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2
제니아가 말한다·
“병든 사람 같았어·”
“어떤 점에서요?”
“처음에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거든? 창문 안쪽을 보고 무언가와 대화하는 줄 알았어·”
“····”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이랑 대화하는 거였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거울처럼 비친 자기 모습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거야· 그동안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을 많이 봐왔지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못알아보는 건 처음 봐· 그건··· 개나 고양이들이나 그러는 거잖아·”
“그런 사람을 어디서 보신 겁니까?”
“중심가에서 떨어진 자유 개발 구역이라던가··· 관리가 덜 되는 지역에서 유독 심했어·”
헤일리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신종 환각제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어· 얼마전 수업에서 들은 셰이른 지역이랑 유사하거든· 그리고 더 이상한 게 하나 있어·”
헤일리가 근무표를 테이블에 올렸다·
“이건 뭡니까?”
“로잘린 선배가 몰래 빼돌린 선원들 근무표야· 정확히는 하늘범선 출항식 당일 근무했던 선원이 기록된 거야·”
그리고 또 다른 종이 하나를 꺼내 근무표 옆에 두었다·
“이건 하늘범선 사고로 인한 사망자 실종자 명단이야· 신고된 인원은 총 13명이야· 뭔가 이상한 게 안 보여?”
나는 근무표와 사고자 명단을 대조했다· 이름이 겹치는 게 없다· 뭔가 이상하다·
우리는 분명 얼굴이 뭉개진 선원이 들것에 이송되는 걸 봤었다· 무슨 기술이 동원되어도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우리는 분명 죽은 선원을 봤는데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로잘린 선배가 이상하게 여겨서 하늘범선의 업무에 관여한 선원에게 직접 수소문했어· 그런데 다 하나같이 증언하는₩ 선원은 없다는 거야· 들것에 실려간 시체의 행방에 대해선 아무런 기록도 없어· 선원들은 타지에서 온 이들이 대부분이라 이 도시에 가족이나 친구도 없대· 그러니 실종자를 찾는 사람도 없나봐· 뭔가 구린내가 나지 않니?”
“상부에서 사고 기록을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확실한 건 없지만 뭔가 더러운 일하고 엮여 있는 게 분명해·”
***
나는 세모 꼴의 다락 공간에서 불침번을 섰다· 이 저택은 비교적 고지대에 자리해 클라리디움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커다란 통창을 열고 저 펼쳐진 밤바다의 풍경을 감상했다·
그리고 오밤중에도 불을 켜고 항구를 오가는 배를 관찰했다·
누군가가 사다리를 타고 다락으로 올라온다· 헤일리가 다락문을 열고 두더지처럼 얼굴을 빼꼼 내민다·
“뭐야· 신입이 여기 있었네?”
“선배·”
그녀는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 그러다 중간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이 갈아입기 귀찮아·”
헤일리가 와인병 두 개를 먼저 다락에 올리고 내쪽으로 또르르 굴린다· 그런 뒤 슈미즈 차림으로 올라왔다·
“선배 불침번 차례는 아닙니다·”
“아 제니아 이년이 잠꼬대가 심해서 도망나왔어·”
헤일리가 다락 창틀에 앉고는 능숙한 솜씨로 코르크를 딴다· 그녀는 한모금 들이키고는 내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입 안 닿았어· 깨끗해·”
“괜찮습니다·”
헤일리가 농담조로 툭 던진다·
“신입이 실망이네· 윗사람이 마시자 하면 넙죽 받아먹어야지·”
“선배 그보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릴 건 다 가린 하얀 잠옷이지만 달빛에 닿으면 속이 다 비친다· 헤일리는 별로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다리를 벌리고 허벅지를 벅벅 긁어댈 뿐이다·
“언제 이런 거 신경썼다고 그래? 너 내가 여자로 보여?”
“선배가 여자 아니면 뭡니까·”
“뭐 그렇게 말하니 할말이 없네· 신입이가 선 넘지 않고 잘 지내니까 우리도 편하게 대하는 거야· 알지?”
“선을 넘어요?”
“남자 후배라서 좀 잘해줬다고 헤벌레 해가지고 난대없이 ‘선배가 여자로 보여요’이딴 소리하고 장미꽃 갖다 바치고··· 신입이 넌 그런 애는 아니잖아?”
“그렇죠·”
“미술부에 이쁘장한 여자들이 많아서 속이 시커먼 남자들이 많이 왔었거든· 이터니아엔 신입이 만한 우직한 남자가 없는 것 같아·”
“····”
“아 맞다· 오늘 릴리트한테 무슨 일 있었어?”
“왜요?”
“걔 오늘 방에서 혼자 거울보면서 중얼거리더라고·”
“예?”
“젖어도 이쁘다 젖어도 이쁘다 그러면서 혼자 실실 웃던데· 걔도 미친 줄 알았어·”
“····”
“뭔 일 생긴 거 아니지?”
“괜찮을 겁니다· 하루종일 붙어다녔고 작은 소동이 있긴 했지만 문제없이 끝났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헤일리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 여기서는 바다까지 보이네· 다락에서 불침번 서는 이유가 있었구나·”
“···이렇게 보면 정말 평화롭고 안락한 도시같습니다·”
“동감이야· 아름답고··· 활기가 가득하지· 혼자 그 생각하고 있던 거야?”
