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
이튿날 아침 나와 실베린은 저택 문 앞에 서서 에르제베트와 심사관들을 환송했다·
그들의 마차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그 앞에 서 있었다·
실베린이 말했다·
“듣자하니 에르제베트한테 선물을 줬다고?”
“네· 선생님이 조언해주신대로 사탕을 드렸는데 나름 만족하신 것 같네요·”
“잘했어·”
실베린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 연금술 꼬맹이한테도 선물 줬다면서·”
“네 그 덕에 신기한 사탕 레시피를 받았어요· 다행히도 일이 어찌저찌 잘 풀렸네요·”
사탕 레시피에서 스노우볼이 구르더니 아티팩트까지 이어졌다·
사실 아티팩트가 막아주는 저주가 뭔지도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모르지만 그냥 대마도학자가 줬다는 그 자체만으로 마음이 든든했다·
그런데 내 대답 이후로 실베린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뭐가 문제가 있나?
그녀의 얼굴을 보니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는데 미묘하게 분위기가 다르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런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그녀에게서 아무런 장신구를 찾을 수 없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걸까?
“선생님 무슨 일 있어요?”
“왜?”
“늘 보던 장신구들이 없어서요·”
그녀는 팔짱 낀 채로 내 눈을 마주하지도 않고 말했다·
“몰라·”
딱 그 대답에서만 왠지 모르게 반응이 차갑게 느껴진다·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가?
아니면 나랑 관계가 있나?
“···?”
뭔가 있다· 어제는 분명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하룻밤 사이에 뭐가 실베린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내가 잠시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사이 그녀가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맞다 그 기사단의 포퍼 영감한테 초대장이 왔어· 내일 사교회에 참석해 달래·”
사교회가 있었지· 한동안 아카데미만 생각하다 보니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안 갈 수는 없겠죠?”
“응· 그러면 조금 곤란해· 우리랑 엮인 게 제법 있는 사람이잖니· 그리고 네가 가겠다고도 했으니 별수 없지·”
맞다· 구울 토벌 이후 사교회 참석을 제안 받았을 때 얼떨결에 가겠다 했었지·
“어···가서 춤춰야 되거나 뭐 그런 건 아니죠?”
그래야 된다면 난 오늘 당장 아킬레스건을 끊어낼 생각이었다·
“네가 싫다면 그쪽에서 굳이 강요하지는 않을 거야· 근데 미리 배워두는 게 좋을 걸· 이터니아에서도 무도회는 학기마다 열리거든·”
이터니아···무도회?
그것도 학기마다 열린다고?
청천벽력같은 소식이다·
“거기서 무도회 파트너 못 구하면 엄청 비참해진단다· ‘파트너도 못구한 등신’ 낙인이 학기 내내 따라 붙거든· 그리고 중요한 거 알려주자면 춤 못 추는 파트너는 인기 없어·”
지금껏 실베린에게 전해 들은 것 중 제일 끔찍한 이야기다·
이터니아가 문득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왜 그리 심각하게 말씀하세요·”
“글쎄 무도회에서 한 번 나락에 떨어져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
실베린은 그렇게 말하곤 휙 돌아서서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늘따라 실베린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
메이드들 옆에 서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리리아가 내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녀는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뺐다·
“저···이 반지는 한동안 감춰둘게요· 이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이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리리아도 그리 말한 뒤 반지를 자기 주머니에 넣고는 휙 돌아서서 들어가버렸다·
메이드들이 날 보고는 고개를 슥 젓는다·
“····”
그러니까 나 때문이라는 거야?
