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1
예언자를 찾아가기 위해 아카테스 신전으로 향하던 중 릴리트가 묻는다·
“괜찮을까? 교수님 초상화 말이야·”
“자기가 가지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시장이 단순히 관심을 넘어 실베린에게 흑심을 품고 있어도 딱히 뭐라 할 수 없다· 그 미모를 가지고 흑심을 가진 이가 없는 게 더 이상한 거다· 이터니아에서 수업할 당시에도 남학생들의 관심을 쓸어갔다고 하니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시장의 권력이 실베린에게 영향을 줄 리 만무하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나한테 히스테리를 부리는 거라면 모를까·
우리는 첫날 하늘범선 출항식 행사를 보기 위해 들렸던 ‘광명의 거리’로 다시 돌아왔다·
거리엔 아직 난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작업자들은 손상된 건물들을 보수하고 잔해들을 치우느라 분주하다·
우리는 신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벽돌공들이 밧줄에 매달려 신전에 금이 간 부분에 반죽을 발라댄다·
그리고 하늘범선이 들이받았던 성당은 얼음이 녹은 것만 제외하면 마지막에 본 모습 그대로다· 부서진 첨탑에 올라가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은 모습이 뜬금없지만 예술적으로 느껴진다·
신전 주변은 가디언들이 삼엄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우리가 신전에 가까이 발을 들이려 하자 가디언들이 급하게 달려와 우릴 막아섰다·
“여긴 출입 금지다· 돌아가·”
“오늘은 문 닫았습니까?”
“꺼지라고· 보면 몰라? 조사가 끝날 때까진 접근 금지라고· 당신이 범인이야? 증거인멸하러 왔어?”
그러면서 기분나쁘게 내 어깨를 툭툭 밀친다· 이전까지는 항상 존대를 하던 가디언들이 이제는 잔뜩 날이 선 채로 응대한다·
그러던 중 가디언들이 난대없이 날아온 바구니에 한대 거하게 얻어맞는다·
“야 이 꼴통새끼들아·”
그러저 얻어맞은 가디언들이 사색이 된 채로 경례를 한다·
“메이슨 지구대장님·”
“대참사를 막아준 사람한테 죄를 몰아가? 범선이 다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멀뚱멀뚱 보기만 하던 새끼들이·”
그러자 그들이 놀란 얼굴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을 더듬는다·
“참사를 막아주신···공로자이십니··· 아니 아 저 죄송합니다·”
“니들은 가서 물이랑 회반죽이나 더 가져와· 꺼져·”
경계를 서던 가디언이 도망치듯 떠나간다·
그리고 메이슨 지구대장이 우릴 맞이했다·
“이터니아의 파견단 맞죠? 부하들의 결례를 이해해주십쇼· 일 터져서 저녀석들 잠도 못자고 일만하고 있습니다·”
“게의치 않습니다· 불청객을 막는 게 저 분들 일이니까요·”
“흠흠 신전엔 어쩐 일로 다시 찾아오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현장 보전 문제로 합당한 사유를 인정받아야 출입이 가능하십니다·”
“웨스트우드라는 분의 의뢰를 받고 조사차 들리게 되었습니다· 사제님을 뵈려는 겁니다· 범선과는 무관하고요·”
질문이 들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자세히 캐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말은 그렇게 해도 깐깐하게 심문할 생각은 없었던 듯했다· 그가 신전 문을 지키던 부하들에게 수신호를 보낸다·
릴리트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올려다 본다·
나는 신전으로 들어섰다·
높다란 층고의 예배당· 색유리로 장식된 창문에서 형형색색의 빛이 내부로 들어온다· 내부는 의외로 손상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예배석 맨 앞에 홀로 앉아 있던 한 여사제가 몸을 일으켜 휙 돌아본다·
“누구시죠?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죠?”
“지구대장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제들에게 무슨 볼 일이 있나요? 여긴 저 말고 전부 대피했는데요?”
