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4
비를 그대로 맞고 기숙사로 돌아오자 내방 창가에 앉아 있던 트리샤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왔어?”
“응·”
“근데 데미안 왜 그래?”
“···뭐가?”
“기분 안 좋아?”
오늘 하루는 기분 좋게 보내긴 글러먹었지만 주변 사람에게 티 내고 싶지는 않았다· 기분이 안 좋은 건 나 하나만으로 족했으니까· 아무 일 없는 척 넘어가려고 했지만 트리샤는 내 기분이 가라앉은 걸 눈치챈 모양이다·
“아니 그냥 춥고 지쳐서 그래· 나 환복 좀 하게 나와줄래?”
“···내가 도와줄게!”
트리샤가 내게 달라붙어서 젖은 외투를 꾹꾹 잡아당겨서 반강제로 벗겨냈다·
“괜찮으니까····”
“친구끼리 뭐 어때! 이건 내가 정리할 테니 맘 편히 씻어!”
그러고는 내 외투들을 가지고 어딘가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
나는 프리실라를 챙겼다가 겸사겸사 목검도 함께 챙겼다· 목검은 아직 내 손길이 닿아도 변하질 않았다·
그리고 욕탕으로 가서 데우지도 않은 얼음장 같은 물에 몸을 담갔다·
그렇게 잠시나마 머리에 쏠린 열기를 식히며 칼리오스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의 주장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내가 직접 경험한 마법사들은 칼리오스의 말한 것과는 다르게 절대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리자를 진정으로 지워내고자 한다면 칼리오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편할지도 몰랐다·
***
똑똑·
늦은 밤 촛불을 끄고 침대로 향하려던 찰나 트리샤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제 방처럼 문고리를 덜컥 흔든다· 하지만 문을 잠근 탓에 열리지는 않았다·
“데미안 자?”
나는 걸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잠옷을 입은 트리샤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안자고 왜 왔어·”
“데미안 문 원래 안 잠그잖아····”
“중요한 일 하고 있었어·”
“나 대본 거기다 두고 온 거 같은데· 잠깐 들어가도 돼?”
나는 문을 더 활짝 열고 살짝 비켜주었다·
트리샤는 쪼르르 들어와서는 옷장 밑에 숨겨놓은 대본을 꺼냈다·
그러고는 살짝 내 눈치를 보고는 나가지 않고 곧장 내 침대로 올라갔다·
그렇게 이불을 덮고 얼굴만 내민 상태로 말했다·
“됐어! 이제 문 닫아도 돼!”
“····”
“나 잘 거야·”
“그래 자! 이번엔 데미안이 바닥에서 잘 차례야·”
“····”
피로감이 몰려온 탓에 나는 트리샤를 무시하고 침대에 올라 누웠다·
그러자 침대 중앙에 누운 트리샤가 움찔하며 옆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데미안 왜 그래? 진짜 기분 안 좋아?”
“아니· 좋아·”
“오늘은 이불에 말아서 내 방에 안 던질 거야?”
“말 했잖아· 피곤해서 그래· 너도 괜히 이상한 거 하지 말고 가서 자·”
트리샤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친구 기분이 이렇게 안 좋은데 신경 쓰여서 어떻게 자니?”
“괜찮다니까·”
트리샤가 순간 발끈한 듯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냥 두면 다쳐서 오고 내가 다친 거 간호하면 또 다쳐서 오고 기분이 안 좋아도 다쳐서 오는데 내가 어떻게 안심해!”
“····”
그러고는 다시 내 쪽을 바라보며 눕고는 말했다·
“밤에 몰래 뛰쳐 나갈까봐 안 되겠어· 너 자는 거 보고 갈 거야!”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걸까· 내가 다치면 간호해주는 건 항상 그녀였는데 나는 그걸 미처 알아주지 못했구나·
“···검들 침대에 올려놔야 하는데 괜찮겠어? ”
“마음대로 해·”
협탁에 걸쳐두었던 프리실라를 나와 트리샤의 중간에 두었다· 그리고 목검도 그 밑에 올려두었다·
“왜 하필 우리 사이에 그거 둬?”
