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0
데미안은 제집 침대에 누운 것처럼 팔다리를 쭉 뻗고 멍하니 구름 떠다니는 걸 바라보았다· 전신의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러 땅을 붉게 물들였지만 아파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교수님 그럼 몇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왜 학생들에게 복귀 공문을 보내신 겁니까? 그냥 공정하게 경쟁을 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요·”
“고분고분한 건 이젠 질색이네·”
“···?”
노인이 데미안을 보고는 픽 웃으며 가볍게 덧붙였다·
“뭐 굳이 말하자면 기질의 문제이지· 윗사람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놈은 마검을 다룰 수 없어· 그렇게 휘두르기 쉽다면 마검이 숙주를 집어삼키는 건 얼마나 쉽겠나·”
“····”
“자넨 그런 의미에서 물건이지· 그 무시무시한 대마법사의 명령도 안 들어먹지 않던가?”
“그건····”
스스로를 고분고분한 편이라 생각했던 데미안은 잠시 반박할 말을 찾다가 이내 포기하고 주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마검사냥꾼은 어디서 온 겁니까?”
“북부인이었다· 마검이 그자를 임시 숙주로 삼아 새 숙주를 찾아 남하한 게지·”
“희생자들의 이력들 제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절 찾아온 것이 맞습니까?”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것이겠지· 난 자네 과거를 모르니· 난 이미 늙어서 그렇다 친들 기여코 게일이란 녀석까지 버리고 널 숙주로 삼은 걸 보면 나도 이제 확신이 드는군·”
“게일은 왜 선택하지 않은 겁니까?”
“그 녀석의 손에서 검이 폭주하는 걸 너도 보았겠지· 그 마검의 힘은 게일이라는 녀석도 감당할 능력이 있어· 어쩌면 너보다 더 잘 다룰지도 모르네· 다만 능력이 아니라 성격차로 갈라진 거지·”
“성격차··· 라고요?”
“그래·”
“마검이 어떻게 절 알고 찾아온 건지는 아십니까?”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그 마검은 북부보다 더 위에서 내려왔다는 거네·”
“죽음의 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들어본 적 있나?”
“···네·”
데미안은 기억을 되짚었다· 그리폰 포션의 제조식을 만든 즈베레프의 연구문에서 죽음의 땅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했었다· 마법사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검은 구덩이들·
악몽이 펼쳐지는 죽음의 대륙·
“죽음의 땅 너머 뭔지 모를 존재가 자넬 인지했다는 거겠지· 결코 달가운 일은 아니야·”
그 말을 듣자 데미안은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눈을 꾹 감고 생각에 잠겼다·
“제게 호의를 가지고 검을 선물한 것이었으면 좋겠군요·”
“죽음의 땅에 있는 모든 것들· 모든 유기체와 영체 대지와 공기 구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아·”
“그곳에서 온 검을 저한테 주셔도 되는 겁니까·”
노인이 허리춤에 찬 자신의 마검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안 될거 뭐 있나· 이 녀석도 죽음의 땅에 묻혀 있었지· 네가 노력만 한다면 그 힘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네· 하물며 더 흉악한 검도 다루고 있지 않나·”
“····”
“이터니아에서 조만간 정예 병력을 죽음의 땅에 파견한다는군· 기다려 보면 또 소식이 있겠지·”
그러던 중 돌연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사탕아!”
떠난 줄 알았던 세실이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노인은 그녀를 흘끔 보고는 탄식했다·
“허 참 열정적인 아이로군· 안 그런가·”
“····”
세실이 근접하자 노인은 뒷짐을 지고 못본척 뒤돌아섰다·
그러자 세실이 노인에게 달려가 주먹으로 투닥투닥 의미없는 폭력을 행사했다·
“···?”
노인이 의문을 품고 돌아보자 화들짝 놀란 세실은 데미안에게로 가서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는 말했다·
“사탕이 그만 괴롭혀요· 이제 이터니아의 교수가 도착할 거니까 당신은 이제 끝났어요!”
얼마나 쎄게 끌어안았는지 데미안의 얼굴 반쪽이 세실의 가슴에 묻혀 가려진 상태였다·
데미안이 손가락으로 세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뭐?”
“마검사냥꾼은 죽었어·”
“···어?”
세실이 데미안과 노인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말했다·
“진짜···야? 차림새가 똑같아서 같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네·”
“앞이 안 보이는데 조금만····”
“앗 응·”
세실이 데미안의 머리를 조금 느슨하게 껴안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의 앞머리를 슥슥 정돈해주었다·
“왜 다시 돌아온 거야·”
“네가 걱정돼서· 당연한 걸 왜 물어?”
“····”
가면 쓴 사탕이의 모습으로 이 둘이 재회한 건 무도회 때 틀어진 이후 처음이었다· 그 때문에 원래의 모습으로 동행했던 때와는 다른 묘한 어색함이 남아 있었다·
“으휴 피가 가면에도 흘러····”
세실이 손수건을 꺼내 가면을 슥슥 닦아주었다· 그러면서 다소 긴장한 듯이 침을 여러번 삼켰다·
그리고는 눈치를 살짝 보며 말했다·
“안··· 안쪽까지 닦아줄게· 가만히 있어볼래?”
“····”
꼭 갓난아기를 대하는 것처럼 세실은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가면··· 벗길게·”
한 손으로 가면을 잡고 다른 손으로 고정을 풀었다·
데미안은 저항하지 않았다· 세실의 얼굴은 생일 선물을 개봉하는 어린아이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가면이 살짝 떨어지자 데미안의 머리카락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데미안의 얼굴을 맞이한 세실은 그게 환영이 아닌지 확인라도 하듯 이마와 코 볼을 손수건으로 더듬더듬 문질렀다·
“사탕이·”
“응·”
“못생겨서 얼굴 가리는 거 맞았네·”
“····”
세실은 시름 가득한 표정으로 데미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거 알아? 1학년 전투부 남자애들 전부를 의심하면서 꼭 얘만은 사탕이가 아니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었거든·”
“누군데?”
