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9
정해진 시각이 되자 자연스레 눈이 떠진다· 수개월간 메이드 일을 하다보니 몸에 배인 것이다·
리리아는 기지개를 켜고 촛불을 켰다· 그녀가 머무르는 실베린의 저택은 고성을 개조한 것이었기에 손봐야 할 것이 많았다·
저번 주엔 1층 발코니에 말벌집이 발견되어 마법사를 고용해 정리했고 이번 주엔 빗물이 새는 곳을 보수했다·
데미안은 학업 때문에 저택을 관리하기 힘들었으니 집사와 메이드가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해야 했다·
침대에 앉아 머리를 싹싹 빗고 메이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뒤 하루의 시작을 위해 창문을 열었다· 바깥 풍경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다·
“어?”
정문 앞에 마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데미안이 외출을 하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는 걸 의미했다·
“···데미안 님!”
그녀는 들뜬 나머지 다른 할일은 다 제치고 데미안의 방으로 곧장 달려갔다·
***
“으음· 더워····”
세실은 숙취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중에 잠버릇처럼 입던 옷을 벗어던졌다·
몸에 땀이 차고 두꺼운 이불은 걷어 차버렸지만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짜증이 나버려 입고 있던 상의를 마저 던져버렸다· 집에 있을 때의 버릇이 무의식적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다 묘한 위화감이 들어 세실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긴 어디·”
높다란 천고와 투박하고 거친 석벽· 딱딱한 내부 분위기를 화사하게 꾸며주는 커튼과 양탄자· 발코니 너머로 보이는 투명한 지평선· 모든게 낯설었다·
벽난로에는 장작이 한가득 들어 내부를 후끈하게 달구고 있었다·
“아 맞다· 어제 술····”
대마법사 실베린 교수의 저택임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몸을 풀고 땀에 젖은 속옷들을 벗어서 침대 위에다 휙휙 던져버렸다·
“누구 방이지?”
그리고는 근처에 있던 옷장 서랍을 뒤졌다·
하얀 셔츠 하얀 셔츠 하얀 셔츠·
남성용 셔츠만 한가득 들어 있다·
“아우 더워·”
그녀는 마지막 칸에 놓인 수건을 꺼내서 밑가슴에 찬 땀을 닦고 침대에 휙 던져버렸다·
“데미안 방인가?”
그녀는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거기엔 말라붙은 잉크와 쓰다만 편지가 있었다·
“실베린 선생님께····”
그렇게 첫줄을 적고 다음은 이어지지 않았다·
“데미안 맞네·”
심심해진 그녀는 침대 옆에 있는 거울 앞으로 갔다· 그러고는 자기 몸을 감상했다· 다리를 한 번 들어보기도 하고 살짝 틀어서 옆선을 살피기도 했다·
“이 잘난 걸 써보지도 못하고 연구실 골방에서 썩혀야 하다니····”
그러던 중 눈 밖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 낯선 존재는 세실에게 잠깐의 시간도 주지 않고 곧장 문을 벌컥 열었다·
“데미안 님!”
“···?”
나체의 세실과 리리아가 서로 마주쳤다· 세실은 무방비로 낯선 인물을 맞이했음해도 동요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잠깐의 시선 교환 끝에 리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
“너는 누군데?”
“저는 데미안 님의 메이드인데요? 그쪽은 누구신데 여기 계세요? 그 그것도 무례한 차림새로····”
“데미안 친구인데? 너는 왜 주인의 방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
“데미안 님은 원래 이 시간에 깨어나 계시니까요· 그리고 이래도 된다고 허락하셨어요·”
“나도 내 발로 온 게 아니라 데미안이 날 여기 둔 거야· 그러니 할 거 하고 가봐·”
세실은 리리아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노려보아도 아랑곳 않고 거울 앞에서 포즈를 잡았다·
“옷··· 입어주세요· 여긴 실베린 님의 저택이니 격식을 갖춰주세요· 그리고 데미안 님 곧 오실수도 있어요·”
그녀는 듣지도 않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중얼거렸다·
“살이 조금 쪘나····”
“저기요···!”
세실이 한숨을 푹 쉬고는 서랍에서 셔츠를 꺼낸 다음 맨몸에 걸쳐 입었다·
“중요한 데는 다 가렸으니까 됐지?”
리리아가 심통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 옷이 없으면 제가 메이드복을 가져올게요·”
세실은 리리아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거울 앞에 서서 옷맵시를 감상했다·
“가슴 때문에 너무 부-해보이나· 이렇게 하면····”
그러고는 허리 라인에 맞게 옷을 조였다·
“저기요!”
그제서야 세실이 돌아보며 리리아를 위아래로 훑고는 말했다·
“애들 거는 작아서 안 맞아·”
리리아가 살짝 주늑든 표정으로 답했다·
“큰 것도 있어요! 그리고 그쪽도 털 하나 안 났으면서 어른인 척 하시나요!”
