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3
소극장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온다·
어두운 객석에 띄엄띄엄 앉아서 휴식을 취하던 학생들은 차분한 방문객을 의식하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데미안이 객석 통로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루나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밝은 톤의 금발 머리였기에 쉽게 눈에 띄었다·
다들 그녀가 어떻게 나오는지 주목하고 있었다·
루나가 데미안의 앞으로 가서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루나는 조용히 데미안을 이끌고 소품실 쪽으로 이동했다· 공간이 넓어 때때로 손님맞이 용도로 활용하던 곳이었다·
그 광경을 조심스레 살피던 주변 학생들은 루나와 데미안이 사라지자 입을 열었다·
“저거 진짜 루나 맞아?”
“못해도 스무마디는 한 것 같은데?”
“신기록이네·”
루나는 여학생들과도 대화가 적고 남학생과는 두어마디 이상 소통하지 않았었다·
그런 습성과 신비로운 능력 외모가 맞물려 보호종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데미안에게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이자 일부 남학생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섭섭함이 섞인 푸념을 내뱉었다·
“나한테는 지금껏 비키라는 말 한마디만 했는데· 뭐냐·”
“어떻게 된 거야?”
“대련 평가가 크게 한 거지·”
“아 그때 그거 때문에?”
***
루나는 나를 연극 소품처럼 보이는 작은 나무 의자에 앉히고는 마법으로 주전자의 물을 데웠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찻잔을 꺼내서 내 앞에 건네고는 차를 따랐다·
“이럴 필요는 없는데· 금방 나갈 거라서·”
“그래도··· 내 첫 손님인걸·”
루나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주변에는 소품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지만 우리가 앉은 곳 주변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함인지 약간의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음··· 연극부에서 잘 지내는 것 같네· 요즘 그 늑대 친구가 자주 보여서 무슨 일이 있나····”
루나가 돌연 내 말을 끊었다·
“···내가 시킨 거 아니야·”
“···뭘?”
루나가 딱 잘라 말하고는 내 시선을 살짝 피하며 두 손으로 차를 들이켰다· 잘잘못을 따지러 온 것도 아니고 딱히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었다만 뭔가 시치미를 떼는 듯한 분위기인 건 내 착각인가·
루나가 내 반응을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그보다··· 어쩐 일이야?”
“슬슬 친한 척도 할 겸 한 번 놀러 왔지·”
그녀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도 미술부 놀러 가도 될까···?”
예상외로 제법 적극적인 반응이다·
연극부 부원을 보고 제니아와 헤일리가 어떻게 반응할지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았다·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무도회 전후로 헤일리가 예민하다니까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응 연극부는 선배들한테 환영받지 못하니까 사람 없을 때 가끔 놀러 와·”
“전에 치유실에서 미술부 그 선배들··· 나도 봤어·”
루나는 재밌는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기운이 넘치는 분들이지· 다 좋은데 미술부는 결집력이 강한 대신 타 부원들에겐 적대적이야·”
“그럴 것 같아····”
“연극부는 어때? 타 부원들이랑 잘 지내?”
“응····”
“···트리샤랑도 같은 부원이지? 둘은 잘 지내는 편이야?”
루나가 날 물끄러미 보며 눈을 깜빡이고는 잠시 고민한 끝에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렇구나· 둘이 성격이 너무 달라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 차이가 너무 크다는 걸 인정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 또 순환계 때처럼 조별 평가를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내 몇 없는 친구들이 서로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루나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 기분이 안 좋아진 건가 싶어 말을 돌리려던 찰나에 그녀가 말했다·
“그건··· 우리 둘이서도 충분할 거야·”
“····”
“실력만 봐서는··· 그렇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루나와 나 둘이서 순환계 실습 평가에서 최고 성적을 거두긴 했으니까·
내가 잠시 머뭇거린 건 트리샤가 그렇게 거슬리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루나가 적응 평가지의 불편한 사람 명단에 트리샤의 이름을 적지 않았으리란 법도 없었다· 이 둘은 성향이 정반대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곧장 트리샤에 관해 물어보았다·
“트리샤는 연극부에서 어떻게 지내?”
루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모두하고 잘 지내· 활기차고··· 배역에 충실하고 성실해·”
좋은 말만 해주던 루나는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인지 표정이 다소 가라앉았다·
이상함을 감지한 나는 더 깊게 캐물었다·
“···트리샤한테 무슨 일 있어?”
내가 연극부에 찾아온 본 목적은 이 문제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루나는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게 말해주겠어?”
루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샤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나는 노기를 억누르고 물었다·
“누구인지 알아?”
