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3
이터니아의 인장이 달린 한 마차는 제국의 국경을 건너고 있었다·
그 마차 안에서 흰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한 노인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가면을 쓴 젊은 수행원이 말했다·
“칼리오스님 원칙 상 돌아가시기 전까지 신원을 감추셔야 합니다·”
“허 또 그놈의 원칙 타령인가· 이런 개활지에 뭔 사람 걱정을 하나·”
“이건 칼리오스 님을 보호하기 위한 절차가 아닙니다· 여긴 제국 영토입니다· 행여나 제국에 이 소식이 들어가면····”
“하 알았네 알았어· 나 또한 아직 제국 사람인데 왜 그리 딱딱한가·”
노인은 옆에 두었던 가면을 들어 얼굴에 고정했다·
곧이어 그의 안면 주변부와 목 주름이 매끈하게 펴지고 머리칼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이러지 않아도 제국이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야· 자네도 알지 않은가·”
수행원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이터니아에 첩자가 있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이터니아는 애당초 제국을 경계하지 않는 곳이야· 지금껏 이터니아에 해가 된 적이 없었거든·”
“그럼 칼리오스 님이 이터니아에 가시려는 이유는····”
“내가 가서 방해해야 균형이 맞지 않겠나·”
칼리오스를 제국에 묶고 있던 맹약도 이제 시효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제국과 완전히 선을 긋고 그는 이터니아에 몸을 의탁할 생각이었다·
제국 정점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던 세 명의 소드마스터 중 한 명이 이탈한다는 소식은 제법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전 칼리오스 님의 선택에 따르겠습니다만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되는지 의문입니다·”
칼리오스는 제국과 거리를 두는 수준을 넘어 필요시 적대 관계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자네도 봤지 않았는가· 그냥 비범한 정도가 아닐세· 그 아이와 제국에 접점이 생기면 어떻게 될지 안 그려지나?”
그들은 이터니아의 신성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제국의 목줄을 채울 것이다·
“···결국 로얄 가드로 키워내겠죠·”
로얄 가드· 제국의 무력 최정점들이 모인 황실 직속 친위대였다·
“내 그 꼴은 죽어도 못 봐· 거기서 썩히기엔 너무 아까운 재능이야·”
제국의 기사들에겐 최고의 영예로 치는 로얄 가드는 사실 재능의 무덤과도 같았다·
로얄 가드가 된 수많은 천재들이 황실의 권력 다툼에 희생되었다·
그가 직접 로얄 가드를 키워내고 지휘해 봤기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소년의 스승도 있지 않습니까· 잘못 건들면 제국은 불바다가 될 텐데요·”
“그 여자라도 종일 제자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어·”
수행원이 그 말의 속뜻을 잠시 생각했다·
“그 여자가 북부로 갔을 때를 기회로 삼겠군요·”
“맞아· 혹시 모르지· 그 꼬마를 볼모로 삼아 훗날 스승도 같이 부려 먹을지·”
“····”
“황실 족속들이 원래 그렇게 추잡하고 비열한 놈들이야· 이미 전적도 여럿 있지 않은가·”
수행원이 입을 꾹 다물고 잠시 생각했다·
“전···그간 스승님의 노고가 전부 물거품이 될까 염려됩니다·”
“허허 다 늙은 마당에 뭐가 아깝겠나· 내가 가만 손 놓고 있으면 훗날 젤단 그놈이 두고두고 날 원망할 게야·”
***
실베린이 두 팔을 하늘로 뻗어 기지개를 폈다·
저택으로 가려면 마차로 아직 두어시간은 더 나아가야 했다·
우리는 숲길에 마차를 세우고 잠시 쉬고 있었다·
마차의 양 문을 활짝 열고 마차 내부로 햇빛과 바람이 들어오도록 놔두었다·
새소리도 적당히 기분 좋게 들려오니 그녀는 노곤해졌는지 그대로 마차 좌석에 누워 버렸다·
실베린의 긴 머리가 밑으로 흘러내려 바닥을 쓸자 내가 손으로 주워 담아 그녀의 몸 위에 올려놨다·
실베린이 반쯤 풀린 눈으로 말했다·
“고마워·”
마차의 폭이 충분히 길지 않아 그녀의 발목이 마차 문밖으로 삐져나왔다·
실베린은 편한 자세를 찾으려 몸을 비비 꼬다가 결국 무릎이 하늘을 보게 다리를 반쯤 접었다·
그 덕에 치마가 허벅지를 타고 스르르 내려왔다· 그러자 그녀는 손으로 치마를 허벅지 사이에 슥 넣어 고정했다·
한쪽 어깨끈도 느슨해져 쇄골이 드러나고 머리도 전부 풀어헤쳐져 있다·
제자 앞에서 아무런 체통도 없다·
날 아직 발달이 덜 된 어린애나 투명인간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그녀를 고뇌가 가득한 얼굴로 관찰하자 그녀도 내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뭘 봐?”