“넌 이 몸을 보고도 날 애라고 생각해?”
그러던 중 복도에서 또각또각 부츠 소리가 울렸다·
데미안이 방으로 아침 수련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상반신이 땀에 젖은 상태로 문 앞에 섰다·
“뭐하고 있어요?”
“저····”
“앗 데미안!”
데미안의 시선이 세실 쪽으로 향한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리리아를 빼내고 인사도 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쾅!
그리고는 복도에서 리리아에게 말했다·
“리리아 실베린 교수님 옷 중에··· 전에 와인 흘려서 안 입는 원피스 있죠·”
“앗··· 네·”
“그거 가져와 주세요·”
리리아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 눈가에도 눈물이 살짝 고여 있었다·
“왜 그래요· 제 친구가 뭐라 그랬어요?”
“···네에· 아니 아니에요· 그보다 이거··· 드리려고 왔어요·”
리리아는 뒤늦게 벽난로에서 꺼낸 검은 편지를 데미안에게 건넸다·
“이건 원래 조각난 채로 왔나요?”
“아뇨··· 제가 청소하다 실수로 찢었어요··· 죄송해요·”
데미안은 내용을 대충 확인하고는 말했다·
“그것 때문에 울먹인 건가요?”
“앗 아뇨· 그러니까· 이잉····”
“그럼 제 친구랑 싸워서 그런 건가요?”
“아뇨· 그것도 아니에요····”
“알았어요· 죄송할 거 없어요· 이 편지 리리아가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발견하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정말 중요한 일을 해줬으니 제가 오히려 고마워해야죠· 찢어진 건 신경 안 쓰니까 다녀와요·”
“네 다녀올게요·”
리리아가 떠난 뒤 세실이 문을 열고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데미안 나 네 방에서 이상한 거 발견했어·”
“지금 내 방에서 가장 이상한 건 너야·”
“이거· 침대 밑에 엄청 긴 흰머리 발견했다! 누구꺼야?”
“내가 모르는 손님이 들렸었나보지·”
“그래? 시시하네· 아 저 꼬마 여기서 일하는 애야?”
“응·”
“귀엽더라구·”
“둘이 투닥거린 것 같았는데·”
“아니 아무일 없었어· 귀여워·”
“싸운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옷··· 가져올 테니까 안에서 기다려·”
“셔츠 잘 어울러?”
“필요한 거 다 가져다 줄게· 그 안에 박혀 있어·”
세실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속옷 나한테 맞는 거 없을텐데?”
“있어·”
“···뭐? 누구껀데? 메이드?”
데미안이 세실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야? 그럼····”
세실이 무언가를 직감하고는 말꼬리를 흐렸다·
“난 미술부 수업이 있어· 오후에 또 수련해야 하고·”
“미술부에 그렇게 성실히 임할 필요가 있어? 그거 쉰다고 뒤쳐지는 것도 아니잖아· 조금만 더 놀자· 응? 저택 구경도 시켜주고!”
“안돼·”
데미안은 급하게 자리를 떴다·
세실은 떠나는 데미안에게 소리쳤다·
“너 교수님 사이즈는 어떻게 아는 거야!”
데미안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세실이 멍한 표정으로 홀로 중얼거렸다·
“···진짜였어?”
***
아마릴리스의 편지를 읽고 나는 한동안 충격에 잠겼다·
프리실라가 사실은 녹턴이라는 마법사의 영혼이었다니·
나는 칼리오스에게도 이 사실에 대해 알렸다· 프리실라의 정체· 그리고 메이헨과 안개도시에 관한 이야기까지·
칼리오스는 편지를 몇초간 대충 훑어보고 내게 돌려주었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물었다·
“알고 계셨던 겁니까?”
“아니 몰랐네· 다만 어렴풋이 직감은 하고 있었지·”
“그럼 인간의 영혼이 들어간 게 맞지 않습니까?”
“아니 죽음의 땅이 왜 죽음의 땅으로 불리는지 모르는군· 프리실라는 인간이 아니야· 마검이 되기 한참 전부터 인간이라 부르기 힘든 존재가 된 상태였지· 그 땅에서 멀쩡히 살아 숨쉬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 이 아마릴리스란 그 정체불명의 여인도 마찬가지일 거고·”
“····”
“강조해서 말하지만 프리실라를 인간이라 생각하지 말게· 마검이 된 이상 영원히 돌이킬 수 없어· 자네는 그걸 구원할 수도 없고 말이야· 검은 목숨을 의지할 파트너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필요에 따라 버리거나 희생시켜야 할 소모품이기도 하네· 검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망설임이 생기고 그로 인하여 생긴 찰나의 간극 때문에 자네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곰곰이 따져봐도 칼리오스의 말엔 틀린 게 없었다· 프리실라는 인간이 아니고 마검이 되기 전에도 인간이 아니었고 내가 구원할 수도 없다· 그리고 마검은 내 목숨을 지키는 도구로써 기능하는 것이지· 가엾은 소녀 녹턴에 대한 동정심은··· 안타깝지만 묻어두는 게 최선이다·
“···알겠습니다·”
“이건 좋은 신호네· 자네에게 마검을 보낸 존재가 누군지 알아낸 것 아닌가· 급할 거 없이 시간을 두고 그 여자가 주는 정보를 천천히 받아먹으면 되네·”
“아마릴리스에게 찾아갈 방법은 없습니까?”
