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4
세 대의 마차와 커다란 짐마차 하나·
그 중에 내 짐은 그리폰의 피 세 통과 포션 운철 주괴와 금속 세공 도구 그리고 옷가지 조금이다·
실베린의 허락을 받아 연금술 서적도 조금 챙겼다·
“준비 끝났어? 어서 타·”
저택에 남기로 한 집사와 메이드들이 앞에 나와 우리를 마중했다· 나는 그들에게 손인사를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저택을 한 번 돌아본 후 마차에 올랐다·
얼마나 지냈다고 이리 아쉽게 느껴지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만에 모든 걸 버리고 왔을 땐 별로 아쉽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아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여기서 지내는 몇 달 간 많은 게 달라졌으니까·
나는 실베린에게 물었다·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까요?”
“음 그건 나도 장담할 수 없어· 별일 없으면 방학 때 오겠지?”
“별일 없으면요?”
“응·”
꼭 무슨 일이 생길 것처럼 이야기하신다· 이터니아 학생이 되면 방학 때도 마냥 쉬는 건 아닌 모양이다·
준비를 마친 마차들이 하나씩 이동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터니아로 떠난다·
***
실베린은 이동하는 시간을 무척 아까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빨라도 장장 20일가량을 마차에서 지내야 했다·
그녀는 이동할 때나 이터니아에 도착한 이후에도 시간이 남으면 수련을 계속 할 거라고 말했다·
“아직 필요한 게 좀 더 남았어·”
체력과 근력은 쓸 만할 정도로 올라왔지만 그녀는 내 마력 총량을 늘리지 못한 걸 종종 아쉬워했다·
“아쉽게도 여기엔 지름길이 없어· 계속 마력을 고갈시키고 회복하고를 반복해야 늘어·”
문제는 난 마법을 사용할 줄 몰랐고 내 검을 아무대서나 소환할 수는 없었기에 마력을 소진할 방법이 마땅히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속해서 내 마력을 소진시켜줄 마도구를 이용하면 됐다·
“이터니아에 가기 전에 네게 필요한 마도구를 장만해놔야겠어· 그러는 김에 새 검도 하나 구하고 말이야·”
“새 검이요?”
“응· 가면을 쓰고서 늘 쓰던 검을 가져갈 수도 없고 마검을 항상 소환할 수도 없으니까·”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럼 검을 총 세자루나 다룬다는 건가· 조금 머리 아파지는데·
“쓰던 검의 외형만 바꿀 수는 없나요?”
실베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오히려 더 복잡할 수도 있어· 들키기도 쉽고·”
***
우리는 무려 세 개의 국경을 지나야 했다·
거쳐야 하는 영지는 수도 없이 많았고·
검문이나 야영을 준비하는데 있어 필시 문제가 생길거라 여겼는데 이는 괜한 기우였다·
위젤을 떠나 페더튼 지역의 어느 소도시에 진입할 때였다·
물동량이 많은 도시였던지 성문 앞 검문소에는 짐마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빠지는 속도만 보면 반나절은 걸릴 것 같았다·
그러던 중 검문소 옆길을 따라 도시 경비대가 말을 타고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이터니아의 귀빈을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들은 마차에 달린 이터니아의 인장을 알아보고는 별도의 절차 없이 바로 도시에 들여보내주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영주가 우릴 초대해 성에서 머물 수 있게도 도와주었다·
나흘 뒤 율리시아 공국의 국경을 지날 즈음 레인저들이 먼저 우릴 찾아와 호위를 자처했다·
“실베린 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런 대접 덕에 열흘 가까이 이동하면서 야영은 고작 두번뿐이었고 야영하면서도 불침번이나 약탈 야습을 대비할 필요가 없었다·
긴장이 다 풀어져서 그저 시간을 죽일 뿐이었다·
나는 호기심을 못 참고 실베린에게 물어보았다·
“왜 국경을 불문하고 이터니아에게 이리 호의적인 거죠?”
그녀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음· 나한테나 이터니아한테나 여러 국가가 빚을 졌거든·”
“빚···이요?”
“응 아주 큰 빚·”
이터니아에 점차 가까워질 수록 대접도 좋아졌다·
세아린 영지에서는 도시민들 전부가 이터니아의 마차 앞에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했다·
그곳 영주는 나에게까지 존대하며 귀빈으로 대했다·
“대마법사님의 제자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실베린의 옆이라 할지라도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실베린은 내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너희 교감 선생님 공이 크단다·”
플랜테라가 이터니아 인근 지역의 마수들을 정리해주고 있었고 지역 영주 대부분은 이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덕에 우리는 대접받으며 이동할 수 있었던 거고·
일련의 사건들 덕에 나는 이터니아의 위상을 비로소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
예상보다 여정이 나흘정도 길어졌다·
미리 정했던 경로가 폭우로 강물이 불어 막혀 버렸고 우리는 방향을 틀어 제국의 국경선 끝자락을 경유했다·
애당초 변수가 생길걸 대비해 기한을 넉넉하게 잡았던 덕에 이터니아에서의 일정 수행에는 차질이 없었다·
우리는 제국 끝자락에 있는 베론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좀 으스스하네요·”
길가에 있는 이정표들 일부는 부서지거나 관리가 안 되어 있었다 길 중간중간엔 부서진 마차 바퀴가 보였다·
제국의 레인저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창문 밖을 내다보는 실베린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이상해 원래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
“몇 번 와보셨나요?”