“응··· 다만 한 명이 아니야·”
***
루나에게서 트리샤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트리샤가 따로 부장 언니한테 말할 수도 있었는데··· 원하질 않는 것 같아·”
루나는 정령들을 통해 이미 트리샤를 미워하는 이들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트리샤를 악의적으로 괴롭히는 사람은 연극부에서 세 명이었다·
루나가 선뜻 그 사람들의 괴롭힘 행위를 고발하지 못한 것은 트리샤가 그걸 원하지 않아서였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났지만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이건 여자들의 파벌 싸움로 번질 가능성이 컸다·
증오 행위가 표면에 드러난 게 셋일 뿐이지 수면 아래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기고 지는 사람은 없다· 그저 상처받은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루나가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엮여 있을지도 모르고 내가 개입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교수나 타 부서의 인물이 개입해 편을 들어주면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었다·
과거 아카테스 신전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던 적이 있었다· 리자와 다른 여자아이들 간의 갈등이었는데 리자가 일방적인 피해자의 위치였고 옳고 그름의 줄다리기에서 완벽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길 수 없었다·
그 아이들은 그저 리자를 미워했을 뿐이다· 그곳에서 리자는 유일하게 특별한 능력이 있었고 명문가 출신이었다·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답고 욕심과 질투심이 많았다·
그래서 모두에게 미움받았고 거기에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내가 리자의 편을 들어주니 그들은 나까지 무리에서 추방해버렸다·
트리샤의 일 또한 비슷한 양상일지도 모른다·
루나와의 대면을 마치고 소극장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소극장 앞까지 나를 배웅해줬다·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어서 들어가·”
루나는 날 앞에 두고 잠시 우물쭈물거렸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더 있기라도 한 걸까·
“데미···안·”
“응?”
“무도회··· 상대는 정했어?”
“아직·”
“나 나도··· 안 정했어·”
루나는 그 말만 남기고 도망치듯 소극장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대화를 하다 중간에 끊어버린 듯한 기분이다·
그래도 이정도만 해도 루나가 어떤 의사를 전달하려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루나가 무도회에 참석한다면 마땅히 상대가 될 사람은 나 말고는 없었으니까·
내게 마음을 열어준 것이 고마우면서 한편으로는 부담감이 날 짓눌렀다·
속이 답답해진 나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서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는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고 누군가는 실망할 것이다·
여기에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은 가능한 걸까·
***
우리는 이터니아 캠퍼스의 구석에 마련된 작은 공터에서 춤을 연습했다·
“무도회에서 여자가 가장 두려워하는건 밀랍꽃이 되는 거야·”
릴리트는 내 물음에 답하면서 내 허벅다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쳐내며 스텝을 교정했다· 그녀는 가르치는 일 앞에서는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밀랍꽃?”
릴리트는 다시 내 움직임에 몸을 맡기며 다시 리듬을 맞췄다·
“원하는 상대의 신청이 오길 기다리다가 결국 누구의 신청도 받지 못하고 무도회에 가만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여자들을 말하는 거야· 다 끝나갈 때까지 가만 앉아서 그 여자들을 밀랍꽃이라 불렀어·”
“안타깝네·”
“아니 대부분은 자업자득이야· 아무도 신청을 안해서 그러는 경우도 있지만 눈이 너무 높아서 자기가 원하는 남자가 올 때까지 신청을 전부 거절했다가 결국 혼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밀랍꽃들은 그 다음엔 어떻게 되지?”
“어떻게 되긴· 그 여자들은 집가서 펑펑 울겠지·”
“네게도 그랬던 경험이 있었나?”
“네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이터니아에서 난 항상 밀랍꽃이었어·”
안 그럴 것 같은 인상인데 이건 좀 의외의 고백이었다·
“대단한 사람을 기다렸나 보네·”
“그 반대야· 보잘것없는 인간을 기다렸지· 난 남자로 출세하고픈 욕심이 없어· 내 지위에서 신분 상승하려면 사실상 왕족 말고는 없는걸·”
“열린 마음을 지녔나 보네·”
“그래 나는 이렇게 열려 있는데 그 인간은 같이 하자는 제안은커녕 나한테 말 한마디도 안 했어· 다른 애들이랑은 시시덕거리면서· 나한테만 냉대했지·”
“널 밀랍꽃으로 만들고 그런 모습을 봤을 때 기분이 어땠지?”
릴리트가 천천히 스텝을 맞추면서 고개를 들어 예리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죽이고 싶었어· 정말 죽이고 싶었어·”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청초한 얼굴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섬뜩했다·
“····”
릴리트의 경험담을 들으니 내게 은근한 신호를 남긴 세실과 루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만약 이들이 밀랍꽃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루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것이니만큼 크게 실망할 것이고··· 세실은 사탕이와 완전히 갈라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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