“자네에게 프리실라와 친해지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지· 죽음의 땅은 지도가 존재하지 않고 만들 수도 없네· 그곳에 발을 디딘 인간은 모든 감각을 교란당하기 때문에 목표한 곳을 찾아가는 건 불가능하지· 메이헨이란 지명을 안다고 해서 이 땅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
“하지만 프리실라라면 다르겠지· 죽음의 땅에서 나온거니 최고의 안내원이나 마찬가지지· 자넬 아마릴리스에게 인도할 존재는 오직 프리실라 뿐이야·”
“···교수님에게는 아무말 없었습니까?”
“자네가 봤을 때 나랑 프리실라가 잘 맞는 것처럼 보였나? 난 자네한테 골칫덩이를 떠넘겨서 이제 숨통이 트인다네·”
칼리오스가 마검사냥꾼으로 변장해서 싸웠던 때를 돌이켜보면 프리실라를 쓸 때마다 그의 몸은 저항과 부딪쳤었다· 게일은 뭐 말할 것도 없었고·
“프리실라가 교수님 팔을 아작낼 뻔했죠·”
“내 팔은 고작 그런 거로 아작나지 않아· 물론 부담을 주긴 했지· 아무튼 나와도 상성이 좋지 않고 자네 손에선 내숭을 떠는 아가씨처럼 잠잠하지 않은가· 그건 자네 말곤 다룰 사람이 없어·”
“프리실라와 대화가 통하게 되는 날엔··· 죽음의 땅으로 가야하겠군요·”
“그게 꼭 필요하다면· 거기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자네의 목숨과 맞바꿀 가치가 있다면 말이야· 그때 갈지말지 자네가 선택해야겠지·”
“····”
“자 그럼 시작하게· 느긋하게 수련한다고 해서 당장은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그리고 이터니아는 죽음의 땅에 자넬 혼자 보내지도 않을 걸세·”
“저와의 동행을 자원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곳이 좋아서 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어·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이니까 가는 것 뿐이지· ”
“····”
“자 이제 다시 마음을 비우는데 집중하게·”
그리고 칼리오스는 다시 그에게 던질 돌들을 줍기 시작했다·
“이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기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십수년이 걸리는 사람도 있고 그 이상을 바쳐도 안되는 이들이 수두룩하지·”
“····”
“더 단축시킬 방법은 없습니까? 졸업할 때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자네가 신이 내린 재능을 받고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면 삼 년이면 되겠지·”
“한참 멀었군요·”
칼리오스가 약올리듯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네· 날 조금 더 일찍 만나지 그랬나?”
“····”
데미안이 바닥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호흡에 집중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자네한테 기대중이네·”
“···뭘 말입니까?”
“어떤 기록을 세우게 될지 말이야·”
“···?”
칼리오스는 늘 그랬던 것처럼 살기를 담아 돌을 던졌다·
데미안은 여전히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고 몇 초간 숨을 죽인 뒤에 그 다음 돌을 던졌다·
“흠·”
칼리오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좁혔다· 그가 살기를 내뿜었을 때 데미안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린 것을 잡아낸 것이었다·
“자네 소리가 들렸나?”
그가 묻자 데미안이 천천히 눈을 뜨고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소리 말입니까?”
***
세실은 오후 일과를 마치고 윗드러프관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날 해야 할 공부들은 전부 끝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녀가 빌린 옷과 속옷들은 전부 실베린의 것이었다· 세실은 남들보다 겁이 없는 편에 가까웠지만 실베린 같은 대마법사의 물건을 마음대로 차지하는 건 그리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평상복으로 갈아 입고 저택에서 빌린 옷들은 곱게 접어 바구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윗드러프관 3층 끝에 위치한 데미안의 호실로 향했다· 문 앞에서 바구니를 놓고 돌아가려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뭐야?”
“아 깜짝이야·”
루나가 쥐도새도 모르게 복도에 서서 세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거··· 뭐냐구·”
“뭐긴 궁금하면 직접 보던가·”
“···어제 데미안이랑 뭐 했어?”
세실이 미간을 찡그렸다· 남의 데이트에 사사건건 참견하는 듯한 모습이 선을 넘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뭐하긴· 남녀가 같이 데이트하고 술에 잔뜩 취해서 같이 집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기겠어? 잘 생각해봐·”
“····”
루나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곤 숨이 멎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세실은 그런 루나를 무시하고는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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