“····”
그리고 실베린은 아직도 아무런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았다·
여자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사교회 같은 중요한 자리에 여자들은 최대한 예쁘게 꾸미고 간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런 자리에도 아무것도 안 하고 나갔다는 건 뭔가 단단히 작정했다는 뜻이겠지·
마치 무언의 항의라도 하는 것 같다·
빨리 저택에 가야 준비를 마치고 전해 줄텐데··
실베린은 심심했는지 내 옆에 있는 편지 뭉텅이에 손을 뻗어 한 장 빼 들었다·
“그거 제 편지····”
“내가 낭독해줄게·”
“····”
그녀는 편지지 봉인을 대충 북북 뜯어내고는 내용을 살폈다·
“달튼 후작 가문의 3남 1녀 중 막내···너무 길다· 딴거·”
그녀는 편지를 대충 접어 던지고는 다른 걸 집어냈다·
“푸핫 얘 아직 어린가 봐 운명을 믿는대·”
또 다른 편지에서는·
“지루해·”
그녀는 그렇게 네 개를 연달아 뜯었지만 전부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휙 던져버렸다·
“이건 좀 특이하네· 그래 눈길을 끌려면 이런걸 준비해야지·”
그녀는 먹물을 먹인 듯한 검은 편지지를 손에 잡고 흔들었다·
“메이헨 인근 안개 도시에 사는 아마릴리스래· 한 번 놀러 오라는데? 안개 도시가 어디야? 너 은근 멀리까지 유명해졌구나?”
낭독이라기보단 내용을 대충 읽고 통보하는 수준인데·
나는 그녀의 말을 반쯤 흘려듣고는 말했다·
“이제 슬슬 가봐야하지 않을까요· 더 끌면 늦을 것 같은데·”
선물 빨리 받고싶지 않으세요?
“몰라 나 졸려· 그냥 이대로 출발해·”
그녀는 정말 그렇게 눈을 감아버렸다·
“····”
나는 실베린의 늘어진 팔다리를 적당히 정리하고 문을 닫은 뒤 마차를 출발시켰다·
우리는 초저녁이 되어서야 저택에 도착했다·
실베린은 그동안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곤히 새우잠을 잤다·
저택 현관 앞에는 커다란 나무 상자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사용인들이 나와 이를 짐수레에 분주히 옮기고 있었다·
다들 이터니아행 준비에 한창이었다·
실베린이 눈을 비비며 마차에서 나왔다·
“선생님· 이터니아에 옮길 짐이 저렇게나 많아요?”
“응····”
그녀는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둘만 가는데 굳이 이렇게 많이 챙겨야 하나· 누가 보면 무슨 집 팔고 이사하는 줄 알겠다·
“이건 거의 전쟁통에 피난가는 수준인데요?”
그녀는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너는 내 저택이 하나 뿐인 줄 아니·”
“···?”
잠깐· 이터니아에도 대저택이 하나 더 있어?
가만보니 짐들이 나랑 실베린의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다른 분들도 전부 가시는 건가요?”
“절반만 남고 나머지 절반은 같이 갈 거야·”
사용인들 사이에 리리아도 땀을 뻘뻘 흘리며 짐들을 수레로 옮기고 있었다·
“리리아도요?”
“왜 같이 갔으면 좋겠어?”
“글쎄요· 타지에 처음 가는걸텐데 적응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저 꼬맹이는 본인이 자처해서 따라가겠다 했어· 아무래도 배운 게 좀 있으니 큰물을 경험하고 싶었나 봐·”
“····”
리리아는 잘 살려는 욕구가 강한 아이였다· 어린 나이니까 그녀로서도 욕심이 좀 생겼을 수도 있다·
이터니아에서 메이드 생활을 하더라도 위젤보다는 보고 들을 게 많겠지·
“그것보다 너는 준비 다 끝났어?”
이제 나도 바삐 움직여야 한다·
“아뇨· 급한 일이 남았어요·”
나는 실베린을 뒤로하고 현관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왜 그리 급해?”
“그런게 있어요!”
