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5
소드마스터의 서신에는 달랑 발신자를 식별할 수 있는 서명만이 적혀 있을 뿐 별다른 메시지는 적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다· 무도회에서 시온과 놀아주라는 것이 아닐까· 시온과 그나마 친분 비슷한 게 있는 남자는 나 하나뿐이니까·
금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다· 공방에서 일하던 시절 받던 봉급 반년치에 달하는막대한 금액이다· 물론 리그베드의 물가를 생각하면 대단한 호사를 부릴 금액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렇게나 많이 줄 필요가 있을까·
글쎄 그도 시온을 상대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뇌물을 받았다고 해서 시온의 무도회 파트너가 되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도회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지만 그런 지조 없는 방식으로 상대를 고르고 싶지 않았다·
내 신청을 기다리는 두 친구들에게도 예의도 아니고 말이다· 심지어 시온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돈 때문에 파트너 신청을 했다는 걸 알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
매일같이 하는 수련을 마치고 기숙사 공용 욕탕에서 목욕까지 끝낸 시온은 가운을 걸치고 라운지의 벽난로 앞 그녀의 지정석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곳에 앉아 통창 밖으로 보이는 대낮의 생활동 풍경을 감상했다·
시온과는 다르게 그곳을 지나는 남녀들에게서 어딘가 들뜬 기대감과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뭐가 저리도 행복한 것일까· 마치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는 동화 속 인물들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시온은 저들처럼 들뜨고 설렐 수 없었다· 그 어떤 동화를 읽어도 이입할 수 없었고 유년시절부터 마주해왔던 냉혹한 현실 때문에 한 시도 낭만과 여유에 취할 수 없었다·
저들의 해맑은 모습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라운지를 떠나 계단을 올라갔다·
그렇게 나아가다 자신의 방 앞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춰섰다· 문 앞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번이 다섯번째였다· 언제부턴가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이틀에 한 번씩 그녀의 방 문에 선물을 두고 도망치기 시작했었다·
처음 한두 번은 사심 없이 그냥 방에 들였으나 관리를 안 하고 방치하던 탓에 시들고 쓰레기가 되자 그녀는 정원에 던져버리거나 아니면 처음 놓인 그대로 방치해버렸다·
“····”
무도회 철이 다가오자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마치 자신이 사탕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의 소지품 보관대에 막대 사탕을 두고 가는 이도 있었다· 그게 진짜 사탕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주변을 맴돌면서도 겁먹고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상종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그녀는 꽃다발을 그대로 두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가운을 휙 벗어 던지고는 알몸으로 몸에 새로 생긴 멍이나 상처가 없는지 점검했다· 수련 중 미처 인지하지 못한 부상을 점검하고 실수를 돌이켜 보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복기를 마친 그녀는 속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그러던 중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윗드러프관은 거주하는 학생이 적은 탓에 누군가의 발소리를 듣는 일이 제법 드물었다· 그 발소리가 그녀의 방 앞에서 우뚝 멈추고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자 이전부터 스토킹하던 놈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속옷차림으로 곧장 마겁을 집어들고는 다시는 얼씬도 못하게 할 요량으로 문을 덜컥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예상치도 못한 인물을 맞이하고는 그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바로 그 가면의 남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발 아래에 놓인 꽃다발과 속옷 차림의 시온을 번갈아 보며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야·”
***
시온이 공격적인 눈빛으로 날 노려보다 혼자 잠시 고민하고는 살기를 죽였다·
“지금까지 다 네가 한 거야?”
문 앞에 놓인 꽃다발을 말하는 건가· 하필 재수없게 걸려서 괜한 누명을 쓰게 생겼다·
“아니·”
내가 말 했잖아· 아니라고· 난 모르는 일이다·
시온이 차가운 눈빛으로 반문한다·
“그럼 왜 온건데?”
