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6
머리가 터질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실베린의 얼굴엔 피가 몇 방울 튀어 있었다·
백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이고 그녀가 받은 피해라곤 그 몇 방울의 피였다·
그녀는 번민에 잠겨 미처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피에 젖은 은색의 머리카락 말고는 남은 증거가 없었다· 이조차도 가문과 연관된 물증으로 쓰기엔 빈약했다·
주동자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목적을 위해선 혈족이나 가신들까지도 도구적으로 이용하고 가차없이 폐기처분하는 놈들이라는 것뿐·
그녀는 숯더미가 된 시체들을 뒤로하고 다시금 마차가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돌아갔다·
데미안의 과거가 줄곧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리고 이터니아에 있는 그 누군가가 자꾸만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전투로 인한 육체적 피로보다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인해 발생하는 정신적 피로가 그녀를 괴롭혔다·
데미안이 마차 문을 한 손에 꽉 붙잡고 실베린을 마중나와 있었다·
그는 멀찍이서 그녀를 바라보다 마침내 안도한 얼굴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리고 그런 데미안을 보니 실베린을 괴롭히던 잡념들이 단번에 녹아 없어졌다·
그녀는 말없이 다가가 데미안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약속을 지켜줬구나· 잘했다 제자야·”
“····”
데미안은 어찌할지 몰라 두 팔을 허공에 두고 석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데미안의 팔이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았다·
실베린의 품 안에서 그가 고개를 살짝 들고 말했다·
“걱정했어요·”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내 걱정이야·”
“그···대체 마을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우선 여길 빠져나가고 이야기해 줄게·”
그녀는 천천히 구속을 풀어냈다·
데미안을 먼저 마차에 들여보내고 실베린이 뒤따라 들어갔다·
자리에 앉고 그녀가 마부석 쪽을 툭툭 두드리니 마차가 다시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화염이 휩쓸고 간 자리는 바람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잠시 뒤 마차가 마을 초입부에 들어섰다·
모든 걸 다 태우고 남은 잿더미 속에서 연기가 아직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차 문 틈으로 매캐한 향이 비집고 들어왔다·
데미안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해 있자 그녀는 커튼을 쳤다·
“네가 보기엔 아직 어려·”
“····”
곧이어 뒤따라오는 마차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꺄아악!”
리리아의 비명소리였다·
백 구에 달하는 타죽은 시체들은 트라우마로 남기 충분했다·
데미안은 그가 평생 잡을 마수의 수만큼이나 사람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무 일찍부터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실베린과 함께하는 동안은 데미안은 어린아이로 남아 있어도 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널 노리는 가문이 있어· 왜인지는 몰라· 일단 본보기를 보여줬으니 한동안은 잠잠할 거야·”
데미안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실베린은 적어도 입학시험 전까지는 이번 일에 관해서 굳이 긴 이야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괜히 그의 마음을 심난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데미안은 온전히 이터니아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가 주머니를 뒤적거리곤 실베린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선생님 이거요· 피 닦으세요·”
“···고마워·”
그녀는 그제서야 한숨 돌리고 얼굴에 묻은 핏방울을 닦아냈다·
아쉽게도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실베린은 그저 다음 공세까지의 공백 기간을 조금 늘린 것뿐이다·
그들은 다시 온다· 왜인지 모르지만 데미안은 그들에게 여전히 위험 요소로 남아 있을 테니까·
이 다음엔 수법은 좀 더 교묘해질 거고 머리카락 한 톨의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베린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리고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데미안은 지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해져 있을 테니까·
***
유려한 강줄기가 산세를 가르고 길게 뻗어 있었다·
마차는 강 중류를 따라 이어진 길을 타고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길을 나아가면서 호위 기사들을 대동한 마차와 마주하는 일이 굉장히 잦아졌다·
마차들마다 제각각 명문가들처럼 독특한 인장이 박혀 있었다·
짐마차를 끌고 가는 교역상들도 제법 보였다·
실베린이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말했다·
“이제 이터니아의 영역권에 들어온 거야·”