***
저택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다들 분주했다·
메이드들은 이터니아로의 긴 여정을 위한 준비물들을 챙겨야 했고 나는 한동안 제조실을 사용할 수 없으니 여분의 포션들을 잔뜩 만들어 둬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바쁜 와중에 집사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집사는 연미복을 마련하기 위해 내 신체치수를 재고 있었다·
그가 의문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꼭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필요한 거라면 그냥 가져다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에요· 정말 중요한 거예요· 꼭 이 운철 반지를 팔아서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벌린 금액에 맞는 걸로 가져와주세요·”
급매하는 거니 제 값은 못 받을 것이다·
아깝긴 하지만 실베린에게 줄 선물을 실베린의 돈으로 마련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내 노고를 들인 것이어야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적어도 내일 밤까지는·”
“알겠습니다·”
집사를 보내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실베린에겐 화려한 장신구들이 너무 많아서 내 세공품은 필요 없을 거라 판단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앞으로 선물은 신중히 뿌려야지·
나는 다시 제조실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리리아가 그리폰 포션을 제조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포션 작업에 동참했다· 오크통 6개 분량의 그리폰의 피를 전부 들고 갈 수 없으니 최대한 많이 포션으로 압축해야 했다·
그렇게 이터니아행 준비를 하며 하루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
바이올린과 첼로의 잔잔한 음악소리가 울려퍼진다·
마차가 나아갈수록 연회장의 소음이 점점 선명해진다·
우리 마차를 보고 이터니아니 뭐니 수근대는 소리도 잦아진다·
평범한 마차가 아니라 이터니아의 인장이 크게 새겨진 마차였기에 아무래도 이목을 잘 끌 수밖에 없다·
나와는 달리 실베린은 집 앞에 마실이라도 나온 듯한 편안한 표정이다· 하기야 그녀라면 이런 곳은 수도 없이 드나들었을 거다·
마차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서고 딸각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실베린이 먼저 내리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우리 주변엔 수십대의 고풍스런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사교회는 기사단의 연무장에서 열리고 있었다·
널직한 잔디 위에 사람들이 술잔을 들고 옹기종기 무리지어 있다·
마차문을 열어준 시종이 우릴 안내했다·
“단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이 사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을 불러모아 연회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서 이는 합격을 기원하는 출정식에 가까웠고 그 행사의 주인공들은 이터니아에 입학 시험을 치르러 떠나는 조이스와 펠릭스 그외 몇몇 기사들이었다·
이들은 시종일관 많은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터니아 예비 학생이라는 딱지는 귀족들의 탐욕과 허영심을 자극했다·
이들이 진짜 이터니아의 학생이 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연줄이 될 테니까·
그리고 모든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교회의 최대어·
이 자그마한 촌구석에 그 많은 귀족들이 모인 이유·
바로 이터니아의 교수 실베린과 그 제자였다·
그리고 소란스런 연무장 한 쪽에서 사람들이 비켜서며 길이 열렸다·
그 중심을 두 남녀가 지나갔다·
굳이 떠들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 느껴질 법한 수려한 외모 덕이었다·
시나트라 백작의 외동딸이자 기사단 단장 포퍼의 조카딸인 낸시는 데미안이 온다는 소식에 시큰둥했다·
포퍼가 데미안과의 자리를 주선해준다 했었지만 이를 단번에 거절했다· 그리고는 다른 이를 소개해달라 요청했다·
그녀는 데미안을 이미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전에 만났던 룬문자가 새겨진 신비한 검으로 구울을 베어내던 검사는 소문과 달리 다소 우악스런 외모였다·
환상이 무너져버린 탓에 그녀는 일찍이 자리를 거절하고 다른 이와 어울리고 있었다·
조이스는 이미 혼담이 오고가는 상대가 있었고 결국 그녀가 선택한 건 펠릭스였다·
데미안이 아카데미 교수의 제자라 한들 아직 이터니아 지망생 신분인 건 똑같다·
기사단 중에 제일 큰 덩치와 자신만만한 성격에서 더 큰 가능성을 보았다·
펠릭스는 데미안이 왜 별거 아닌 놈인지 주구장창 설파했고 낸시에겐 그의 지론이 나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렇게 펠릭스와 어울리던 중 연회장 어느 한 곳에 인파가 몰려있는 걸 보곤 낸시는 의아하게 여겼다·
그 중심에는 수려한 외모의 두 남녀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길을 끄는 건 갈색머리의 한 미남자였다·
낸시는 펠릭스를 이끌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비집고 들어가 구경하고 있던 그녀의 사촌에게 물었다·
“대체 누구길래 그래?”
“이 사교회 최고의 연줄이지⋯·”
“그러니까 누군데·”
“누구긴 대마법사 실베린하고 제자 데미안이지·”
데미안?
일전에 그녀가 봤던 모습과 딴판이었다·
그제야 낸시는 뭔가 오해가 있었단 걸 깨달았다·
“···나 나 잠깐만!”
