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
어느 혈기 왕성한 기사들이 벌인 이 소규모 대련은 어느새 사교회 최대 이벤트가 되어 버렸다·
저마다 구경하는 양상이 제각각이었다·
나이든 귀족 몇몇은 서로 귓속말로 속닥거리며 금화를 주고 받았다·
누가 이길지 내기하는 것이었다·
목검 대련의 본질을 알고 있는 이들은 펠릭스의 우위를 점치고 있었다·
일부 영애들은 데미안의 걷어올린 팔뚝과 윗단추를 풀어 드러난 속살에 눈을 흘겼다·
구경꾼들 한 구석에는 조이스도 팔짱을 끼고 덤덤히 대련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도 속으로는 데미안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사실 소문만 무성했지 데미안이 직접 검을 휘두르는 걸 눈으로 본 사람은 이 관중들 중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조이스는 당연하게도 데미안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검술에 대해 잘 아는 조이스가 보기에도 데미안은 상당히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
펠릭스는 목검 대련의 암묵적인 룰마저 무시하고 달려들 것이다·
급소에 목검을 터치하는 수준으로는 승부가 갈리지 않는다·
귀족들은 그게 무슨 문제인지 알지도 못하고 상관하지도 않는다· 그냥 눈으로 보기에 누가 이긴 것처럼 여겨지는지 신경 쓸 뿐이다·
그러니 힘이든 기술이든 간에 완전히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데미안은 왼손을 자신의 등허리로 빼고 한 손으로만 목검을 쥐고 있었다·
양손으로 쥔 것이 아니니 힘으로 맞수를 둘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진행자가 펠릭스와 데미안의 사이에 서서 양팔을 벌렸다·
둘 모두 준비를 끝내자 시작을 알리는 기합과 함께 진행자가 뒤로 쓱 빠졌다·
‘시작이다·’
관중들이 긴장한 얼굴로 이들을 지켜본다·
펠릭스는 그 자리에 서서 몇 초간 데미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데미안도 가만히 서서 펠릭스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펠릭스가 성난 황소처럼 데미안에게 몸을 들이밀었다·
데미안은 뒤로 몇 번 백스텝을 밟다 펠릭스가 가까워지자 옆으로 빠져 버렸다·
펠릭스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관중들이 가슴 졸이며 탄성을 내뱉었다·
펠릭스가 뒤돌아서 다시 데미안에게 몸을 던졌다·
데미안은 묘기하듯 간발의 차로 그의 검을 피한 뒤에 펠릭스의 디딤발을 걷어차 버렸다·
육중한 몸뚱이가 중심을 잃는다·
펠릭스의 상체가 90도로 기울어져 넘어질 것처럼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허우적거리다 마침내 엎어져 버리고 말았다·
“푸하하하!”
그 모습이 제법 우스꽝스러웠는지 관중들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엎어져 있던 펠릭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젠장·”
반격을 위해 몸을 반쯤 일으켜 뒤를 보는 순간·
목검의 차가운 감촉이 그의 목에 닿았다·
펠릭스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데미안이 다가와 이미 칼끝을 겨누고 있었다·
몸에 맞는 타격은 냅다 무시할 수 있었지만 저항 불가능한 상태에서 목에 닿는 검날은 다른 문제였다·
이리 되면 변명의 여지 없이 펠릭스의 패배였다·
펠릭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데미안 승!”
“우와아아아!”
관중들이 감탄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데미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뒤돌아 첫 시작 지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이스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는 펠릭스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군더더기 없는 승패구도를 만들어 냈다·
펠릭스는 벌떡 일어나 대련 시작 지점으로 걸어갔다·
약이 잔뜩 올랐던 그는 데미안의 곁을 스쳐 가면서 슬쩍 도발했다·
“검을 맞대는 게 그렇게 무섭나? 비겁하게 꼼수나 써대고 말이야·”
데미안은 도발에도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준비를 마친 걸 확인한 진행자가 팔을 올리고 2회전 개시를 알리는 기합을 날렸다·
펠릭스는 이번엔 조금 조심스러웠다· 냅다 들이밀어 봤자 통하지 않을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긴 팔로 데미안을 훅훅 찌를 것처럼 위협했다·
헌데 데미안은 그런 속임수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에라이·”
이에 도리어 마음이 조급해진 펠릭스가 다시 습관을 못 이기고 달려들었다·
데미안이 그에 반응해 몸을 숙였다·
펠릭스의 목검은 다시금 간발의 차로 데미안의 어깨를 스쳤다·
데미안은 뒤로 빠지지 않고 도리어 펠릭스의 팔꿈치 밑에 어깨를 들이밀었다·
그 덕에 이 둘의 몸이 붙고 팔이 서로 엉긴 상태가 되었다·
그대로 싸움이 멈췄다·
‘뭐야···?’
