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
나는 술잔에 입 한 번 안 대고 발코니 너머 사람이 없는 곳에다 뿌려 버렸다·
내 마음속에선 이런저런 구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건 나에겐 맞지 않는 일이라느니 나는 혼자가 좋다는 식의 자기 변명들·
나는 술을 잘못 들이켜 속이 안 좋다는 거짓말을 뱉고는 그 귀족 영애들을 연회장에 두고 나왔다·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도망친 거였다·
나는 내 몸에 걸쳐진 연미복을 슥 훑어보았다· 내게 맞춤으로 제작된 것이라는데 하나도 안 맞는 것 같고 숨통만 조인다·
저들은 애당초 나랑 살아온 환경이 다른 인물들이다·
내가 가축에게나 주는 귀리죽을 퍼먹을 때 저들은 새끼 양고기와 벌꿀주를 먹었다·
나와 그들 사이에 관심사의 교집합이 존재할지 정녕 대화와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여기서 혼자 왜 이러고 있어? 모처럼 기회가 주어졌는데·”
뒤를 돌아보니 실베린이 내가 있는 불 꺼진 발코니로 걸어오고 있었다·
“선생님·”
“보아하니 무도회 때 파트너를 못 구해서 망신당할 일은 없겠구나·”
반어법으로 날 놀리는 건가·
“지금 이렇게 혼자 있는 걸 보고서요?”
“아니 네가 버리고 온 여자애들 얼굴을 보고서· 걔네들 죽상이 되어 있었거든· 넌 되려 여자애들한테 비수를 꽂고 다니는구나·”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베린은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뭐가 문제니 제자야· 눈이 너무 높아서 성에 안 차? 아니면 마음에 드는 다른 여자가 있어?”
실베린이랑 같이 지내다보니 내 눈이 주제넘게 높아지긴 했다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 여자들은 제가 무슨 왕자님인 줄 알아요·”
나는 오른손 손바닥을 펴보였다·
“이 굳은 살들이 명문가에서 수련하고 대단하신 보검을 잡아서 생긴 줄 알더라구요· 실상은 공방에서 철가루 뒤집어 쓰고 망치질하다 생긴건데·”
실베린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도 손에 든 잔의 내용물을 발코니 울타리 밖으로 흘려 버렸다·
“제 껍데기만 보고 환상에 빠져 있어요· 저는 그 장단에 별로 맞춰주고 싶지 않아요· 그건 진짜 제 모습이 아니잖아요·”
“원래 인간관계 자체가 가면무도회 같은 거야· 귀족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지· 널 왕자님으로 본다면 그냥 왕자님 노릇도 좀 하면서 적당히 어울려줘·”
“그게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실베린이 타이르듯 말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어· 그리고 넌 가면을 쓰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해?”
“····”
실베린의 갑작스런 물음에 답이 나오지 않는다·
“쟤네들은 여지껏 남자들한테 관심받고 구애받는 게 일상이었을 거야· 그런 애들이 자존심 내려놓고 들이댔는데 저 꼴이 나면 무슨 생각이 들겠니?”
“···저를 싫어하게 될까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쏟은 관심과 애정만큼 돌아오는 게 없다고 느끼면 어느 순간 미워지겠지·”
“····”
“여자들 관심은 양날의 검이야· 한쪽에 과하게 기울어지지 않게 적당히 상대해줘· 그 정도만 해도 네 편이 되어줄 테니까·”
저 영애들이 날 어찌 생각하든 내게 미칠 영향은 적다· 난 어차피 떠나야 하고 여기서 좋은 관계로 남는다 한들 아카데미에 가면 한마디 기별조차 나누기 힘들어질 거다·
나한테 중요한 건 실베린이다·
문득 의문이 든다·
실베린이 말한 ‘여자들’ 중에 그녀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까?
“그리고 기사단에서 널 후원하고 싶대·”
“갑자기요?”
“응· 매 학기 지원해 준다나 봐· 돈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네게 필요한 약초일 수도 있고· 네가 필요로 하는 걸 주겠대·”
그냥 공짜로 주는 건 아닐 거다·
“그 대가는요?”
“네가 매년 이 사교회에 참석해줬으면 한다더라·”
일 년에 한 번 들이는 수고에 비해서 보상이 제법 후하다·
“선생님은 어떤 것 같아요?”
“약속을 지킬 자신 있으면 받아· 방학 때 한 번 내려와서 참석하면 되는 거니까 크게 어렵진 않겠지· 너한테 귀족 연줄이 생기면 득이 될 것도 많고·”
크게 손해볼 건 없다·
실베린도 그렇게 말한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
실베린은 사람들 몰리는 건 지긋지긋하다며 그녀에게 배정된 귀빈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가 그렇게 들어가 버려도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아직 귀족들 눈치를 더 봐야하는 입장이었다·
나는 다시 홀로 연회장에 내몰렸다·
낸시와 볼로냐는 내가 돌아오자 화색이 되었다·
난 실베린의 조언을 그대로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들은 내가 춤에 질색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인지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
이들이 내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연무장 잔디밭 위를 천천히 산책하며 그들은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퍼부었다·
“실베린 님과 어떻게 만나게 된 거예요?”
“검술은 언제부터 배우기 시작하셨죠?”
