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5
출항일 전날 밤 나는 가시정원 기숙사 앞에서 프리실라를 허공에 휘둘렀다·
첫 교감에 성공했으니 기세를 이어 마검 숙련도를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녹록치가 않다· 묘목검이나 반딧불검을 다룰 때와는 감각이 다르고 내가 원하는대로 힘을 분출하는 것도 수월하지 않다· 인격체의 영혼이 담겨 있어서 제어하는 방법도 다른 것일까·
검을 휘두를 때만다 불규칙적으로 서리가 툭툭 튀지만 그게 전부다· 일전에 칼리오스와 첫 전투 당시 선보였던 살인적인 냉기 폭풍은 내 힘으로는 재현이 불가능하다·
특별히 좋은 거라곤 수련할 때 덥지 않다는 것 정도·
가벼운 수련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트리샤는 일찍 잠든 건지 조용했다·
나는 홀로 방에서 마지막으로 소지품을 점검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딱 하나가 부족했다·
바로 돈이다·
잠재적으로 돈이 될 물건은 ‘사랑의 비약’하나· 시온의 스승으로부터 두차례 거금을 받았고 많이 남기도 했지만 며칠 전 대부분의 금액을 리리아에게 줘버리고 말았다·
애당초 소비벽이 크지도 아닌데다 의식주는 다 충족이 된 상태라 돈이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세실을 비롯한 몇몇 친구들에게 줄 기념품을 사줘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니 내 주머니 사정은 간사하게도 입장을 확 바꿔버렸다·
실베린의 금고에 손을 대면 단번에 해결이 되지만 그런 짓거리는 도무지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구걸을 하고 말지·
당장에 내가 돈을 벌 방법은··· 휴버트 녀석과의 내기에서 이기는 것 말고는 없다·
내 서랍에는 아직 미샤에게 날아온 편지가 남아 있다·‘달콤이’의 행방을 찾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내게 전했지만 아직 답장을 하지 않은 상태다·
미샤라는 소녀의 환심을 산다면 약소하게나마 주머니를 채울 수 있을텐데·
나는 편지지를 펼치고 잠시 고민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괜히 제국의 영애를 들쑤시는 건 위험부담이 크다·
트리샤까지 엮여 있는 이상 더더욱 조심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냥 내기는 포기하고 사랑의 비약이 비싼 값을 하길 바래야겠다·
나는 펜을 들었다·
예술가 모임 당시 미샤에게 휴버트 행세를 했었으니 그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글을 적었다·
[ 가면을 쓰고 몸에 흉터가 있는 녀석 말이지요· 저도 그 자를 압니다만 미샤 양에게 소개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여러 불미스런 일과 엮여 있는 녀석이니까요· 이를테면····]
나는 사탕이를 둘러싼 여러가지 낭설들을 결합하여 음해하는 글을 적었다· 여자를 밝힌다는 둥 여자와 은밀하게 신체를 접촉한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일전에 가면을 쓰고 강물에 빠진 걸 구해준 이후 나와의 신체 접촉으로 크게 혼란을 겪었던 그녀로서는 ‘변태가면’에 대한 이야기가 심적으로 불쾌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사탕이를 향한 관심은 사그러들겠지·
***
“나도 가고 싶은데····”
나는 이른 아침부터 클라리디움에 가고 싶어서 입술이 삐죽 나온 트리샤를 달랬다·
“신기한 장난감 사올게· 나 없어도 식사 잘 챙기고·”
“네 가방에 구겨 들어간 다음에 몰래 타면 안돼?”
“말썽 피우지 말고·”
나는 마검들과 소지품을 꽁꽁 싸매고 기숙사를 나섰다·
해가 아직 정수리만 빼꼼 내민 시각부터 마차를 타고 곧장 리그베드 선착장으로 향했다·
일찍 출발했다고 생각했는는데 나는 제법 늦은 편이었다·
선착장에는 부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른 때임에도 주변에는 배를 구경하는 구경꾼들로 가득했다· 꼭 어디 머나먼 땅으로 이주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학생들이 모여 미술부원을 배웅했다·
간단하게 인원 점검을 마치고 하나씩 배 위에 올라탄다·
조르지아 교수는 떠나는 학생들 하나하나 안아주었다·
그렇게 가만히 내 차례를 기다리던 찰나·
“데미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배를 구경하는 인파 속에서 세실이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세실?”
그녀는 날 발견하고선 곧장 인파를 빠져나와 내게로 달려왔다·
“왜이리 늦었어!”
“여기서 뭐하는 거야?”
