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1
“우릴 공격할 것 같아?”
“아니 그냥 우리가 좋아서 그러는 것 같아!”
내 강점이자 약점이 정령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정령들이 우릴 포위하듯 쫓아오는데도 나는 그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구나·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강한 영력을 지니고 있다면 나도 형체를 볼 수는 있다만 그게 전부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리그베드로 가야지·”
“가서 뭐 하려구?”
“너랑 놀려고·”
트리샤의 눈이 점점 커진다·
“진짜? 정말 나랑만 놀려고 가는 거야? 다른 거 없이?”
“응·”
“데미안 진짜 날 섬기기로 마음 먹었구나! 진짜 너무 이뻐! 이리와! 안아줄게!”
트리샤가 잔뜩 신나서 팔을 벌린다· 솔직히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보는 눈이 있으니까 조금만 자중하자·”
“어차피 저 까마귀들밖에 안 보잖아!”
“저게 누가 부리는 정령일 줄 알고?”
“글쎄 혹시 금발?”
트리샤는 루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법이 없다· 루나는 언제나 금발이다· 루나는 트리샤의 이름 정도는 또박또박 잘 불러주는데 참·
“그럴 수도 있고·”
“갑자기 까마귀들 싫어졌어·“
“우리가 반가워서 따르는 걸수도 있지· 루나는 캠퍼스에 정령들을 풀어놓으니 알게모르게 마주쳤을 거 아니야·”
트리샤에게 좋게좋게 둘러댔지만 사실 나도 묻고 싶던 것이기도 하다· 정령들이 비정상적으로 몰려온 이유는 뭘까· 나한테 보내는 모종의 메시지는 아닐까·
“난 싫어· 우리 둘이 노는 건데 왜 금발이 끼어?”
“그냥 내 막연한 예상이지 반드시 루나란 법도 없어· 까마귀한테 직접 물어보지 않는 한 모르지· 널 보호하기 위해 미궁에서 보낸 걸수도 있고·”
“···알았어· 마음대로 하라 그래!”
트리샤가 의외로 빠르게 수긍한다· 평소대로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는데 또 이러니까 괜히 미심쩍기도 하다·
트리샤는 까마귀들에게 관심을 끄고 창밖을 감상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참새 한 쌍이 사랑할 곳을 찾아요· 흠흠-”
그러고는 신발을 벗고 니삭스도 돌돌 말아 벗어서 옆에다 툭 던진다· 익숙하다· 마차에 타면 늘 하던 행동이니·
나는 그동안 어떻게 해야 트리샤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식사? 연극? 파티는··· 초대받은 곳이 없으니 안 되고· 트리샤가 그런 평범한 걸로 충분히 만족할지도 의문이다· 허영심이 그리 많은 애도 아닌 것 같은데·
“물레방앗간은 이미 다른 참새가 있어요· 흐음-”
적당히 시간 뗴울 만한 게 떠오리지 않는다· 루나와의 오해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팔자 좋게 데이트나 해야하는 이 상황이 영 내키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무슨 소용이겠나· 루나는 한동안 날 피할텐데· 기다리는 수밖에·
“풍차에도 다른 참새가 있어요- 우리는 보리밭에 누워 사랑을 나눠요- 흠흠·”
“그 노래 누가 가르쳐····”
이상한 노래에 주의가 팔린 틈에 트리샤가 변장 아티팩트를 손가락에서 빼내려 들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트리샤를 제지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왜? 나 원래 마차 안에서는 벗었잖아·”
“저 정령이 루나의 정령이면 어쩌려고?”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저렇게 많은 수의 정령이라면 높은 확률로 루나의 정령이 맞다· 그리고 루나가 아니라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감시를 붙인 거니까·
“상관없어·”
“무슨 소리야?”
트리샤가 새침하게 툭툭 내뱉는다·
“전에 필라이온 도서관에서 봤어· 걔 사서로 일하고 있는 거· 걔도 미궁에 발 담갔는데 달라지는 게 있어?”
“····”
“내 본모습 알아서 뭘 하겠어? 더 이뻐진 모습 보고 감탄밖에 더 해?”
루나는 트리샤를 이용해서 이득을 취할만한 인물은 아니다· 트리샤의 말을 들어보니 또 수긍할만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변장을 풀려는 트리샤 본인의 의지가 너무 확고해 보였다·
“괜찮겠어?”
“내 진짜 소중한 시간을 남 눈치보면서 보내기 싫어· 이젠 지긋지긋해!”
“····”
“나가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데··· 나가도 감시당하고 눈치봐야하면 그게 소용이야!”