“딱히 둘 곳이 없으니까·”
“꼭 그거 같아· 이 선 넘어오면 다 내꺼!”
“어릴 때 많이 했었지·”
“나는 한 번도 못 하고 그냥 친구들 이야기로만 들었어·”
“왜?”
“당연히 같이 할 사람이 없어서지· 너는 누구랑 했는데?”
“···소꿉친구랑·”
“누구?”
“이름 말하면 네가 아니·”
트리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이 든 건가 싶어 돌아보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리자?”
“뭐?”
“리자 말이야· 맞지? 리자 파스타!”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트리샤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덩달아 트리샤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왜 그렇게 놀라? 리자가 소꿉친구야?”
“너···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파악하기 위해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네가 전에 아플 때 잠꼬대로 부르길래 누군가 했지!”
“내가 그랬다고?”
“응·”
“····”
“리자는 뭐하는 애야? 얼마나 친했어?”
나는 대체 왜 잘 때 그 이름을 불렀을까·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상황만은 죽어도 오지 않길 바랬는데·
“이제 안 친해·”
“그러면 왜 그렇게 애타게 불러?”
“그렇게 부른 적 없어·”
“아무튼!”
“····”
“왜? 왜? 왜 그렇게 불러?”
트리샤의 천진난만함이 이토록 고통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걔가 내 첫 작품을 가지고 떠나갔거든·”
“진짜?”
“응·”
“그러면 왜 손깍지 낄 때 불러?”
어찌저찌 벗어났다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올가미를 던진다· 대체 내가 잘 때 무엇을 본 것일까·
“뭐?”
“손깍지··· 그니까 내가 한 게 아니구 네가 잘 때 막 내 손에 강제로 끼면서 그 이름을 불렀어·”
“나 그런 잠버릇 없어·”
앞으로 재갈을 물고 자든가 해야겠다·
“했어! 분명히 들었어·”
“···그냥 어쩌다 한 거겠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또 무슨 질문이 들어올까 두려워 그녀에게서 슬쩍 등을 돌렸다·
그러자 트리샤가 팔을 뻗어 내 옷을 꽉 잡아당겼다·
“리자랑은 나보다 친했어?”
“왜 지난 사람이랑 비교해·”
“친했었냐구·”
“···응·”
트리샤의 숨이 멈춘다· 잠깐 시간이 멈춘 것처럼 조용해졌다·
“리자랑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어?”
여자들의 직감은 때로는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다·
“아니·”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적어도 내 세계에선 그 말은 진실이었다·
“리자랑 나· 둘 중에 누가 더 친구야?”
누구랑 친하냐 누가 더 좋냐도 아닌 누가 더 친구냐니· 트리샤는 무얼 확인하고 싶은 걸까·
“당연히 너지· 그건 왜 물어·”
트리샤가 다시 내 옷을 툭툭 잡아당겼다·
“내 친구 내가 밤새 간호하고 아껴주는데 고생하고 마음 아픈 건 난데 다른 사람 이름을 부르니까··· 당황스럽고··· 화도 났었어 많이!”
“····”
감정의 잔재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던 건지 트리샤가 돌연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나왔다·
“가서 잘래· 그리고 데미안 밤에 몰래 나가서 또 다치면 절교야· 영원히!”
그녀는 그렇게 도망치듯 내 방을 빠져나갔다·
***
어제와 같은 시각· 칼리오스는 그때와 같이 묘비에 살짝 걸터앉아 있었다· 다행히 어제처럼 수상한 서류들을 뒤적이지는 않았다·
“여전히 대화가 안 되나?”
프리실라와의 관계에 변화가 있었나 묻는 것이었다·
“네·”
프리실라와는 아직 진전이 없었다· 뭐 그래도 다행인 점은 자고 난 뒤에 목검이 평소대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래 마음 정리는 됐나?”
“···아뇨·”
“솔직해서 좋군·”
“오늘은 뭐 할 겁니까?”