나는 저택 복도를 재빨리 지나 내 방에 들어가 문을 꾹 닫았다·
책상 위에는 종이로 포장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내가 집사에게 부탁했던 물건이 틀림없다·
포장을 뜯어내니 그 안에는 내가 원하는 크기로 세공된 루비와 은으로 된 목걸이 줄이 들어 있었다·
보석의 크기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이게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이다·
목걸이가 확실히 반지보다 공이 더 들어가는 거긴 한데 실베린이 이걸 알아줄지는 미지수다·
나는 서랍에서 미완성 작업물을 꺼냈다·
보석을 고정할 수 있게 운철로 기초작업을 해둔 장신구였다· 헌데 보석의 크기가 생각보다 작아 손볼 곳이 많아졌다·
‘빨라도 자정이 넘어서야 끝나겠는데·’
***
실베린은 늦은 새벽에도 깨어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옆에 놓인 촛불에만 의지해 한 편지를 읽어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아랫입술을 툭툭 건드리며 눈을 고정했다·
전혀 그럴 만한 내용이 아니었지만 실베린은 그 편지를 읽으며 이따금씩 즐거운 얼굴로 픽 웃었다·
이미 세 번은 더 읽은 내용이다·
낮에 이미 긴 잠을 잔 탓도 있었고 오늘 급하게 날아온 이 편지를 읽고 생각이 많아져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문 밖으로 조용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곧이어 노크 소리가 울린다·
똑똑·
이 시간에 그녀의 방에 찾아오는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들어와·”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조심스레 열린다·
데미안이었다·
“선생님·”
“어쩐 일이야?”
“깨어 있으실 줄은 몰랐어요·”
“또 무슨 의미심장한 꿈이라도 꿨어?”
데미안은 왜인지 모르게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아뇨·”
그가 뒷짐을 지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실베린은 편지에 마저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뭔진 몰라도 테이블에 놓고 가·”
“···네·”
데미안이 테이블에 작은 상자를 올려두고선 실베린 손에 들린 편지지를 살짝 흘겨 보았다·
거기엔 기사단의 봉인이 찍혀 있었다·
“후원···관련 편지인가요?”
“아니·”
데미안의 얼굴이 굳는다·
“기사단장의 사과문이야·”
“····”
“기사도에 어긋난 언사로 불경을 범하여 진심으로 사죄하겠대· 무슨 일인지 알고 있었어?”
“···네·”
“조만간 사절단을 꾸려 직접 찾아와서 정식으로 사과하겠다네?”
“선생님은···어쩌실 건가요?”
실베린은 그제서야 편지를 든 팔을 내리고 데미안에게 눈을 치켜올렸다·
“나?”
데미안이 긴장한 듯 침을 삼키고 말했다·
“네·”
“이미 됐다고 했어· 이제 이터니아로 가야하기도 하고····”
그녀는 그렇게 말꼬리를 흐렸다가 잠시뒤 다시 말을 이었다·
“누가 이미 혼내줬다고 해서 별로 화 안나·”
데미안이 잠시 굳어 있다가 갑작스레 인사를 건넸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실베린이 그런 데미안을 못가게 불러세웠다·
“왜 벌써 도망가?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화 안 났다고·”
데미안이 시선을 피하자 실베린이 픽 웃었다·
이런 그의 반응을 지켜보는 게 실베린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이건 뭐야?”
실베린이 그가 가져온 작은 상자를 들고는 물었다·
데미안이 어설프게 둘러댔다·
“어쩌다 하나 만들었는데 선생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마침 장신구도 잘 안차시고 해서···”
그녀가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꽃같은 금속 장식이 달린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그 꽃장식 가운데엔 루비가 박혀 있다· 어쩌다 만들었다기엔 세공 수준이 극도로 정밀하고 세련되었다·
“목걸이?”
“네·”
그녀의 입이 못마땅한 듯 삐죽 튀어나왔다·
“끝이야?”
“네···?”
“이렇게 갑자기 와서 냅다 올려놓기만 하면 끝이냐고 다른 건 없어?”
데미안이 딱딱하게 답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실베린이 깊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알려줄게·”
그러곤 데미안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곧장 목걸이를 들어 데미안의 손바닥 위에다 올려두었다·
“집어·”
“···!”
실베린은 몸을 틀어 의자 끝에 몸 절반만 걸쳐 앉았다· 그렇게 데미안에게 등을 보이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슥슥 말아 정수리 위로 올렸다·
곧이어 그녀의 새하얀 뒷목이 드러났다·
데미안이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숨을 죽였다·
“빨리 나 팔 아파·”
그제야 그는 실베린이 뭘 원하는지 눈치챘다·
데미안은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의 등 뒤에 다가가 목걸이를 직접 걸어 주었다·
실베린의 쇄골을 스치는 데미안의 손이 살짝 떨고 있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제자 열심히 키운 덕을 이제야 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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