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9
“아직 전력을 발휘한 게 아니란 말이다?”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르신을 말한 겁니다·”
“흠 내가 전력을 쏟지 않았다?”
“네·”
“뭘 보고 그리 확신하지?”
“아직 안 꺼내신 그 검을 보고서 알았습니다·”
“이건 며칠 전 마을 문지기로부터 약탈한 검인데?”
“그런 검을 문지기가 가지고 있을 수가 없죠· 이 일대를 뒤덮은 마압도 저 검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노인의 눈빛에 잠시 이채가 돌았다· 그리고는 데미안의 말에 호기심을 품고 말했다·
“네 녀석이 그걸 느꼈다?”
데미안은 거기서 한술 더 떴다·
“저 검이 제 몸을 원하는군요·”
“오호라 무슨 근거로?”
“그냥 느낀 겁니다· 가까이 근접하니··· 마압이 호의적이었달까·”
노인의 눈빛이 순간 놀라움에 젖었다가 다시 차분해졌다·
“헛소리로 내 주의를 빼놓으려는 게냐?”
노인이 대화를 중단하고 뒤돌아 칼을 휘둘렀다·
게일이 소리 없이 다가와 기습하던 걸 미리 알고 쳐낸 것이었다·
게일은 냉기 폭풍과 휘말려 도끼와 함께 멀리 스무 걸음쯤 날아가 땅을 뒹굴었다·
게일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팔다리가 얼어붙은 채로 땅에 고정되어버린 것이다·
“네 녀석부터 끝내주마·”
게일이 얼음을 깨고 나오기 전에 마무리할 생각인지 노인이 게일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데미안이 대응하기 위해 노인을 추격했다· 하지만 질주 속도 면에서 노인이 월등히 빨라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데미안은 압축 공기 폭탄을 꺼내 힘껏 던졌다·
이는 노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노인의 머리 위를 넘어서 게일의 앞에 떨어졌다·
게일은 몸부림치다 자기 앞에 떨어진 폭탄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엿같은 새끼·”
펑!
게일의 몸은 또 붕 떠올라 그대로 전장에서 동떨어진 곳으로 처박혔다·
그 모습을 목격한 노인이 아군인지 적인지 분간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데미안을 슥 돌아보았다·
데미안은 멈추지 않고 달려가 노인에게 목검을 휘둘렀다·
캉!
노인이 데미안의 공격을 한 손으로 가볍게 막아내고는 말했다·
“교활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군· 인정머리가 없는 것도 마음에 들어·”
“····”
“먹잇감으로 탁월한 것만 아니었다면 내 제자로 길렀을 것이야·”
“감사합니다만 이미 최고의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네놈이 악랄한 마녀를 수발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검을 맞댄 상태에서 노인의 힘에 압도되어 데미안의 자세가 찌그러지듯 바닥에 눌리기 시작했다·
“···한 분 더 있습니다· 용살자 게신 그리그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뭐라?”
소드마스터가 언급되자 순간 노인이 동요했다·
데미안은 더 납작해지기 전에 은밀하게 폭탄을 하나 던지고 뒤로 굴렀다·
뻔한 수를 읽은 노인이 가벼운 움직임으로 몸을 뒤로 빼냈다·
퍼엉!
이번엔 예상과 달리 분홍빛 꽃잎들이 터져 나왔다· 거리를 벌리면서 폭탄을 아끼기 위한 속임수였다·
“허허·”
노인이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데미안을 처음 보는 영물을 대하는 것처럼 묘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데미안이 다시 자세를 잡고 말했다·
“절 죽이면 ‘용살자’께서 응징할 겁니다·”
“죽을 것 같으니 아무 말이나 나불대는구나· 좋다· 재밌는 녀석 같으니 내 직접 알려주지·”
노인이 땅을 박차고 데미안에게 달려들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초인적인 속도였다·
캉!
“···!”
화살같이 빠른 노인의 검을 한차례 간신히 막았으나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데미안은 뒤로 나뒹굴었다·
데미안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압도적인 실력 차를 체감한 것이었다·
노인은 봐주지 않고 다시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또다시 막았지만 힘이 밀려 데미안의 왼쪽 팔뚝이 약하게 찍혔다·
그다음 복부를 차이고 또다시 밀려났다·
노인은 재정비할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쏟아부었다· 마검의 힘을 쓰지 않고 오로지 순수한 검술로만 데미안을 압박했다·
캉! 캉! 캉!