“너 기다리고 있었지·”
“뭐 대단한 일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세실이 픽 웃으며 말했다·
“원래 남자가 출항하는 날엔 여자가 배웅해야 한다고 그랬어· 그래야 돌아올 마음이 생긴다고·”
“난 뱃사람이 아니니 걱정마· 살면서 바다를 본 적도 없고·”
세실이 손으로 내 앞머리를 정돈하고 옷에 붙은 먼지들을 툭툭 털어낸다· 퍽 다정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니 더 걱정이네· 한 번도 안 가본 곳에 떠나는 거잖아· 바다가 얼마나 위험한데·”
“····”
세실이 내 뺨을 톡톡 두드린다·
“바다는 엄청 깊고 해류도 강하니까 함부로 수영하지 말고· 파도 치는 날엔 선실에 가만히 있어· 알겠지? 생선도 아무거나 덮석덮석 잡지 말고· 독가시에 찔릴 수도 있으니까·”
“왜 갑자기 내 엄마처럼 구는 거야?”
“그래도 못생겼으니 세이렌한테 잡혀갈 일은 없겠네· 그건 안심이다·”
세실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가슴팍에다 걸었다· 회색 빛깔 보석이 박힌 작은 뱃지였다·
“이건 뭐야?”
“선물· 이거 보고 내 기념품 사는 거 절대 잊지 말라고 붙이는 거야·”
“이상한 거 아니지?”
“넌 왜 그렇게 의심이 많니· 내가 너 잡아먹을까봐?”
“····”
세실은 전에 스티치에 상대의 위치를 몰래 추적할 수 있는 마도구를 내게 건넨 적 있었다·
“걱정마· 못생긴 애는 맛도 없댔어·”
“더 할 말 있어?”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 그리고····”
세실의 혀 끝이 마른 입술을 살짝 적신다·
그러다 조르지아 교수가 날 부른다·
“데미안! 너 거기서 뭐하니!”
우리의 대화는 급하게 마무리되었다· 세실이 나는 밀어 보낸다·
“자 가봐·”
“와줘서 고마워·”
세실은 뒷짐을 지고 뿌듯한 듯이 옅은 미소를 짓는다·
나는 조르지아 교수에게 향했다· 부원들을 전부 배로 올려보낸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를 한 번 안아주었다· 그러고는 작게 귓속말을 전했다·
“1학년 중에는 네가 가장 듬직해· 데미안이 있으니 그나마 안심된다·”
“다녀오겠습니다·”
포옹을 마치고 그녀는 내 등을 툭툭 두르리며 배로 올려보냈다·
선원들이 마지막 점검을 끝낸 뒤 밧줄을 풀고 선박과 연결된 판자를 회수한다·
항구에서 출항을 알리는 종이 힘차게 울리고 배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난간에 걸쳐서 멀어지는 리그베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세실이 선착장 끝단에 서서히 밀려나는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든다· 그 아련한 모습이 꼭 원정길에 남편을 떠나보내는 귀부인 같다·
그러던 중 세실의 옆쪽에 또다른 익숙한 얼굴이 불쑥 나타난다· 양갈래와 그 옆 분홍빛 머리의 소녀· 제국 아카데미 오인방이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와 진짜 황금제비선이었네?”
“우리한테는 이런 것도 없었잖아?”
“이터니아가 황실이랑 연이 있었나?”
친구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와중에 미샤는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본다·
“휴버트 씨?”
연이어 세실이 휴버트라는 말을 들은 모양인지 옆을 돌아본다·
“휴···버트?”
시선이 미샤에게 고정된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세실이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가슴이 덜컥한다·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나갔다·
헤일리가 급하게 달려와서 내 몸을 붙들었다·
“너 뭐해?”
쭉 뻗은 내 발 밑에는 물이 넘실거린다· 다시 제정신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배는 멀어져갔다· 그렇게 멀어져서 점이 될 때까지 세실은 미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
우리의 배 황금제비선은 마법 추진체를 달고 이터니아 강을 시원시원하게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렇게 한나절을 쭉 나아가면 바다에 진입하게 된다고 항해사가 설명했다·
갈수록 강폭이 넓어지고 물살도 한층 느려진다· 나는 난간에 몸을 걸쳐서 한적한 풍경을 감상하며 어지러운 마음을 달랬다·
세실의 그 모습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서늘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는 생각을 애써 지워버렸다· 내가 죄 지은 것도 아닌데·
혹시 모르니 세실을 위한 기념품은 정말 심혈을 기울여 골라야겠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선실에서 낮잠을 청했다·
몇 시간 후 깨어나고 보니 밖은 해질녘이었다·
갑판에 나오니 바람을 맞고 있는 헤일리가 내게 손짓했다·
“어 신입아·”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난간에 몸을 기댔다·
“제니아 선배는요?”