“데미안이었어·”
“그 녀석 괜찮던데 왜·”
“···친구가 적은 사람이 좋으니까· 난 단순한 게 좋아· 친구가 나 하나뿐이면 더 좋고·”
데미안은 피곤해진 탓에 눈을 힘없이 깜빡였다·
“친구 한 손으로 셀 수 있어·”
“이런 거짓말 치면 정말 죽이고 싶어·”
“너도 친구 많으면서·”
“친구 없으니까 시간도 많겠네· 우리 그동안 못 논 거 있으니까··· 며칠 뒤에 리그베드에서 예술가 모임이 있는데 음 같이 갈래? 나 초대장 있는데 딱 한 명 더 데리고 갈 수 있어·”
“응·”
“그때만큼은 우리 서로 잡다한 친구는 잠시 넣어두고 놀자구·”
데미안은 피곤한 탓에 생각하지도 않고 덥석덥석 받아들였다·
“아무렴··· 좋을대로·”
“너 그리고 그거 기억나?”
“뭐?”
“무도회 때· 가면 벗어주는 대가로 뭐가 필요하냐 이야기 했었잖아· 내가 그 그 뽀····”
삐약!
갑자기 무언가 세실의 말을 끊어버렸다·
데미안의 정령 삐약이가 허겁지겁 날갯짓을 하며 달려들었던 것이다·
삐약이는 자연스럽게 데미안의 얼굴 위에 앉고는 세실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예고도 없던 등장에 세실이 당황했다·
“···?”
그러다 갑자기 약올리기라도 하듯 삐약이가 날개를 털었다·
삐약!
“귀엽지만··· 같이 할말이 있는데 비켜줄래?”
세실은 두 손으로 삐약이를 받쳐들고 허공에 날려보냈다·
그러고는 데미안을 보면서 마저 말을 이었다·
“가면 벗어주는 대가로 뽀··· 어?”
“····”
세실이 그의 볼을 쿡쿡 찔렀다·
데미안이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세실이 그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데미안은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
이터니아에서 온 치유사들이 빅터와 데미안을 치료하고 이터니아로 수송했다·
부상자를 전부 수습한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게일이 떠나지 않고 칼리오스의 앞에 나타났다· 게일은 그에게 북부식 경례를 하며 말했다·
“북부의 영웅 소드마스터 칼리오스 님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칼리오스가 게일을 보며 말했다·
“아아 마검은 아쉽게 됐군 그래·”
상황이 본인의 뜻과는 다르게 끝났음에도 별다른 푸념 없이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남자다우면서 지극히 경제적인 태도였다·
“4대 마검 중 하나인 르나티크의 위력을 본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익숙한 아티팩트를 쓰던데· 내가 아는 사람의 것인가?”
게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드웬 선배의 것입니다·”
“물려받기로 한 게 바로 자네였군· 어울려· 계속 정진하게· 후대를 찾는 마검은 아직 많으니까 기회는 충분하네·”
“명심하겠습니다·”
칼리오스는 의미심장하게 씩 웃고는 자신의 검 손잡이를 툭툭 두드렸다·
***
세실을 만난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자다가 중간에 깨어나기도 했는데 떠오르는 건 세실의 다리에 머리를 베고 마차에 누워 있었다는 것 정도다·
세실이 내 입에 무언가를 넣어준 뒤로는 또 깊은 잠에 들어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가시정원 기숙사 침대에 뉘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눈을 뜨니 비로소 임무가 끝난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몸상태를 확인하려고 몸을 반쯤 일으키니 손에 무언가 걸렸다·
들어서 확인하니 다른 누군가랑 깍지를 끼고 있다· 나는 그제서야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베고 잠든 트리샤를 발견했다·
며칠이나 떨어졌다고 이렇게 반가운 거지·
그녀는 밤새 내 병간호를 해준 모양이었다·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한 감정이 든다·
그녀는 내가 다쳤을 때마다 전심전력으로 병간호를 도맡아왔었다·
나는 트리샤의 어깨를 툭툭 건드려 깨웠다·
“트리샤·”
“우음····”
“트리샤·”
“아으으음·”
“미술부가 일등했어·”
“으음· 응?”
트리샤의 눈이 번쩍 뜨인다·
“데미안 일어났어?”
“응·”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손깍지를 보고 화들짝 놀라서 손을 털었다·
“뭐야! 너 왜 맘대로 깍지껴!”
“···?”
“어이없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내가 한 거 아니래두!”
“그거 말고··· 아니다· 병간호하느라 고생했어· 아침밥은 네가 좋아하는 거로 해줄게·”
“됐거든! 나 알아서 먹을 거니까 그냥 누워!”
그러고는 두 팔로 내 상체를 밀쳐서 도로 눕혔다·
“뭐··· 내가 잠든 동안 별다른 일 없었어?”
나는 문득 세실 생각이 나 불안해졌다· 그동안 트리샤가 세실을 기만하며 지냈던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응! 아 아니!”
“무슨 소리야?”
“아니··· 네 새싹검이 좀 이상해서·”
“새싹검?”
“응· 처음 보는 검하고··· 뭔가 하던데· 밤새 우득우득 소리나서 거슬려 죽는 줄 알았어! 내가 만질 수도 없고·”
“···뭐?”
“저기!”
트리샤가 손가락으로 문 앞에 널브러진 검을 가리킨다·
“아·”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묘목으로 변한 목검이 새 마검을 감싸고 보아뱀처럼 꽉꽉 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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