“전 이터니아가 이런 오지에 위치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이 근방은 지도만 봐서는 잘 몰라· 여기도 제법 멋지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창문 너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거대한 범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원시적인 대자연의 풍경 사이에 껴있기엔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이제 진짜 이터니아에 들어서는구나· 설렘과 긴장이 뒤섞여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터니아에 반나절만 더 가면 이터니아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아직은 계획에 없었다·
실베린의 저택에 가기 전에 우리는 ‘리그베드’라는 어느 소도시에 잠시 들를 예정이었다·
언덕 능선이 끝나는 지점을 꺾어들어가니 마침내 리그베드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뒤로는 가파른 산세를 앞에는 호수같이 폭이 넓은 강을 낀 이 도시는 집집마다 세모난 지붕 위로 새하얀 증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도시 전체에 수증기가 자욱한 것이 마치 옅은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리그베드의 신묘한 분위기에 빠져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실베린이 말했다·
“포션 제조한다고 종일 물을 끓여대서 증기의 도시라고도 불려·”
실베린이 말하길 리그베드는 이터니아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했다·
이터니아에 필요한 물자들을 수송해내는 중간 거점이었으며 각종 마도구와 연금 재료들 각종 교재와 참고 서적들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를 끼고 오랜 기간 뿌리내린 덕에 유서 깊은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잔뜩 꼬인 산세를 타야 하는 오지에 위치해 있는데 교역이나 재료 수급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더불어 각 대륙의 고위 귀족들이 이터니아에 머무르는 탓에 제국과 공국 도시연합의 대사관도 이곳에 모여 있었다·
마법 학회와 연금술 협회의 이터니아 지부도 이곳에 위치해 있었고 재학 중인 이들의 혈족 가신 시종들이 자주 드나들어 유동 인구도 상당했다·
나는 리그베드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좁은 평지에 고밀도로 건물을 쌓아 올린 저 도시에서 출신 성분이 다른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지내는 게 가능한 걸까·
문득 의문이 들어 실베린에게 물었다·
“저기에 이종족들도 있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리그베드라고 이종족까지 함께 섞여 살지는 않아·”
하기야 이종족까지 있었다면 저 도시는 진작 불바다가 되어 사라졌겠지·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 리그베드 도시 초입부에 도달하니 플랜테라들이 우릴 반겼다·
이들은 굳건히 서서 도시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먼길 떠나 이곳에서 다시 마주하니 묘하게 반가웠다·
거리를 지나는 수많은 인파들이 우리들의 마차를 몇차례 흘겨본다·
귀빈이나 교수들 같은 특별한 사람만이 탈 수 있는 이터니아의 마차이다 보니 아무래도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거리엔 내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굉장히 많았다·
살면서 내 나이대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있는 건 처음 구경해 본다·
실베린은 커튼을 쳐서 주위 시선을 전부 차단했다·
“여기서 네 검을 새로 장만할 거야·”
실베린은 주먹만한 크기의 한 가죽 주머니를 내게 건넸다·
“받아·”
“···?”
묵직한 주머니였다· 열어보니 그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걸 왜····”
“그걸로 네가 직접 고르고 있어· 나는 잠깐 마법 학회에 들려야 하니까·”
“전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걸요·”
무슨 가게가 있고 어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시세 조차도 제대로 아는 게 없다·
“여긴 사람 등쳐먹고 그러는 시장바닥이랑은 달라· 그리고····”
실베린은 품 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터니아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였다·
“이걸 보여주고 내 이름을 대면 적당한 거로 골라줄 거야·”
데미안이 건네받은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말했다·
“···저는 어디로 가면 되죠?”
그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지금 어디를 이동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바로 커튼을 제쳐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실베린이 지목한 곳은 Y자로 된 교차로 중앙에 위치한 어느 가게였다·
“필린의 대장간?”
“다른 데는 가지 말고 저기로 가·”
“알겠습니다·”
“단단하고 오래 쓸 수 있는 걸로 골라· 막 이상한 인챈트 붙어 있고 그런 거 사면 혼낼 거야·”
마치 장난감 고르는 어린애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걱정 마세요·”
실베린이 마부석 쪽에 세 번 노크하니 이내 마차가 멈춰섰다·
“여기서 먼저 내려·”
“지금부터 가면을 쓰는 게 좋을까요?”
“응· 가급적 조심하는 게 좋겠지만 필린은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그 할아범도 이터니아랑 연이 깊은 사람이니까·”
나는 에르제베트에게 받은 가면을 얼굴에 올리고 마차에서 내렸다·
실베린이 가볍게 손인사하고 마차문을 닫았다·
곧이어 마차가 다시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뒤따라가는 마차 안에서 리리아도 나를 보고는 작게 손인사했다·
날 보고 사람들이 작게 웅성거린다·
이터니아의 마차에서 내려서 그런지 주변 시선이 따갑다·
나는 금화 주머니를 품 깊숙이 집어넣고는 필린의 대장간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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