“음 일찍이 레인저들이 마중 나와야 하거든·”
“좋지 않은 거죠?”
실베린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응····”
마차로 주변 산세가 무척 가파르다·
달리 돌아갈 만한 길은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는 베론 마을을 경유해야 했다·
전방에는 안개가 잔뜩 끼어 시야가 가려져 있었다·
두어 시간을 더 나아가니 희뿌연 안개들 사이로 마을의 초입부가 점차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베린의 표정이 점차 굳어가기 시작했다·
“전부 마차를 세우라 그래·”
“왜 그러시는 거죠?”
곧이어 줄지어 가던 마차가 전부 우뚝 멈춰섰다·
“마을에서 결계가 느껴져· 마법사들이 앞에서 진을 치고 있어·”
“결계요?”
그녀는 잠시 가만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런 곳에서 우릴 기다린다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제가 알만한 사람들인가요?”
“음 네 손님들인 거 같은데?”
마법을 쓰고 나와 실베린을 찾는 거면····
“설마····”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놈들이 이런 식으로 우릴 맞이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맞을 거야· 여기서 기다려· 마차 밖에는 절대 나오지 마· 여기 있으면 안전해·”
실베린이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날 찾아온 거라면 나도 도망치고 싶지 않다·
“저도 가겠습니다·”
“아니 여기 있어·”
“····”
그녀는 내 눈을 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내 말 들어· 넌 여기 있어야 돼·”
“⋯·”
그녀는 한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고 재차 반복했다·
“약속해· 여기 있겠다고·”
나는 그녀의 요구에 못이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실베린은 단호하게 선을 긋고는 혼자 마을 방면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실베린이 대마법사라 한들 적진에 홀로 그렇게 들어가는 건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다·
그들은 수적으로 우위에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나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건가·
달리 방법이 없다· 실베린을 믿는 수밖에·
***
실베린은 뒷짐을 지고 마을 입구로 사뿐히 걸어 들어갔다·
조금도 긴장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실베린이 들어서자 안개들이 서서히 걷히며 마을의 전경이 드러났다·
마을 중앙 대로변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슴에는 커다란 얼음송곳이 박혀 있다·
검붉은 피가 마을을 온통 적셨다·
이 참상을 바로 목격하고도 실베린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익숙하다는 듯 그녀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이를 둘러볼 뿐이었다·
“시간도 없는데 이제 슬슬 나오지 그래?”
그녀가 그렇게 외치자 잠시 후 마을 건물들 뒤에서 하얀 로브를 두르고 가면을 쓴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걸어나왔다·
데미안이 꿈에서 말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이들을 천천히 실베린의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녀는 양옆에 도열한 마법사들의 수를 눈대중으로 훑어보았다·
얼핏 보아도 백 명은 넘는다· 더군다나 몸에 두른 마력의 수준을 보면 최소 중상급 마법사들이었다·
이 정도의 병력을 부릴 수준이 되려면 지방의 영주나 평범한 귀족의 수준을 한참 넘어서는 권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황실과 연이 깊은 최고위 귀족 아니면 제국에서 손꼽히는 마법사 가문의 당주·
머릿수를 봐서는 이들은 작정하고 결단을 내려고 온 모양이었다·
“우선 용건부터 들어 볼까?”
한 마법사가 앞으로 나와 그녀를 마주했다·
“제자를 넘겨라·”
“왜지?”
“이유는 없다· 우리 임무는 그뿐이다· 넘기던가 죽던가· 둘 중 하나다·”
그녀가 도발적으로 응수했다·
“날 죽인다고?”
“네가 아무리 잘났다 한들 혼자서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나?”
“····”
마법사가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미 네가 두고 온 마차도 포위됐다· 이제 그만 잠자코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다·”
실베린이 팔짱을 끼고 천천히 서성거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가면을 쓴 이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죽이려고?”
실베린과 마주한 마법사가 팔을 휘둘렀다·
곧이어 바람이 불며 안개가 전부 걷히고 하늘에 부유하고 있는 수천 개의 얼음 칼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칼끝은 전부 실베린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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