낸시는 손에든 유리잔을 던지고 곧장 포퍼가 있는 귀빈실로 뛰어갔다·
펠릭스는 영문도 모른 채 그런 낸시를 바라볼 뿐이었다·
***
귀빈실에 들어서자 포퍼가 두팔벌려 환영했다·
그는 실베린의 손등에 입을 맞춰 예를 표하고 데미안에겐 힘이 잔뜩 들어간 악수를 건넸다·
“이렇게 먼 길 건너와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하오·”
실베린이 무심하게 말했다·
“별말씀을·”
포퍼가 접객용 소파에 그들을 안내했다· 그는 데미안과 마주한 자리에 흐뭇한 미소를 하고 앉았다·
잡다한 안부가 오고간 뒤에 포퍼가 잠시 헛기침을 하고 시종을 불렀다·
“이제 들라 해라·”
곧이어 귀빈실의 문을 열고 두 젊은 영애가 안으로 들어왔다·
“소개할 사람이 있소이다·”
이들이 포퍼 옆에 서자 소개가 이어졌다·
“이쪽은 내 막내딸 볼로냐와 조카딸 낸시요·”
포퍼의 두 딸이 치맛자락을 들며 인사했다·
“위젤에서 명성이 자자한 두 분을 만나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실베린은 그대로 무시하고 데미안이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포퍼가 데미안에게 말했다·
“듣자하니 이터니아에서도 무도회가 열린다고 들었네· 나는 자네 검술 실력과 더불어 춤 실력도 무척이나 기대된다네·”
데미안이 난처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제게 춤이라고는 오직 칼춤 뿐입니다·”
포퍼가 허벅지를 치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자네도 여느 검사들이나 다를 게 없구만· 나도 젊을 땐 그랬다네· 마수 앞에선 용맹히 싸워도 무도회에선 다리가 벌벌 떨렸지·”
포퍼는 말을 이었다·
“자리를 마련한 보람이 있군· 낸시 볼로냐 너희가 데미안에게 춤사위를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 내 대마법사님과 둘이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기껏 모신 손님 한 분을 홀로 두는 건 예가 아니니 말이다·”
볼로냐와 낸시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데미안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이 둘이 데미안을 데리고 나가자 실베린이 입을 열었다·
“너무 노골적이네요 포퍼·”
포퍼가 그들이 나간 곳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몇 년 뒤면 혼기가 차는 아이들이니 서로 나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글쎄요· 제 생각엔 조금 이른 것 같은데요·”
“허허 하다못해 제자의 혼사에도 관여할 생각이십니까?”
“이터니아에서도 만날 인연은 많고 보다시피 데미안은 혼기 놓칠 걸 걱정할 만한 아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일찍 잡을까 문제지·”
“데미안에게 성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에게 명문가라는 뒷배가 생기면 그 험난한 이터니아에서도 어깨를 펼 수 있지 않겠소이까·”
“제가 있는데 데미안의 뒷배를 걱정하십니까?”
포퍼가 말실수를 깨닫고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교수 직위에 있는 만큼 그 아이의 모든 걸 봐줄 수 없을 것 아닙니까·”
포퍼가 크게 억지를 부린 건 아니었다·
이제 이터니아에선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되니 지금처럼 대놓고 모든 걸 케어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데미안 스스로 모든 걸 해쳐나가기엔 부족한 것이 많다·
그의 최대 약점은 신분이다·
그 신분 때문에 정치적 문제에 휘말리기도 쉽고 휘말리면 저항도 못하고 압사당할 위험도 컸다·
실베린이 있을 때야 아무 걱정 없겠지만 그녀가 자리를 비우게 될 때가 문제였다·
데미안에게 귀족 비호 세력이 생긴다면 정치적인 위협에서 그를 보호할 수 있었다·
데미안에게 호의적인 세력을 가급적 많이 만들어 둬야 한다·
포퍼같은 인물은 그 시작으로 나쁘지 않다·
그는 영악할지언정 사악하지는 않으니까·
실베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무얼 원하시는 겁니까?”
포퍼가 수염을 쓸며 대답했다·
“허허 이야기가 빠르시구려· 내 돌려 말하지 않겠소· 이 기회에 그대 제자를 후원하고 싶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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