“울렁거려서 잔대·”
지금 보니 헤일리의 눈은 힘이 살짝 빠진데다 입가에 붉으스름한 게 묻어 있다· 못 본 사이에 밀반입한 와인을 한 잔 걸친 모양이다·
“선배는 괜찮아요?”
“나는 바다 보러 나왔어·”
“바다요?”
“봐 이제 막 하류를 벗어났거든·”
헤일리가 난간 밖으로 보란듯이 손을 쭉 뻗는다· 한쪽 면에는 육지가 보이고 한쪽 면에는 지평선 가득히 노을빛을 받은 바다가 보인다· 우리의 배는 강과 바다의 경계에서 이제 막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바다··· 바다네요·”
“뭐야· 바다는 지겹게 본 얼굴이네?”
“아뇨· 바다는 처음 봅니다·”
“그래? 이렇게 대단한 걸 보면 막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하지 않아?”
낭만에 취할 감수성이 남아 있었던 옛날이라면 뭔가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오지 않는다·
첫경험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기대만큼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기 마련이다·
바다를 보자고 리자와의 약속하던 때를 잠시 추억했다· 낭만적이고 로맨틱하던 순간을 꿈꾸던 어린 시절의 기대가 참 무색하게도 내 첫경험은 무미건조하게 이루어졌다· 멸망을 앞둔 도시를 향하며 이렇게 연이 이어질 거라곤 꿈에도 몰랐던 술에 취한 금발의 제국 여자와 함께·
“선배는 바다로 나와서 설레십니까?”
“글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멀미를 해서 그런 건지 바다를 봐서 그런 건지 널 봐서 그런 건지 분간이 안 간다·”
“걱정 마세요· 전 고자질은 안 합니다·”
“아무래도 그거 때문인 것 같다· 나 어릴 때 항해사가 꿈이었거든· 뭔가 모험하는 기분이 들어서 두근거리는 것 같아·”
“선배는 어렸을 때 말괄량이였을 것 같습니다·”
“맞아· 엄청난 말괄량이였지· 내 쌍둥이 오빠와는 다르게·”
“쌍둥이 오빠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난 걔 때문에 마음고생 좀 했어· 계산적이고 똑똑하고 강하고 굉장한 미남이라고들 칭송하는데 그건 혈육이라서 잘 모르겠고· 너무 완벽해서 같은 날 같은 피 같은 배로 태어난 나는 왜 그 모양이냐고 늘 비교당했지· 항해사의 꿈도 그렇게 짓밟혔고·”
“선배도 대단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고마운데 혈육이 나와 비교될 정도로 우월한 건 사실이야· 그 녀석한테는 늘 칭송하듯 따라 붙는 말이 있어· 로얄로더라고· 제국 역사상 최고의 기사들이 걸어온 길을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따라갔으니까· 비현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
“나와는 다르지· 나는 뒤에서 몰래 일탈만 하고 사고치고 그 녀석이 벌인 유일한 일탈이라곤····”
헤일리가 말꼬리를 흐리고 잠시 머뭇거린다· 그러다 이내 다시 술기운에 의지하여 말을 잇는다·
“···제국 아카데미가 아닌 이터니아에 입학한 거 딱 하나뿐이야·”
“이터니아에요···?”
“응·”
“제가 아는 사람입니까?”
헤일리가 난간에 턱을 괴고 멍한 표정을 짓는다·
“엘리엇 펠튼 이름을 못 들어본 사람은 없을걸·”
“····”
“물론 이건 비밀이야· 난 엘리엇과 가족으로 엮이기는 죽어도 싫거든·”
내가 입학하기 전부터 엘리엇의 이름을 곱씹고 살아온 걸 헤일리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침을 한 번 삼키니 입 안이 말랐다· 가슴이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아렸지만 그 통증도 몇 번의 호흡 이후 서서히 괜찮아졌다· 이름이 썩 반갑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못 들어줄만큼 괴롭지도 않다·
왜 이리도 빨리 적응하는 것일까·
바다가 날 설레게 하지 않으니· 엘리엇이란 이름도 날 쓰라리게 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나도 이제 변하는구나· 파도에 모든 게 희석된다· 내 슬픔 분노 추억까지 전부·
“쌍둥이 혈육을 질투하십니까?”
“옛날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 혈육은 참 특별한 인간이긴 하지만 세상에 큰 족적을 남길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이미 최고가 되는 길을 따르는 중인데··· 왜죠?”
헤일리의 답은 명쾌했다·
“모험을 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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