칼리오스가 묘비에서 몸을 떼고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그리고는 내 허리춤에 찬 목검을 빼냈다·
“이건 방해되니까 잠깐 치워두겠네·”
“맨손 격투라도 가르치실 겁니까?”
“아니 네 정신머리 속 오래된 기름때를 벗겨낼 거야·”
칼리오스는 내 목검을 옆에다 휙 던져버렸다·
“제 정신은 멀쩡합니다·”
“아니 네 정신머리는 썩어 있어· 정확히는 영혼이 썩어 문드러졌지· 오래된 오염물들이 수로를 틀어막고 흘려보내고 순환시켜야 할 것들을 막고 썩히고 있어·”
“····”
“그것 때문에 비가 와도 오염물이 넘치고 눈이 와도 넘치고 우박이 와도 넘치고 심지어는 해가 쨍쨍해도 넘치지! 자네는 엉망이야·”
“···저보다도 제 정신을 더 잘 아시는군요·”
“상대의 영혼을 보지 못하는 검사는 전부 땅속에 묻혔네·”
“···뭘 하면 됩니까· 정화 의식이라도 하는 겁니까?”
“아니· 난 자네에게 호흡법을 가르칠 거야·”
“···그게 의식 이름입니까?”
“숨 쉬는 법 말일세·”
“····”
나는 귀를 의심했다· 많은 걸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보다는 더 그럴듯한 걸 배우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다른 말로는 명상이라고 하지· 해본 적 있나?”
어릴 적 아카테스 신전에서 기도법의 일환으로 명상을 익힌 적이 있었다·
“네·”
“그렇다면 조금 수월하겠군·”
“그런데 명상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검을 수련하는 이에겐 필수적이지·”
“명상을 마스터하면 현자라도 되는 겁니까? 항상 인자한 미소를 띠고 죄인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그런 거 말입니다·”
칼리오스가 눈을 찡그리고는 말했다·
“그런 거라면 적어도 멋있어 보이긴 하겠군· 자네가 배운 명상법은 어떤 거였나?”
“눈을 감고 규율에 맞게 호흡하며 신이 빚어낸 경이로운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여 마음을 정화하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그 가르침과는 달리 사실 이렇다 할만한 효과를 본 적은 없었다·
“너무 거창해·”
“····”
“편하게 앉아보게나·”
칼리오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도 그를 따라 바닥에 궁둥이를 붙였다·
“눈을 떠도 좋네만 눈을 감는 게 집중하기 편할 걸세· 잠들지 않을 수 있다면 누워도 상관없어·”
나는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호흡하게·”
“그거면 됩니까?”
“몇 초간 들이마시고 몇초간 내쉬라는 가르침은 잊어· 자네 몸이 원하는 대로 호흡하고 그거에 집중하게·”
나는 그의 말대로 긴장을 풀고 천천히 호흡했다·
그러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어젯밤 트리샤의 말들이 떠올랐다·
“마음속 빈 공간에 온갖 상념들이 밀려들 거야· 자연스러운 일이지· 억지로 몰아내지 말게· 상념이 들어왔구나 하고 생각하고 다시 흘려보내게· 그리고 다시 호흡에 집중하게·”
“····”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네· 이 빌어먹을 명상이 대체 뭐가 도움이냐고 묻고 싶겠지· 이건 거창한 행위가 아니야· 어설픈 가르침은 잊어· 이건 자넬 오욕을 초월한 현인으로 만들어 주지 않아· 명상을 해도 똑같이 웃고 울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시기하고 두려워하고 온갖 아름답고 추한 인간의 감정을 똑같이 느낄 걸세· 자네의 본성 그대로·”
명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한 것이었다·
“한가지 달라지는 건 한 발 떨어져서 그 감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지· 기뻐하면 그 기쁨을 볼 수 있고 분노하면 그 분노를 볼 수 있지·”
칼리오스는 마치 내 속을 읽은 것처럼 알고 싶었던 물음에 답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줄 알면 타인을 볼 수 있게 되네·”
“····”
칼리오스도 나와 같이 숨을 한 번 고른다·
“타인을 볼 수 있을 때야 비로소 마스터리의 경지에 한발짝 내디딜 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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