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내가 깨어난 곳은 천국도 지옥도 절벽 아래도 아니었다· 따사로운 햇빛이 창문 아래로 쏟아지는 아카테스 신전의 병동이었다·
다른 병상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만 이곳에 덩그러니 누워 있을 뿐이었다· 창가에는 수녀 한 명이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나는 수녀에게 말했다·
“저는⋯어떻게 여기 있는 거죠?”
수녀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잠깐의 정적 이후 수녀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거라·”
수녀가 나간 후 잠시 뒤에 어릴 때부터 나를 돌봐주던 수녀 돌로레스와 여사제 아제나 수녀장 율란이 들어왔다·
돌로레스는 내가 의식을 회복한 걸 확인하자 마자 곧장 달려와 내 손을 꼭 부여잡고 울먹였다·
“깨어났구나⋯난 네가 영원히 못 일어날 줄만 알았다· 앞으로 무모한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말거라!”
“죄송합니다⋯·”
수녀장이 말했다·
“깨어나서 정말로 다행이다·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거다· 아카테스 여신님이 너를 살피셨구나·“
그 뒤로 수녀장의 따끔한 질책도 이어졌다· 단순히 문제를 일으킨 것에 대한 분노보다는 그저 애정어린 마음으로 나를 질책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질책을 받아들였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고아였다· 피 한 방울 안 섞이고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나를 이토록 보살펴주고 관심을 준다는 건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다·
훈계가 끝나고 내가 의식을 잃은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사제들은 우리가 없어진 걸 알고 난 뒤에 파스칼 가문의 가신들에게 연락을 취했다고 했다· 그러고는 몇 사제들이 가신들과 함께 우리의 흔적을 뒤따라 왔다·
그들이 우리를 찾아냈을 때 나는 시체와 가까운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리자가 널 살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는구나·”
리자는 주변에 있는 약초와 치유 마법을 총동원 해서 죽었어야 할 내 몸을 강제로 소생시켜 놓았다· 사제와 가신들도 놀랐던 건 고위 마법사들도 여럿 손을 모아야 가능했던 일을 리자 혼자서 해냈다는 것이다·
레이스는 내 피를 마시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도주했다고 한다·
레이스는 사냥감의 피를 마시는 게 주특기라고 했다· 헌데 왜 내 피를 마시고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여신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구나·”
수녀 돌로레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특별한 날이면 음식에 성수를 넣어 만들곤 하는데 그 덕일지도 모르겠구나·”
레이스에게 공격이 유일하게 통하는 건 신성 마법이나 성수 뿐이니 내 피에 모종의 이유로 신성력이 작용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럼 리자는요?”
내가 리자에 대해 묻자 그들은 다들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나는 미묘한 기류를 감지할 수 있었다· 말하기 꺼림칙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리자는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위해 떠났단다·”
“입학 준비는 내년에 하는 거 아니었나요?”
아카데미는 통상적으로는 17살 입학이 표준이었고 나와 리자는 15살이었다· 입학 준비 기간을 계산해도 너무 이른 시기였다·
돌로레스가 나를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여기 누워 있는 동안 리자에겐 많은 일이 있었단다·”
리자는 큰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더는 아카테스 신전에서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파스칼 가문에서 결정한 것이었다·
“리자는 가문의 영지에 머물다 아카데미에 조기 입학하기로 했단다·”
나에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파스칼 가문에서는 나와 리자를 완전히 격리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생이별에 가슴이 저려왔다·
나는 보름 뒤 몸을 완전히 회복하고 다시 일상을 시작했다· 수녀들의 정성어린 간병 덕분이었다·
리자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진정한 의미의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했다· 내 곁을 항상 지켜 주던 리자는 더이상 없었다· 그리고 퇴관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나는 아카테스 신전의 보살핌 없이 자립하는 법을 터득해내야 했다·
다시 일을 시작하고 공방에서 차차 인정받기 시작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정식으로 임금도 받았다· 잠만 로레일관에서 자고 하루의 대부분은 공방에서 지냈다·