“여기에 프록시마라는 예언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사제의 눈이 살짝 씰룩인다· 그러곤 다시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사제가 어디론가로 급히 떠나간다· 1분 쯤 지났을까· 사제가 바구니를 들고 위협적으로 걸어온다·
촤악!
난대없이 우리에게 물벼락을 끼얹는다· 그러곤 울분이 가득한 어조로 소리쳤다·
“양심도 없는 것들· 또 잘난 시의원이 시켰더냐? 아니 옷차림을 보니 제르니아 가문에서 왔네· 내가 지레 겁먹고 술술 불 줄 알았냐! 프록시마 사제님의 사정을 알고도 뻔뻔하게 또 찾아와? 이젠 골수까지 뽑아먹으려고 작정을 한 거냐?”
물을 맞았는데 지금 보니 내 몸에는 가루같이 입자가 고운 서리가 씌워져 있다· 프리실라가 그 찰나의 순간에 날 보호한 건가·
한데 릴리트는 물벼락을 뒤집어 쓰고 흠뻑 젖어서 울상이 되어 있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이터니아에서 온 파견단입니다·”
“무슨 헛소릴··· 예?”
“웨스트우드 영감님의 의뢰를 받고 프록시마 사제님을 찾아온 겁니다·”
“웨스트우드? 어 어머! 자 잠시만요!”
여사제가 식겁한 얼굴로 또 어디론가 달려나간다·
릴리트가 흠뻑 젖은 얼굴로 말없이 날 바라본다· 왜 자기는 보호해주지 않았냐는 원망의 눈길이다·
“내 검이 멋대로 방어한 거야·”
“····”
한껏 이쁘게 꾸미고 왔는데 망가져버렸으니 속이 많이 상하겠지· 나는 소매로 릴리트의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며 말했다·
“젖어도 이쁘네·”
“····”
릴리트가 더 달래주라는 듯이 한층 더 시무룩한 얼굴을 한다·
때마침 사제가 수건을 들고 온다· 그러고는 릴리트의 머리를 벅벅 문지른다·
“꺄앗!”
릴리트는 머리채라도 잡힌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미안해요· 아이고 이를 어째· 내가 사람을 못 알아보고· 이터니아 파견단이면 그 특별 공로자가 계시는 그 무리죠?”
그렇게 물기를 다 닦은 릴리트의 머리는 개털이 되어 있었다·
“공로자요?”
“신묘한 능력으로 하늘범선을 멈췄다고 하셨던데· 사제들은 털끝도 안 다치고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분한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네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그게 접니다·”
사제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경악했다·
***
릴리트는 흠뻑 젖은 드레스에서 수수한 수녀복으로 갈아입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여사제는 우리에게 따뜻한 차를 내주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프록시마 대사제님은 여기 안 계세요·”
“지붕 붕괴 위험 때문에 다른 사제분들처럼 대피하신 겁니까?”
“아뇨 대사제님은 오래 전에 잠적하셨어요·”
“예언자의 업을 내려놓으신 겁니까?”
사제가 고개를 저었다·
“포기하셨다기보단 더는 견디지 못하셔서 그런 게 크죠·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지막 예언을 위해 아끼겠다는 말을 하시고는 떠났어요·”
“수명이요? 혹시 예언에 대가가 필요한 겁니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죠· 신의 계획을 어그러트린다면··· 그 대가는 더욱 크고요·”
“조금 전에 저주를 뒤집어 쓰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거랑 관련이 있는 겁니까?”
사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언자는 세상에 많지만 신의 계획까지 엿보는 예언자는 없죠· 프록시마 사제님은 그게 가능한 예언자였고요· 어릴 적 성녀 후보자로 성도에 머무르기도 했었으니·”
“성녀··· 후보자요?”