“구울 토벌한 이야기해주세요·”
나는 적당히 거짓말을 섞어 둘러댔다·
이들은 점잖게 리액션을 해주며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점점 검술에 대한 걸로 흘러갔는데 이들의 질문 받아내는 데 진땀을 뺐다·
나도 검술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으니까·
볼로냐가 연무장 한구석 인파가 몰린 곳에 손을 가리켰다·
그곳엔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모양인지 사람들이 한 지점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종종 탄성과 함께 박수 소리도 터져 나왓다·
“저기 구경가보실래요?”
***
연무장 한쪽에서는 작게 토너먼트가 열리고 있었다·
기사단에서 주관한 사교회다보니 이들에겐 대련이 최고의 유희이자 구경거리였다·
관중들이 둘러싼 곳 중앙에는 두 남자가 겉옷을 벗고 흰 셔츠와 바지를 말아 올린 상태로 목검을 휘두르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검이 오고 갈 때마다 관중들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
대련하는 기사들도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고 관중들도 가볍게 즐기는 분위기였다·
기사들끼리 몇 번의 합이 오고 가고 한 기사의 목검이 강한 타격에 못이겨 휙 날아간다·
관중들이 환호하고 박수소리가 이어진다·
“줄리앙 3연승!”
펠릭스는 관중들 틈에 서서 반대편에 있는 한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펠릭스의 존재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옆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다·
낸시는 펠릭스에게 관심을 보였다가 데미안이 사교회에 오자 바로 그에게 달라붙어 버렸다·
이젠 펠릭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에게 데미안은 불청객이었다· 이 사교회는 기사단과 그 기사들을 위한 자리였다· 헌데 기사단 사람도 아닌 것이 스승의 후광에 힘입어 이 자리에서 주인공 행세를 하고 있었다·
‘네 놈은 여기 있을 자격이 없다·’
펠릭스는 낸시에게 데미안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설명했었다·
구울을 토벌했던 지하실의 흔적을 조사하고 보니까 검술 실력은 엉터리였고 스승한테 받은 인챈트 소드의 힘으로 구울을 잡아 놓고 검술의 천재인 척하고 있다고·
낸시는 펠릭스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믿는 듯한 얼굴이더니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지금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데미안과 어깨를 맞대며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펠릭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하면 된다·
기사의 방식으로·
“다음 도전자!”
진행을 맡은 남자가 소리치자 펠릭스가 그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있던 목검을 주웠다·
펠릭스는 3연승을 이어가던 줄리앙 앞에 섰다·
이는 목검 대련이었고 진검승부와는 결이 달랐다· 목검에 맞아봐야 멍만 들 뿐이지 크게 다치는 게 아니었다·
체구와 맷집이 있는 펠릭스 입장에선 힘으로 찍어 누르면 끝나는 승부였다·
승부가 시작됐다·
잠시 탐색전이 이어지더니 펠릭스가 몸을 들이밀었다·
콱콱콱!
펠릭스는 막구가내로 줄리앙의 목검을 찍어 내렸다·
줄리앙의 목검이 펠릭스의 몸을 가격했지만 그에겐 기별도 오지 않았다·
너무도 압도적인 모습에 관중들 몇몇은 환호했고 또 다른 일부는 탄식했다·
“적당히 좀 하라고 젠장할·”
결국 줄리앙은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검을 내려놓았다·
“펠릭스 승!”
관중들의 미적지근한 박수소리가 퍼진다·
“다음 도전자 있습니까?”
펠릭스가 체구와 힘을 내세워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 탓에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조용해진 연무장에서 관중들의 시선이 돌연 한곳에 쏠렸다·
곧이어 한 소년을 중심으로 관중들이 비켜서기 시작했다·
그 비켜선 곳 중심에는 데미안과 낸시 볼로냐가 서 있었다·
원래 그 자리에 쭉 있었는데 관중들이 마치 대련을 위해 온 것처럼 비켜줘버린 탓에 자연스럽게 다음 도전자가 나온 구도가 되어 버렸다·
곧이어 수근대는 소리가 연무장을 덮는다·
관중들 모두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모습이었다·
데미안은 난처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버티다 관중들 시선에 못 이겨 마지못해 대련장 안으로 들어갔다·
펠릭스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원하던 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데미안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체급에서부터 확실히 우위였고 목검 대련이기에 데미안의 주무기인 인챈트 소드도 쓰지 못한다·
이제 그 엉터리 검술이 탄로나는 일만 남았다·
관중들 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진다·
“잠시만요!”
“구경 좀 할게요!”
실베린의 제자인 데미안의 대련 참가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 연회를 즐기던 이들이 하던일 제쳐두고 대련 장소로 밀집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관중의 수는 세배 가까이 불어나 있었다·
모두들 데미안이 어떤 실력을 보여줄까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진행을 담당한 남자가 사람이 몰리자 대련의 룰을 살짝 바꿔버렸다·
“자자 대련의 룰은 5판 3선승입니다!”
그도 단판으로 끝내기엔 아깝다는 눈치였다·
데미안이 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들고는 잠시 상태를 점검했다·
펠릭스가 그 모습을 보고는 코웃음쳤다·
‘그걸 봐서 뭐 할건데?’
연미복을 벗어 낸시에게 건네고 모든 준비를 마친 데미안은 마침내 펠릭스를 마주하며 자세를 잡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글 쓰다 책상에서 잠들어버렸네요····(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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