데미안이 이전보다는 잘 버텼지만 세 번의 합을 넘기지는 못하고 또 나뒹굴었다·
노인이 데미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또다시 일방적 공세를 부었다·
데미안의 전신이 고기에 칼집을 낸 것처럼 이곳저곳 베여 피가 줄줄 흘렀다·
“용살자 이야기도 허풍이었군· 그 인간과 닮기는커녕 흉내조차 못 내는구나·”
“····”
다시 공격을 쏟아부었다· 데미안은 이번엔 일곱 합을 견디곤 나가떨어졌다· 노인이 또다시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놈 검술은··· 어디서 익힌 게냐?”
합을 거듭할수록 데미안의 대처가 점점 능숙해지고 있었다·
데미안이 목검을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용살자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흠·”
노인이 다시 일격을 날리자 데미안이 다시 받아쳤다·
한데 이번엔 강한 충격음이 아닌 보리를 타작할 때와 같은 소리가 났다·
퍼석!
데미안의 검이 묘목으로 변하고는 상대의 검을 그물망처럼 엮어버렸다·
노인이 검을 빼내려 잡아당겼지만 올가미처럼 꽁꽁 묶여서 풀리지 않았다·
곧바로 데미안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가 피를 뿜으며 뒤로 밀려났지만 묘목 줄기가 손목을 단단히 붙든 탓에 떨어지질 않았다·
데미안은 한손을 폭탄 주머니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휙 던졌다·
그가 던진 건 폭탄이 전부 담긴 가방이었다·
데미안이 선택한 건 자폭이었다·
“···!”
곧이어 데미안이 차고 있던 목걸이가 발광하더니 뱀비늘 같은 투명한 보호막이 그를 감싸버렸다·
폭탄에 응축되어 있던 모든 마력이 뒤엉키며 강력한 마력 폭발이 일어났다·
***
새하얀 빛을 뿜어낸 마력 폭발이 제단을 산산이 조각내고 인근 뼛조각들을 사방에 흩뿌렸다· 폭발의 중심지엔 타원형의 움푹 파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데미안의 목검과 마검이 허공에 휘날리며 주인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떨어졌다·
데미안은 충격의 여파로 멀리 튕겼지만 아티팩트가 발동해 별다른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노인은 검을 놓고 재빨리 피하려 했지만 폭발에 휘말리는 건 피하지 못했다· 늘어져 있던 얼굴 가죽 일부가 살짝 뜯어져 더욱 너덜너덜해졌고 허름한 옷도 더욱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그는 멀쩡히 서 있었다·
데미안이 고개를 들어 노인이 빈손인 것을 확인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잡아!”
그리고 숲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게일이 땅에 박힌 마검을 향해달려나갔다·
노인이 다시 회수하기엔 많이 늦은 상황이었다·
게일이 낙엽과 흙먼지를 뒤집어 쓴 상태로 마검을 집어들었다·
손에 들린 마검이 희푸른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노인은 무슨 속내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는 가만 서서 그 모습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게일은 칼등에 붙은 먼지를 손으로 닦아내고는 허공에 휙휙 휘둘렀다·
그 궤적을 따라 하얀 서리가 스르륵 흘러나왔다·
“손에 딱 맞는군· 이건 제가 잘 쓰겠습니다·”
그리고는 노인을 향해 칼끝을 고정하고 자세를 잡았다·
데미안도 서둘러 목검을 회수하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노인은 마검을 빼앗겼음에도 조급함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게일을 보며 미간을 구기고 고개를 연신 저어댈 뿐이었다·
“쯧쯧 틀렸군·”
노인의 의미심장한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게일의 몸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
게일이 앞으로 나아가다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아 젠장·”
그가 다시 일어서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다시 몸을 비틀거렸다·
그러고는 저혼자 머리를 좌우로 털어내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닥쳐 닥쳐! 젠장·”
급기야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에 신음하기 시작했다·
“윽 으극 으아아아악!”
게일의 발밑이 얼어붙더니 서서히 몸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소리쳤다·
“검을 버려!”
“젠장 이 역겨운 계집년은··· 내가····”
게일이 고집을 부리며 버티자 손에 들린 마검이 부르르 전율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검이 마구잡이로 냉기를 하늘로 분출해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분출된 냉기는 운석처럼 추락해 제단 터와 인근 숲을 초토화했다·
펑! 펑!