“네 하지만 뜻하던 길이 아니라고 스스로 그만두셨어요· 그리고 예언자의 길로 나아가셨죠· 축복받은 신성력을 예지력으로 바꿔 가엾은 이들을 도우신 거예요· 신의 대행자로 태어나서 신에게 반기를 들고 모든 뜻을 거스른 거죠· 욕심이 더 있었다면 지금도 성도에 계셨을지도 몰라요·”
성녀라니·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이야기라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꼭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 다 포기하고 귀향했다는 주정뱅이의 허풍을 듣는 것 같다·
“저주 이야기를 마저 해주시겠습니까?”
사제의 시선이 허공을 향한다· 과거 회상에 푹 빠진 눈빛이었다·
“···신의 계획을 어그러트린 이에겐 저주가 내려와요· 우리는 그걸 ‘예언자의 저주’라고 부르죠·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이게 저주다 하고 표식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오랜기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은 그게 저주인 걸 알죠·”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럽니까?”
“프록시마 사제님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분이었어요· 누가 봐도 감탄사를 내지를 법한 그런 분이셨죠· 그런 수십 년간 늙지 않던 고운 얼굴이 언젠가부터 빛을 서서히 잃어버렸어요· 원인 모를 역병에 걸려 부락민을 이끌고 찾아온 촌장을 돕고 난 다음부터 그랬던 걸로 기억해요· 신은 그렇게 계획을 어그러트린 예언자를 고통스럽게 만들죠· 그렇게 가족을 잃고 재산도 잃고 눈까지 멀어버렸어요· 죽을 사람을 살리고 망할 가문을 재건시키는 예지력을 지녔는데 정작 예언자 본인은 모든 걸 잃어버리는 모순이 어디 있을까요· 저주라고 밖에 할 수 없죠·”
“····”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린 귀족들이 별것도 아닌 일로 엄살을 부리며 예언을 요구했을 땐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라요· 대사제님은 다 알고도 또 사람을 도우려 했으니까····”
여사제가 눈을 질끈 감는다·
“그래서 사제님이 어디 계시는지는 저도 모르고 안다 해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 분명 어딘가에서 조용히 남을 돕고 계시겠죠·”
“알겠습니다·”
웨스트우드 노인의 깨름직한 표정이 이제 이해가 간다· 물을 끼얹은 사제의 심정도 이해가 가고· 예언자의 힘을 빌려 클라리디움의 비밀을 캐내려 한 내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졌다·
마지막 예언을 위해 몸을 아낀다고 했었지· 그 프록시마는··· 클라리디움의 멸망을 봤을까?
예언자가 신의 계획을 어지럽히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다·
섬뜩한 말이다· 그럼 아마릴리스는 내게 미래를 일러주고서 대가를 치르는 건가? 일평생 마주친 적 없는 내게 대체 왜? 그 예지력 또한 신성력을 통해 얻어낸 건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걸 속으로 잘라냈다· 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려도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죽음의 땅으로 가지 않는 한·
***
한나절을 쏟아냈지만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릴리트가 물었다·
“데미안 프록시마 사제님에 대해서 들은 거 있잖아·”
“응·”
“내 막연한 추리긴 한데··· 의심가는 사람이 있어서·”
“···응·”
“혹시 그 사랑의 집····”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예언자는 우리랑 상관없는 사람이고·”
릴리트의 눈이 커진다· 곧이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아··· 응·”
예언자는 머릿속에서 지워내기로 했다· 정말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잠적한 거라면 언젠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에게 찾아가 예언을 전달할 것이다·
우리는 숙소로 복귀했다· 한 시간 쯤 위에 제니아와 헤일리도 숙소로 돌아왔다·
그 둘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들은 방에서 따로 날 불러낸 다음 물었다·
“신입 뭐 알아낸 거라도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선배는요?”
“몇가지 있긴 해· 거울이랑 관련해서·”
“뭐죠?”
“너 혹시 거리에서 유리창을 보고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을 본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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