“용건이 있으니까·”
그녀가 잠시 내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들어와·”
시온은 문을 열어둔 채로 그냥 두고선 휙 돌아섰다· 그러곤 옷장을 활짝 열어서 수련복을 꺼내 입었다· 살짝 훔쳐보니 옷장에는 똑같은 수련복만 열 벌이 채워져 있다· 얘는 다른 여자애들과는 달리 꾸미고 단장하는데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속옷 차림을 그대로 보여줬는대도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는 것도 보면 꼭 여자의 몸에 남자의 영혼이 들어있는 것 같다· 날 이성으로 인지하지 않으니 이런 서스럼 없는 모습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발을 들이지 않고 그대로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아니 내가 약속 시간을 정해줄테니 그 때 정해진 곳으로 나와·”
그녀는 상의를 걸치고 옷깃 안으로 들어간 머리카락을 빼내면서 말했다·
“싫어·”
“····”
“난 오늘 말고는 시간 안 남아· 나랑 싸워보고 싶으면 오늘 끝내·”
“···내가 이길텐데 싸워서 뭐해?”
“····”
그러자 시온의 몸이 살짝 경직됐다· 곧이어 그녀는 말없이 테이블 옆에 걸쳐두었던 마검을 쥐었다·
진짜 싸울 작정인가· 이 싸움에 미친 여자한테는 농담 한마디도 못 하겠다·
정말 싸움나기 전에 서둘러 말을 돌렸다·
“오늘밖에 시간이 없으면 검은 내려놓고 나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
나는 기숙사에서 나오자 마자 마차를 호출하는 스티치를 날려보냈다·
예상 외로 시온은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평소 행실처럼 남의 말은 다 무시하고 자기 할 일만 하고 누구를 뒤따르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았는데 그녀는 신기하게도 새끼 오리라도 된 것마냥 내 뒤를 졸졸 쫓아오고 있었다·
시온이 누군가와 걸음을 맞추는 걸 처음 보는 것인지 생활동 주변 학생들이 우리를 연신 흘끔거렸다· 이거 시선들이 제법 따갑다·
“잠깐 기다려·”
시온이 따라오다 말고 돌연 멈춰섰다·
내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곤란하다·
“여기선 할 말 없어·”
“용건을 보기 전에 우선 해명부터 들어야겠어·”
“···해명?”
시온은 팔짱을 끼고는 생활동 정원에 놓인 벤치로 걸어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날 슬쩍 올려다보며 말했다·
“매일 같이 날 쫒아오면서 꽃다발이랑 사탕을 두고 간 이유부터 말 해·”
“···?”
“그 이유를 듣기 전엔 안 움직이겠어·”
나는 주변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몇몇 학생들이 우릴 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얘는 아직도 내가 그런 거라고 착각하고 있나·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한 거 아니야· 스토킹하는 놈은 따로 있으니까 알아서 해결해·”
“····”
“무도회 신청은 네가 아니라 예쁘고 참하고 마음씨 넓은 애한테 할 거니까 걱정 마·”
시온이 무릎에 손을 올리고 내 말을 못들은 척했다·
우릴 쳐다보는 시선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거 오해와 더불어 이상한 소문까지 더 엮일 판이었다·
“이거 봐·”
나는 품안에서 소드마스터의 서신을 꺼내 그녀의 눈 앞에 흔들었다· 시온의 눈동자가 당황한 것처럼 커졌다· 나는 곧장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녀는 크게 저항하지 않고 딸려나왔다·
내 돌발 행동을 보고는 구경꾼들이 중얼거렸다·
“어머 어머·”
곧장 그렇게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걸어나섰다·
우릴 보고 수군대는 이들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대처를 하기엔 많이 늦었다·
나는 수호목으로 향하는 숲길 중간에서 멈추고는 구속을 풀었다· 시온은 내 손아귀가 아픈 것인지 자기 손목을 주물렀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시온이 먼저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물었다·
“어째서 네가 스승님의 편지를 받은거지?”