그리고 펠릭스의 목에는 또 다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잠시간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해 눈만 깜빡였다·
몸이 붙은 상태로 데미안의 칼끝도 목에 닿아 있었다·
뭔가 벌어지기도 전에 대련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관중들도 그 짧은 순간에 승패가 결정난 게 납득이 안 가는듯 아무런 환호도 하지 못했다·
조이스도 이를 본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펠릭스의 검술은 막무가내긴 했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제압당할 정도로 허술한 건 아니었다·
헌데 데미안은 모든 게 빈틈 투성이라는 듯 쉽게쉽게 흘려 보냈다·
마치 덩치만 큰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것처럼·
“펠릭스 패!”
그제서야 관중들의 느린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황당함이 뒤섞여 있었다·
펠릭스는 아직도 실력차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데미안의 작전에 휘말렸다 생각했을 뿐·
그는 또다시 데미안을 도발했다·
“마법사 젖을 먹고 자라서 정면에서 싸울 배짱이 없나?”
펠릭스는 잔뜩 약이 올라 있던 탓에 자신의 도발이 관중들에게도 들릴 거라고 미쳐 계산하지 못했다·
그의 도발을 들은 귀족 영애들과 동료 기사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실베린과 데미안에 대한 명백한 모독이었다·
이는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도에도 명백히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조이스가 흥분해서 난입하려 하자 근처에 있던 선배 기사가 이를 제지했다· 선배는 대련이 끝난 후에 처리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데미안은 응수하지 않았다·
“····”
하지만 도발은 명백하게 효과가 있었다·
다음 대련을 위해 원위치로 돌아가고 마주한 데미안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펠릭스는 그를 보고 비열하게 씩 웃었다·
이젠 그도 도발에 응해 정면 승부를 해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펠릭스에게 잘 된 일이었다· 정면 승부는 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니까·
관중들의 분위기도 낮게 가라앉았다·
데미안이 도발에 어물쩍 넘어가면 스승의 명예가 실추되는 걸 방관하는 꼴이 됐기에 이제는 확실하게 응징해야 했다·
펠릭스의 선넘은 언동으로 인해 이젠 가벼운 대련이 아니라 명예를 건 결투가 되어 있었다·
진행자가 곧이어 세번째 대련의 시작을 알렸다·
펠릭스는 크게 도약해 모든 체중을 싣고 데미안에게 검을 내려 찍었다· 동작이 과할 정도로 컸다·
그는 데미안이 빈틈으로 공격하던 말던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데미안은 피하지 않고 검을 팅겨냈다·
‘어라?’
그는 전혀 밀리는 기색 없이 이를 받아냈다·
자세를 바로잡은 펠릭스가 다시금 전력으로 데미안에게 검을 휘둘렀다·
일방적인 공세·
줄리앙을 찍어누를 때와 굉장히 유사한 구도였다·
모두 데미안이 제압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관중들이 눈살을 구겼다· 무례한 언동 덕에 이들 모두 펠릭스의 공세엔 아무런 환호를 보내지 않았다·
데미안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버텨냈다·
그는 단 한 발짝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합이 이루어질 때마다 펠릭스의 손이 점점 얼얼해지기 시작했다·
돌덩이를 때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이건 대체····’
펠릭스는 점점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예 데미안과 검을 맞대고 체중을 이용해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헌데 데미안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 펠릭스를 밀어냈다·
오히려 데미안은 힘으로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펠릭스는 당황하고 몇걸음 뒤로 물러났다·
‘뭔짓을 했길래 저 몸뚱이에 힘이····’
그의 직관과는 어긋난 모습이었다·
그리고 얼얼한 손을 풀고는 다시 앞으로 도약했다·
펠릭스는 체중을 실어 온힘을 다해 데미안에게 검을 내려찍었다·
그리고 데미안도 피하지 않고 도리어 이를 강하게 맞받아쳤다·
캉!