사방에서 냉기가 터져댔다·
가만 서 있던 노인이 조용히 허리에 찬 또 다른 검을 뽑았다· 막강한 마압을 뿜어내던 바로 그것이었다·
모양도 투박하고 검 손잡이 칠이 벗겨진 낡은 검이었지만 그 능력은 전혀 투박하지 않았다·
노인이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세우자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무작위로 추락하던 냉기가 그를 중심으로 모여 태풍 같은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전장에 나무뿌리가 뽑힐 듯한 냉기의 회오리가 몰아쳐 데미안은 목검을 땅에 꽂고 엎드렸다·
그 강력한 기운이 그 검에 빨려 들어갔다· 곧이어 모든 냉기가 흡수되고 소용돌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완전히 소멸했다·
“····”
살면서 처음 보는 압도적인 광경에 데미안은 넋을 잃었다·
게일은 여전히 마검과 씨름 중이었지만 이내 마검의 거부반응으로 냉기 폭발을 얻어맞고 다시 튕겨 나가고 말았다·
그렇게 손아귀를 벗어난 마검은 물수제비처럼 지면을 툭툭 튕겨 데미안의 발치에서 스르르 멈췄다·
노인은 공격 의사가 없는 것인지 검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데미안은 잠시 숨을 죽였다· 목검을 칼집에 넣고는 마검을 가만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줍듯이 무심하게 마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데미안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인이 물었다·
“마검의 속삭임이 들리더냐?”
데미안의 손에선 마검이 순한 양처럼 잠잠해졌다·
그는 보란 듯이 검을 휙휙 휘둘러댔다· 그 어떤 거부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노인이 실실 웃더니 이윽고 광소를 터트렸다·
“아하하하하! 그만하면 됐다·”
“···?”
“그 검은 이제 네 것이다·”
노인이 늘어진 얼굴 가죽을 붙잡고 죽 잡아당겼다· 그러자 슬라임처럼 붙어있던 얼굴이 완전히 뜯어지고 원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뒤로 쓸어넘긴 흰머리· 잘 정리된 흰수염 강인하면서도 인자하게 주름진 눈매 세월에 빛이 바래긴 했지만 소싯적 미남자 소리를 들어봤을 법한 진한 이목구비· 마검사냥꾼이란 악명과는 어울리지 않은 선하면서도 우직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상대는 적의를 거두었지만 적잖이 당황한 데미안이 다시 전투 태세를 갖추고 말했다·
“···마검사냥꾼이 아니었군요·”
노인이 검을 허리춤에 도로 꽂았다· 내내 공간을 짓누르던 마압도 마침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마검사냥꾼은 내 손에 이미 죽었다·”
“····”
“그것도 마검사냥꾼에게서 탈취한 것이지· 임무는 끝났다· 그 검은 이번 임무의 보상이다· 말 안 듣고 무모하고 겁 없는 멍청이에게 딱 어울리는 보상이지·”
상황이 종료된 걸 비로소 확인한 데미안이 허망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본격적인 싸움을 앞두고 갑자기 모든 게 정리되자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터니아의 명령을 거부허고 마압을 뚫어내고 마검을 탈취하고 그게 다 시험이었던 거군요·”
긴장이 풀린 데미안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어르신은 저희 수준에 맞춰서 놀아준 거고요·”
“목숨을 건졌는데 아쉬워하는군·”
“····”
“자네가 정말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게냐?”
“···아뇨·”
데미안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마저 말을 이었다·
“아무리 강한 상대를 만나더라도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열 번째 승부까지는 쭉 지더라도 열한 번째 이후로는 내가 이기겠구나 하고 그림이 그려져는데 근데 이번 승부에선 달랐습니다· 백 번째에서도 천 번째에서도 제가 지는 그림밖에 안 보였습니다·”
“그런데 더 싸우고 싶었던 이유는 뭐지?”
“그래서 더 끝을 보고 싶었으니까요·”
“너와 저기 널브러진 애송이들은 충분히 잘 싸웠다· 그리고 의미없는 싸움에 기력을 낭비하지 마라· 한 번 물꼬를 튼 이상 마검사냥꾼은 앞으로 계속 찾아올 것이다·”
“····”
데미안은 허탈한 마음에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하나만 묻자·”
“···말씀하십쇼·”
“팔레오메디나 검술은 누가 가르쳤지?”
“그게 뭡니까?”
“네가 어설프게 구사한 그 고대 검법 말이다·”
“전 그런 건 모릅니다· 그냥 어르신이 구사한 걸 더듬더듬 따라한 것뿐입니다·”
“···허·”
노인의 눈에 다시금 데미안에 대한 호기심이 깃들었다·
마치 데미안의 말을 다시 확인이라도 하듯 되물었다·
“그 잠깐 상대한 걸 보고 따라했다?”
“···네·”
그는 뒷짐을 지고 뒤돌더니 조용히 하늘을 보며 작게 흘리듯 말했다
“···내 밑에서 굴리면 금방 괴물이 되겠군·”
“근데· 어르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교수님이십니까?”
“그래 네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치러 온 초빙 교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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