그렇게 몇 달 지내다보니 허드렛일 담당에서 견습공이라는 정식 직위도 생겼다· 그 뒤로는 내 이름을 달고 직접 물건을 만들어 보석상에 납품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자에게서 편지가 왔다·
거기엔 기대와는 달리 짧막하게 근황만 적혀 있었다·
그녀는 내가 의식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자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전했다·
아카데미 입학시험은 수석으로 통과했고 마법 교습을 도와주던 아카데미 재학생 선배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제는 많이 친해져서 의지하며 지낸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여름 방학을 맞이하면 한 번 아카테스 신전에 찾아갈 것이라는 말과 함께 편지는 끝나 있었다·
리자의 편지를 받아서 기뻤지만 읽고 난 뒤에는 묘하게 허전한 기분만이 남아 있었다·
평소에 날 대하던 리자와는 다르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바빴거나 집안의 감시나 통제가 심해서 짧게 적었으리라 되뇌이며 애써 찝찝함을 털어 버렸다·
나는 즉시 답장을 써서 보냈다· 하지만 겨울 그리고 해가 지나 16살을 맞이하고 봄꽃이 다 저물어도 다음 편지는 받을 수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나는 공허함을 잊고자 금속 세공 기술을 단련하는데 더욱 열중했다·
여름이 되고 제법 손재주가 늘어서 내 물건을 찾는 사람들도 하나둘씩 늘어났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 힘으로 입에 풀칠을 할 정도의 수입은 벌 수 있었다·
어느 날 수녀 돌로레스가 공방으로 가던 나를 붙잡고 말했다·
“리자가 1학기를 마치고 방학 때 이곳에 잠깐 들리겠다고 하더구나·”
그 말을 듣자 심장이 요동쳤다· 리자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이튿날 나는 시간을 전부 쏟아 리자에게 줄 목걸이를 제작했다·
목걸이 장식은 리자가 제일 좋아하던 엘칸토 꽃의 모양을 본따 만들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고대하던 리자가 오는 날· 그날은 공방에 가지 않고 리자를 기다렸다·
멀리서 화려한 장식을 한 마차가 신전을 향해 오고 리자를 기다리는 수녀들과 사제들이 손을 흔들며 환영했다· 나는 그들 뒤에 멀찍이 거리를 두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차가 신전의 정원에 들어서고 문이 열렸다· 거기서 먼저 내린 건 어느 훤칠한 외모의 남자였다· 굉장한 미남이었다· 키는 적어도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복식은 기품 있었다· 행동 하나하나 귀족들만의 품위가 묻어나왔다· 수녀 몇몇은 그를 보자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그리고 그 남자의 손을 붙잡고 리자가 내렸다·
리자는 눈부시게 아름다워져 있었다· 리자의 몸짓과 표정에는 싱그러운 기운이 가득했다· 잘 정돈된 머릿결과 흠잡을 곳 없는 이목구비 은빛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다른 차원의 존재 같았다·
리자와 남자는 자신을 환영해주는 사람들을 향해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엄숙했던 신전이 흡사 축제 현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화기애애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재회의 시간이었지만 나는 말을 걸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진 것중 가장 상태가 좋은 옷을 입고 왔지만 그래봐야 후줄근한 공방 작업복이었다· 내 손금과 손톱에는 아무리 씻어도 빠지지 않는 검은 기름때가 박혀 있었다·
리자와 그 남자는 인사를 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서로 깍지를 낀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가슴에 무게추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 나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신전을 벗어나고 도시의 거리로 나갔다· 모든 걸 벗어던지고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광장의 분수대에 걸터 앉아서 리자에게 줄 생각이었던 목걸이를 온종일 만지작거렸다· 도무지 그들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해가 지고 나서야 나는 신전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오래 나가 있었는지 신전에는 다 불이 꺼져 있었다·
나는 신전의 정원에서 혼자 서성이고 있던 실루엣을 보았다· 그 실루엣은 나를 보고는 곧장 내 앞으로 뛰어왔다·
그 실루엣의 주인은 리자였다·
“왔구나· 어디 갔다 온 거야· 못 보는 줄 알았어·”
리자를 보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안녕·”
“건강해 보여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의식적으로 그녀를 차갑게 대했다·
“···그래· 누굴 기다리고 있던 거야?”