목검이 서로 부딪쳤다· 강한 타격음에 뒤이어 펠릭스가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목검은 하늘로 날아가버리고 그는 뒤틀린 손목을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정면 승부에서도 데미안이 완벽하게 압도했다·
검이 날아가버린 순간 승부는 결정났지만 데미안은 끝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는 가만히 서서 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연무장 일대가 한동안 고요해졌다·
데미안이 대련 이후 처음으로 한마디 뱉었다·
“집어·”
“···뭐?”
데미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다시 목검을 집으라고?
다시 기회를 주겠다·
펠릭스의 자존심을 뭉개는 말이었다·
으득 하고 이가 갈렸다· 그는 얼굴이 시뻘개진 상태로 나가떨어진 목검을 다시 주워왔다·
다시금 자세를 잡았지만 그의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잔뜩 화가 났음에도 차마 먼저 달려들지 못했다·
데미안이 먼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펠릭스의 몸이 저도 모르게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으으 씨·”
대놓고 그 앞에 다가간 데미안이 검을 들고 뻔히 보이는 궤도로 펠릭스를 향해 내리찍었다·
캉!
펠릭스가 전력으로 막아냈지만 목검은 다시 나가 떨어졌다·
“으아아아!”
그리고 펠릭스는 고통에 절어 나뒹굴었다·
그의 양 손목이 충격에 못이겨 벌겋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인대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데미안이 직접 나가떨어진 목검을 주워와서는 그에게 툭 던졌다·
“집어·”
펠릭스가 데미안을 올려다 보았다·
“젠장 젠장 젠장!”
그제서야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펠릭스가 눈을 꾹 감고 애원했다·
“젠장 내가 졌어 졌다고!”
그의 항복선언에 마침내 데미안이 목검을 내려놓았다·
데미안은 쪼그려 앉아 펠릭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관중들의 소리에 묻혀 펠릭스 외에 들은 사람은 없었다·
곧이어 펠릭스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그런 뒤 데미안은 인파를 가르고 대련장을 떠났다·
볼로냐와 낸시 그 외 몇몇 귀족들이 데미안을 뒤따라갔다·
***
“무슨 난리를 친거야?”
기사단 본관에서 하루 머무르고 실베린과 데미안은 이른 아침부터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데미안은 마차 창문에 턱을 괴고 잔잔히 흘러가는 위젤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냥 가벼운 대련이었어요·”
“가벼운 대련인데 그 점잖은 귀족들이 그렇게 신나게 소리를 질러?”
“제 실력이 엄청 궁금했었나 봐요· 선생님이 그랬잖아요· 이쪽 사람들 이야깃거리 엄청 좋아한다고···”
“그리고 뭔데 이리 선물을 많이 받았어?”
데미안이 앉은 자리 옆에는 편지와 리본으로 포장된 선물이 잔뜩 쌓여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주던데요·”
실베린이 궁금함을 못 참고 쌓여 있는 편지 하나를 쏙 빼서 읽었다·
데미안에게 계속 연락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답신을 받을 영지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아주 인기쟁이구나·”
“····”
“그리고 너 대련할 때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은 거야?”
데미안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발뺌하지 마· 나도 본관에서 창문으로 지켜보고 있었거든· 왜 그렇게 화가 났었어?”
실베린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기에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저보고 땅꼬마래요·”
“····”
실베린이 잠시 동정의 시선으로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데미안이 평균보다 작은 건 아니었지만 그가 상대했던 놈은 덩치가 비교될 정도로 우람하긴 했다·
“너무 신경쓰지 마· 너 처음 봤을 때보다는 확실히 크긴 했어· 좀 있으면 훅훅 따라잡을 거야·”
데미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네·”
데미안은 먼 산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래서 너는 그놈한테 뭐라고 답했는데?”
“이터니아 입학시험 때 또 보자고 했어요·”
“···?”
실베린은 그를 노려보며 눈을 좁혔다·
‘뭔가 빠진 게 있는 것 같은데·’
간밤에 무슨 일이 있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 데미안은 전부 말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내 그녀는 혼자 고개를 젓고는 캐묻기를 포기했다·
‘그래 혼자 그러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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