“사실 떠나는 배랑 들어오는 배의 수를 세고 있었습니다·”
“진짜 할 거 없었나보다 그치·”
“나가는 배가 더 많았습니다· 이 새벽에 어딜 가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선이겠지· 밤에만 잡을 수 있는 물고기도 있다니까· 그걸 잡으러 나간 거 아닐까?”
“정말 그럴까요?”
헤일리가 와인을 병채로 한모금 들이키고는 내 속내들 꿰뚫어 본 것처럼 말했다·
“불안해? 이 도시에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봐? 다 몰래 피난떠나는 거 같아?”
“···선배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도 불안해· 근데 난 리더고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되니까 이렇게 술과 신입이로 마음을 달래는 중이지·”
“····”
“좀 전에 우리쪽 선원들한테 통지를 보냈어· 언제 갑자기 출항할지 모르니 상시 대기해달라고·”
그녀도 똑같다· 명확한 형태가 잡히지는 않지만 클라리디움이 기울어가는 도시인 걸 직감하고 있었다·
우리는 클라리디움에서 발생한 문제에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없다· 그러니 그냥 문제가 생겼을 때 떠나면 된다·
스스로를 지킬 힘은 있지만 무너져가는 대도시를 구할 힘은 없었다· 떠나는 게 최선이다·
“저도 마셔도 되겠습니까?”
“내 입 닿은 거다· 지지야·”
“괜찮습니다·”
헤일리가 다시 와인병을 내민다· 나는 생각이 많아진 탓에 그 병을 받아서 한모금 들이켰다·
클라리디움이 정말 멸망한다면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은 다 미리미리 빠져나가겠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같이 침몰할 것이다·
문득 고아원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아이들은 괜찮을까·
아마릴리스의 말처럼 클라리디움이 멸망한다면 정말 클라리디움에만 국한된 일로 끝날까·
대도시를 무너뜨린 파도가 다른 곳을 덮치치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
“이게 포상금이야?”
헤일리와 제니아가 눈을 반짝이며 내 손에 들린 금화 주머니를 바라본다·
나는 아침 일찍 가디언 집회소에서 포상금을 수여받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1등 선원 네 달치 봉급과 맞먹는 금액이라고 했는데 이걸 환전하면 리그베드에서 쓸만한 인챈트 소드 두어 개 정도를 살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일정 때문에 빠르게 돈만 받고 나왔습니다·”
숙소 앞에는 미리 부른 마차 다섯 대가 쭉 늘어져 있다· 아카데미 교류전 탐방을 명목으로 경기장과 사육 중인 마수를 탐방할 계획이었다·
저택에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부원들이 부스스한 얼굴로 마차에 올라탄다·
헤일리가 내 손목을 잡고 으슥한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고는 두루마리를 꺼내서 내게 보였다·
“이거· 오늘 아침에 가디언이 찾아와서 주고 갔어· 누구한테 온 줄 알아?”
“누구죠?”
“클라리디움의 시장·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싶대· 연구소 견학이 끝나면 시간이 남을 것 같은데 어떡할래?”
그래 실베린에게 그렇게 마음을 쓰는데 내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
“안 갈 이유가 없죠·”
***
미술부의 마차는 클라리디움의 동부 지구로 향했다·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는 거리와 원뿔모양으로 잘 다듬어진 가로수와 양식이 통일되어 정갈한 인상을 주는 건물들· 꼭 아카데미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우리 옆으로 빈테라가 이끄는 짐수레가 지나간다·
그 뒤엔 커다란 상자가 헝겊에 덮인 채로 실려 있었는데 그 안에선 요란한 소리가 났다·
덜컹!
“크르르!”
마수의 낮은 울음 소리를 울음 소리를 듣자 신경이 곤두섰다·
그 같은 수레가 한 둘이 아니었다· 마수를 실은 마차들이 꼭 행상인인들처럼 태연하게 도시를 가로지른다·
내 옆 앉은 헤일리가 긴장한 듯이 중얼거렸다·
“마수가··· 생각보다 많은가보네·”
내 머리는 멸망의 원인이 될만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마차는 빠르게 나아가 어느 고성 앞에 멈춰섰다· 높다란 성벽과 길게 늘어진 건물은 연구소가 아니라 형무소에 가까워 보였다·
대문 앞에는 가디언을 동행한 어느 중년의 연구원이 우릴 맞이했다·
마차에 내리자 연구원이 헤일리에게 먼저 악수를 건넨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셰비티 연구고 선임 연구원 론도라고 합니다·”
“파견단 대표 헤일리라고 합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뵙자마자 죄송합니다만 파견단을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으로서 한가지 우려되는 게 있습니다· 오던 길에 마수들을 제법 많이 마주쳤는데··· 모든 마수가 안전하게 관리되는 게 맞습니까?”
연구원이 씩 웃으며 말한다·
“연구소에는 고위 마법사와 결계사 그리고 다수의 가디언과 함께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만간 내부에 수용한 122종의 마수는 폐기될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기한다고요?”
“교류전이나 가디언 육성에 필요한 수만 남기고 전부 살처분 예정입니다· 도시 남부나 행정구에 위치한 다른 연구소의 사정도 똑같습니다· 저희 결정은 아닙니다만·”
“안전 상의 문제로 그런 건가요?”
“당장은 아닙니다만 앞으로 그리 될 가능성이 큽니다· 예산이 크게 감축되고 관리 인력이 대다수 빠져나갔으니까요· 클라리디움은 이제 더는 마수 연구에 자원을 쏟지 않을 계획입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