트리샤는 작정한 모양인지 냅다 아티팩트를 빼버렸다·
이건 우발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누적된 감정이 쌓여서 폭발한 것이 분명하다·
나도 생각이 바뀌었다· 리그베드는 다음에 가는 게 좋겠다·
나는 마부에게 부탁해 경로를 틀게 했다· 리그베드에 가서 뭘 해도 딱히 즐거울 것 같지 않았다·
자칫 잘못 자극하면 본모습으로 리그베드를 쏘다닐 기세이니 차라리 이러는 편이 훨씬 안전할 거다·
마차는 경로를 틀어 이터니아 강변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눈이 탁 트이는 풍경이 펼쳐진다·
굽이치는 강물과 햇살에 비친 아름다운 윤슬· 날이 더욱 따뜻해져 강길을 품은 숲은 녹음이 더욱 짙어져 있다·
얼마전 범람했던 강물이 모래톱을 더욱 두텁고 매끈하게 다듬어 놓았다·
트리샤도 무심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얼굴을 박고 감탄사를 내던졌다·
“이뻐!”
트리샤가 노래를 멈추고 강변 풍경을 감상한다· 학기초 실베린의 저택에서 등교할 적 우리는 이 길을 매일같이 지나쳤었지· 그리고 꽤 즐거웠던 추억도 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강변에 마차가 우뚝 멈춰서자 트리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여기는 왜?”
“계획 바꿨어·”
“여기서 놀거야?”
“응· 계획 바꿨어· 리그베드에선 사람들 눈치만 봐야 되잖아?”
나는 마차에서 내리고 문 앞에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문밖으로 눈만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 숨어 사는 데에 이골이 난 그녀였지만 정작 본모습으로 세상에 나오려니 습관적으로 몸을 가리려 든다·
“내···려?”
“주변에 아무도 없어·”
“진짜?”
“그리고 이 근처에 사람 눈에 안 띄는 비밀스런 곳이 있어·”
굽이친 길을 조금만 더 이동하면 마차로는 가파른 언덕 너머로 꺾이고 강변의 풍경은 숲과 언덕에 가로막히게 된다· 내 계획은 시선이 차단된 그 장소로 빠르게 달려가는 거였다·
그녀가 기대감을 내비친다·
“좋아· 좋아!”
“문제는 마차가 진입을 못해서 조금 뛰어가야 한다는 거야·”
마차가 진입하면 아마 모래에 박혀 움직이지 못할 거다·
“조금?”
“응 조금·”
“재밌을 것 같아!”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깃든다· 그리고 팔을 뻗어 내 손을 잡는다· 나는 놓치지 못하게 깍지를 끼고 꽉 붙들었다·
나는 근처에 지나가는 마차가 있나 다시 살피고는 신호를 줬다·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고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나와 트리샤는 함께 손살같이 평지를 달려나갔다·
“꺄앗!”
강바람이 우리를 한 번 쓸고 지나간다· 나는 달리기에 열중하다 트리샤를 한번 바라보았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씩씩하게 잘 달렸다·
“푸핫 하하핫 아하하하!”
트리샤가 뭐가 우스운지 달리는 와중에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다시 앞을 보고 달렸다· 그러다 훅 하고 깍지낀 손이 뭔가에 훅 걸린다·
돌아보니 트리샤가 발이 걸려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다행히도 푹신한 모래에 얼굴을 박아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럇! 쉬쉬·”
멀찍이서 마부 소리가 들린다· 지금은 모습이 안 보이지만 꺾인 길에서 나오면 우리와 마주칠 수도 있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트리샤를 안아들고 달렸다·
트리샤가 얼굴을 덮은 백발 머리카락을 쓱쓱 넘긴다· 한쪽 볼에 모래를 잔뜩 묻히고도 아직도 신나서 까르르 웃고 있었다·
“아하하하! 아 너무 웃겨!”
그렇게 마차로에서 한참 벗어난 백색 모래톱 위에 그녀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돌렸다·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모래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서 몸을 들썩였다·
“뭔데· 나도 같이 웃자·”
“그냥 웃기잖아!”
“이게?”
“푸흐흡 데미안 바보 바보·”
나는 예고도 없이 곧바로 트리샤를 어깨에 들쳐올렸다·
“꺄앗! 뭐해! 바보야!”
트리샤가 내 등짝을 탁탁 때린다· 하지만 힘이 안 실려서 하나도 안 아프다·
나는 그대로 강물로 달려가 물에 빠졌다·
***
우리는 한동안 수영을 즐기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 둘다 옷을 입을 채로 뛰어들어 몸이 무거웠다· 트리샤도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어기적거리며 나를 뒤따랐다·
그녀는 백발 머리를 수건 짜듯 물기를 빼내며 말했다·
“근데 여기 엄청 좋다· 햇살이랑 모래는 따뜻하고 보는 사람도 없고· 물은 또 엄청 맑아·”
그녀는 적당한 자리로 달려가고는 모래 위에 몸을 냅다 눕혔다·
“옷 말려야지· 뭐해·”
“모래 엄청 따듯해! 이러고 말릴래·”
“그래라·”
나는 상의를 벗어던졌다· 트리샤가 내 몸을 물끄러미 보더니 자기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너 뭐해?”
“너도 벗잖아!”
