리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같은 연극부인 루나를 말하는 것 같은데 같은 부원으로 지낸 지 꽤 됐을 텐데 이름도 안 부를 정도면 여간 친해지기 싫은 모양이다·
“루나 말하는 거야?”
“응· 걔·”
“루나가 무슨 해코지라도 했어?”
“아니 근데 왜 자꾸 쳐다보냐고 가서 물어보면 대답도 안 하고 날 무시해·”
“금발 말고 이름으로 친근감 있게 부르면 대답해주지 않을까?”
“···그건 싫어·”
“왜?”
“걔도 나 별로 안 좋아하니까· 데미안 네가 대신 말해줘· 아무리 날 질투해도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트리샤의 볼이 살짝 뾰로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루나가 트리샤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었을 거라 의심하지는 않지만 요즘 따라 루나의 정령이 자꾸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도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조만간 연극부에 한 번 찾아가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내일 찾아가서 이야기해 볼게·”
***
이른 아침 시작된 미술부 강의를 마치고 물건들을 정리하던 때였다·
“신입!”
각목으로 된 이젤을 어깨에 얹고 물품 창고로 이동하던 도중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입!”
익숙한 목소리· 날 이렇게 부르는 건 제니아와 헤일리 밖에 없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소리가 작고 조심스러웠다·
주위를 돌아보니 제니아가 창고 안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고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이리 와 신입!”
나는 잠시 망을 살피고는 소리 없이 그녀가 있는 창고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날 들여주고서는 창고 문을 닫았다·
사람 셋이 간신이 구겨 앉을 정도의 좁은 공간· 거기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햇빛을 가리고 오래된 목재에서 곰팡이 내가 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헤일리가 쪼그려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입에 넣고 있었다·
제니아가 나를 그 앞에 반강제로 앉혔다·
“앉아 앉아·”
헤일리가 뭔가를 열심히 먹는 와중에 날 보고는 반가움을 표했다·
“오 신입이 왔어? 이것 좀 먹어·”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한 움큼 꺼내고는 내 입에다 냅다 들이밀었다·
“음 읍!”
“옳지 씹어· 씹어!”
달콤한 과일 향이 물씬 풍긴다· 내 입에 들어간 건 건과일들이었다·
이 여자들은 대체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나는 건과일을 전부 삼키고 입을 열었다·
“선배 대체 여기서 뭘····”
“쉿!”
제니아가 갑자기 조용히 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곧이어 복도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한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일리 아가씨! 헤일리 아가씨! 어딜 가신 겁니까!”
그 시종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난 뒤 헤일리가 말했다·
“날 여자랑 춤추게 하면서 또 무도회 때 품위는 지켜야 한다고 한치수 작은 코르셋을 들고 와선 날 잔뜩 굶기는 거 있지·”
그래서 몰래 숨어서 간식을 욱여넣고 있었던 거구나·
“안쓰럽습니다 선배·”
“그래 고맙다· 이것도 먹어봐·”
그러고는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내 입에 냅다 집어넣었다· 나는 간신히 씹어 넘기고는 말했다·
“저 선배 혹시 바쁘십니까?”
“왜?”
“마침 만난 김에 고민 상담 좀 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뭐야· 말해봐·”
“제 친구랑 또 다른 친구가 서로 같은 부원인데 서로 사이가 너무 안 좋습니다· 이 둘을 친해지게 만들 방법 같은 게 필요합니다·”
“둘 다 여자야?”
“···네·”
제니아가 대답을 듣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못 해 그거· 그냥 둬·”
헤일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포기해· 네가 뭔 짓을 해도 서로 안 친해져·”
정황을 알아보는 것도 없이 단호하게 결론지어버리니 말문이 막혀버렸다·
“···정말 방법이 없습니까?”
“방법이 완전 없는 건 아니야· 공통의 적같은 걸 만들면 또 둘이 마음이 통할 수도 있어· 교류전 철이 돌아오면 원수끼리도 서로 뭉쳐서 협력하고 그러니까·”
“공통의 적이요···?”
“그래· 근데 그건 네가 뭘 한다고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둬야지·”
“···알겠습니다·”
그래 이들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루나와 트리샤가 친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갈등이 생기면 중간에서 조율해주는 게 최선이 아닐까·
***
연극부의 리허설은 이른 아침 그게 아니면 일과가 마무리된 저녁쯤에야 진행된다· 부원들 각각 전공 학부가 다르고 수업 시간표도 제각각이었기에 낮에 모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수업이 비는 시간에 부원들은 틈틈이 소극장에 모여 대본을 외우고 독백을 연습하곤 했다·
루나도 수업이 중간중간 비어 있으면 소극장에 오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점심 시간이 약간 지난 나른한 오후· 몇몇 학생들이 소극장에 모여 조용히 대본을 읽고 있었다· 루나 또한 그곳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한 여학생이 객석 중앙을 부리나케 달려 나오고는 소리쳤다·
“야 야 밧줄 준비해!”
“···?”
다른 이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그 여학생을 바라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야 오늘 무슨 날인가봐· 데미안이 소극장에 들어와도 되겠냐는데? 밧줄이랑 고문 기구 들고 와· 연극부 들어오겠단 약조만 받아내고 풀어 줘· 걔만 있으면 우리 티켓 파는 건···!”
농담이 섞인 호들갑을 떨어대자 한쪽에서 야유를 해댔다·
“미친년 그게 되겠냐?”
“나 미술부 선배들 무서워서 안 할래·”
그러자 여학생이 장난기를 거두고 차분해진 말투로 루나를 불렀다·
“아 그렇겠지? 다들 졸려 보이길래 농담 좀 해 봤어· 그보다 루나 데미안 그 친구가 너 좀 보자는데?”
그러자 순간 소극장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다들 남자가 루나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는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남자와는 동기 선배 가릴 거 없이 누구든 대화조차도 거의 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그것도 요즘 말 많은 그 요주의 인물이 루나를 찾는다니 호기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객석에 띄엄띄엄 앉아서 대본을 읽던 남학생들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루나가 있는 곳을 흘끔거렸다·
루나는 책을 덮고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로··· 불러도 될까요?”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