“내가 묻고 싶은 건데· 그리고 여기 아무것도 적힌 게 없어· 그냥 물건이 든 주머니랑 같이 날아온 거야·”
혹시 모르니 일단 돈 이야기는 숨겼다·
“····”
그녀의 얼굴이 다소 어두워졌다·
“내가 받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
분명 뭔가가 있는 듯한 얼굴이지만 그녀는 대답하길 주저했다·
“나한테 온 게 아니라 잘못 보내신 것일 수도 있겠지·”
시온은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은 그런 걸로 실수하시지 않아· 정확히 널 지목한 게 틀림없어·”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한테는··· 몇달간 아무 소식도 안 주셨는데····”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 하나뿐인 제자 시온한테는 기별도 안 보내다가 뜬금없이 나한테 편지를 보내니 마음이 상한 거구나·
“나한테도 그냥 서명만 보내셨어·”
“스승님은 중요한 편지에는 약품처리를 해서 내용을 감추셔·”
“그럼 어떻게 하면 확인할 수 있지?”
“그늘초 가루를 뿌리면 돼·”
들어본 적 있는 재료다· 그늘초 가루는 이 지역에서는 구할 수 없는 희귀한 재료로 알고 있는데·
어쩌면 그 금화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편지를 해독하는 용도로 첨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또 소드마스터의 의도가 아리송해진다·
만약 시온의 일일 친구 노릇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내용을 감춰야 할 정도로 중요한 메시지는 대체 뭘까· 시온에게 전하지도 않고 오직 나에게만 전해야하는 그건····
“갈래· 그 편지는 나랑 상관없는 거야·”
그녀는 휙 돌아서서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달려가 시온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니 너도 같이 리그베드에 가야겠어·”
***
교양 수업에 맞춰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세실은 등뒤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글쎄 그 시온····”
“가면 쓴 애가 막····”
“무도회··· 쫓아다녀····”
이제 막 강의실로 들어오는 애들이 좀전에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던 것처럼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대화에서 언급되는 인물은 시온 그리고 가면을 쓴 남자였다·
그 둘이 한 곳에서 같이 언급되는 걸 들으니 세실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환계 실습이 끝난 직후에 그 둘이 리그베드에서 밀회를 갖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녀의 옆에 친구인 엘리아스가 불쑥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세실 뭐해?”
“····”
엘리아스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굳어있는 세실을 보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너··· 왜 그래· 또 누가 춤추자고 따라다녀?”
“아니·”
세실은 엘리아스의 관심이 불편한 듯이 차갑게 응수하고는 수업용 교재를 펴서 얼굴을 가려버렸다·
그러던 중 다른 학생들이 세실의 뒷줄을 가득 채우고 앉아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글쎼 그 시온이 가면 쓴 애를 졸졸 쫓아가면서 싸움을 걸더래·”
“걔 아직도 대련에 미쳐 있어?”
“몰라· 둘이 무슨 관계인 건 맞는 거 같아· 왜냐면 가면 쓴 애가 시온을 무시하니까 화나서 막 소리치더래·”
“뭐라고?”
“나랑 싸우거나 아님 무도회에서 춤추거나 둘 중 하나 선택하라고·”
“미친··· 뭐야 둘이 티격태격하다 정 붙은 거야?”
“근데 더 웃긴 게 뭔 줄 알아? 가면 쓴 애가 단칼에 거절했대·”
“어머·”
“자기는 이미 예쁘고 똑똑하고 가슴도 겁나 큰 애한테 마음이 있다는 거야·”
“아··· 진짜 변태같다· 그런 애를 왜 쫓아다녀?”
“그러니까·”
세실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엘리아스는 세실의 팔뚝을 쿡쿡 찔렀다·
“세실? 괜찮아?”
곧이어 이상을 감지하고는 세실의 얼굴을 가린 책을 지긋이 아래로 눌렀다·
세실의 팔이 힘없이 스르르 내려왔다· 그렇게 드러난 세실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너··· 어디 아파?”
세실은 아무말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열기를 식히려는 것처럼 포션병을 꺼내 냅다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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