나는 당황해서 눈을 돌렸지만 다시 보니 그녀는 속바지와 어깨끈이 달린 내의를 입고 있어서 크게 남사스런 모습은 아니었다· 물론 하얀 속살은 이전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삐약이를 소환해 트리샤의 배에 올렸다· 녀석은 자다 온 모양인지 햇볕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았다·
“계속 그러고 누워있게?”
“너도 누워!”
“난 다시 물에 좀 담그고 와야겠다·”
“다녀와!”
나는 다시 물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혼자 강물을 헤엄치는 도중에 트리샤가 멀리서 소리쳤다·
“데미아-안!”
“왜!”
“저기 야생마 있어!”
그녀가 가리킨 곳에 한무리의 야생마가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전에는 유니콘이었는데 이번엔 야생마구나·
“놀라게 하지 마!”
“밥 주고 올게!”
말을 귓등으로 알아먹는구나·
트리샤는 잡초가 자란 곳에 가서 쪼그려 앉아 풀들을 주섬주섬 뽑아냈다·
또 느긋하게 수영을 하고 나니 트리샤가 다시 날 부른다·
“흐아앙! 데미안!”
“···?”
“이리 와! 빨리!”
야생마한테 뒷다리로 차인 것도 아니고 풀만 뽑다가 왜 저리 호들갑이지· 벌레한테 물렸나·
황급히 수영해서 나와 물기도 안 뺀 상태로 트리샤에게 다가갔다·
트리샤가 울상을 짓고 내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점토 같은 게 범벅이 되어 있었다·
“흐앙· 이거 묻었어!”
순간 악취가 훅 몰려온다· 풀 뽑다가 말똥을 건드린 게 분명하다·
“····”
“어떡해! 으!”
“이리 와·”
이런 것까지 다 해줘야 하나· 트리샤의 손목을 붙잡고 강가로 끌었다· 그러고는 물에다 손을 담갔다·
“자 다 떨어지게 흔들어·”
“···응·”
트리샤가 내 말대로 손을 꼬물꼬물 움직인다· 오염물들이 천천히 씻겨나가니 그녀는 근처를 헤엄치는 송사리들을 보며 이상한 말을 했다·
“물고기들아 많이 먹어·”
“····”
이제는 이 정신세계에 적응할 때가 됐는데····
***
우린 물놀이를 마치고 모래 위에 같이 드러누워 몸을 말렸다· 나는 내친김에 속옷 하나만 입고 일광욕을 즐겼다·
옆에 있던 트리샤가 자기 다리 하나를 내 다리 위에 슬쩍 올린다·
내가 툭툭 밀어서 원위치로 돌리니 그녀는 또 슬며시 올려 다리를 교차시킨다·
마음이 평온해진다· 정신사나운 리그베드에 안 가고 여기서 놀길 잘 한 것 같았다·
참 좋은 시간인 건 맞다만 난 아직도 칼리오스가 굳이 트리샤를 딱 지목해서 놀아주라 한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트리샤·”
“응·”
“하얀 까마귀들 아직도 있어?”
“음··· 아니! 이제는 다 사라졌어·”
“그래?”
루나와는 별 상관 없는 정령들이었나·
“응·”
“그리고 교수님이 그랬잖아· 너보고 재앙수집가라고· 왜 그런 거야?”
“그거? 내가 재앙을 몰고 다녔거든!”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아니 내가 다 의도했어· 일부러 사고치고 다닌 거야·”
“왜 그런 짓을 해?”
“아무도 내게 화를 안 내니까· 어디까지 참나 시험해보려고 했어·”
“버르장머리가 없었다는 건가?”
“아니· 나한테 화를 안 내서 너무 화가 났거든!”
“이해가 안 된다·”
“말 그대로야· 왜 나한테 화를 안 낼까 엄청 고민했어· 내가 무서운 사람이라서? 나중에 커서 보복할까봐? 귀한 사람이라서? 전부 아니었어·”
“····”
트리샤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그냥 불쌍해서야· 내가 미래에 짊어져야 할 게 너무 무겁고 고통스러운 것이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책무를 나한테 떠넘긴것 같아서· 미안해서 전부 받아주고 아무도 화를 못 낸 거였어·”
“그 높은 사람들이? 이를테면 칼리오스 교수님 같은 분들 말하는 거야?”
“응· 하지만 이젠 말썽 안 피워· 난 숙녀니까!”
대체 얼마나 큰 짐을 짊어져야 하길래 칼리오스 같은 사람들이 부채감을 갖는 걸까· 그것도 이 한없이 여리고 순수한 소녀한테· 믿어지지 않는다· 내 옆에 누운 이 여자는 대체 정체가 뭘까·
“···넌 정체가 뭐야?”
“여신님?”
“신성 모독이야·”
“데미안을 괴롭히러 온 여신님!”
“우리 여신님은 커서 뭐가 되고 싶으세요?”
“빨리 엄마 되고 싶어!”
평화로운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운 듯한 기분이다·
트리샤의 소망은 과거의 리자가 바라던 것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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