“당연히 너지· 너한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하고· 우리 잠깐 걸으면서 이야기하자·”
우리는 신전 밖으로 나와서 어릴 적부터 항상 산책하던 길로 향했다· 그곳은 달빛이 은은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옛날처럼 이 길을 함께 걸었지만 리자와는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 1년 전의 리자였다면 분명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안겼을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예전처럼 내 손을 잡지도 내게 안아달라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공방에서 일은 잘하고 있어? 아직도 공방에서 일 해?”
“응 이제 나름 인정도 받아서 내 이름을 달고 물건을 팔 수도 있어·”
“잘됐네·”
“리자 너는?”
“다 좋아· 이터니아 아카데미 마법학부에 들어갔어· 운이 좋아서 이번 학기 수석도 했고·”
“축하해·”
“···그리고 학교 다니면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
심장이 무겁게 내려 앉았다·
“갑작스럽게 이상한 소리 해서 미안해· 낮에 네가 신전에 있었으면 아마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엘리엇 선배를 소개해주지 못해서 아쉬웠어·”
“····”
“학기 내내 엘리엇 선배랑 좋은 감정을 유지하다가 얼마 전에 교제하기로 했어·”
그 둘이 이곳에 오고 서로 손을 놓지 않는 걸 보았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단지 내가 이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 회피하고 있었을 뿐이다·
“좋은 사람인가 보네·”
“응· 선배는 내가 신전 로레일관에서 떠나고 가문의 저택에서 머물때 손님으로 찾아왔었어· 이터니아 출신이라는 걸 알고 친해졌지· 선배가 저택에 머물면서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어·”
“····”
“엘리엇 선배는 우리 숙부가 어떤 인간인지 다 알고 있고 나를 보호해줬어· 펠튼 가문의 장남이라 그 덕에 우리 숙부도 함부로 건들지 못해· 지금도 이렇게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다 선배 덕분이야·”
펠튼 가문의 가주인 데런 펠튼 공작은 지금은 황실 기사단의 단장 위치에 있었다· 엘리엇은 명실상부 최고의 권세를 자랑하는 명문가 후계자였다·
나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위치·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갑작스럽게 와서 이상한 소리만 해서 미안해· 그래도 이건 꼭 말해야 했어·”
리자가 밤까지 날 기다린 건 나와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왜인지 말해 줄 수 있어?”
“왜라니···?”
“왜 마음이 달라졌는지·”
구차한 질문이지만 나는 꼭 듣고 싶었다· 모든 이유를 들으면 당장은 아프더라도 언젠가는 납득할 수 있게 된다· 내 어머니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고 날 떠났고 난 그것 때문에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꼭 들어야겠어?”
“응· 들어야겠어·”
리자는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 이후로 모든 게 변했어· 네가 죽을 뻔한 건 내 잘못이야· 내가 별의 조각을 찾으러 가자고 고집부리지만 않았으면 너는 다치지 않았을 거야·”
“····”
“너는 최선을 다해 날 지키려 했지만 결국 목숨을 잃을 뻔했어· 운이 좋아서 결국 레이스는 물러났지만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우린 다 죽었을 거야·”
“난 그때 현실을 깨달았어· 추억과 감정에만 매달린다면 나는 어디에도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우리 둘 다 힘들게 될 거라는 걸· 만약 네가 있던 자리에 선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어· 선배라면 레이스를 물리치고 나와 끝까지 함께 하며 결국 별의 조각을 찾았을 거야· 선배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만큼 단단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
“무엇보다 너는 이제 내 옆에 있어 줄 수 없지만 선배는 그럴 수 있어·”
“····”
“미안해·”
듣고 보니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다·
나는 바보였다· 마음 한구석에선 리자라면 그 어떤 역경이 닥쳐도 우리의 사랑을 굳건히 지킬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신분과 물리적 거리 재력과 재능의 차이를 전부 무시하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누구라도 리자의 입장에 있으면 그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내가 그 남자보다 더 가진 건 리자와의 추억 단 하나뿐이었다· 리자의 삶은 찬란하게 꽃피고 있었고 앞날은 길었다· 앞으로 더 좋은 조건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좋은 경험을 하면서 어린 날의 기억과 애착은 다른 추억들로 덧씌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건 리자에게 잘된 일이었다·
너무도 아팠지만 이젠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리자의 삶에서 내 역할은 이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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