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9
리그베드의 중심지에는 커다란 광장과 분수대가 있었다·
다른 나라들의 주요 도시들과는 달리 병사 수천이 모여 열병식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껏 해봐야 마차 대여섯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이고 이 공간의 낭비가 리그베드에선 가장 큰 사치였다·
릴리트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이 광장이야말로 리그베드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비싼 전경이라 할 수 있었다·
분수대 맞은편에는 마법 학회의 이터니아 지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이터니아의 인장이 새겨진 검은 마차 세대가 주차하고 있었다·
저 검은 마차들은 릴리트의 욕망을 자극했다·
리그베드에서 가장 비싼 저택에서 머무른다 해도 그녀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릴리트는 십대 시절 내내 이터니아 입학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왔다·
이제는 그 결실을 코앞에 두고 있다·
‘나도 저 마차를 당당하게 타고다닐 날이 과연 올까?’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날의 희열감을 잠시 상상했다·
그리고 눈을 다시 뜨자 건조한 현실이 그녀를 마주했다·
“하아·”
꿈과 망상에 젖어 해야할 일을 미뤄선 안 됐다·
릴리트의 책상엔 제국에서 날아온 편지들로 가득 쌓여 있었다·
그녀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제국의 대사관이 바로 옆 건물이었던 덕에 그녀는 직통으로 날아오는 편지에 시달리고 있었다·
릴리트는 편지를 하나씩 펴서 읽고는 차근차근 답신들을 적어냈다·
넌덜머리가 난다 해도 절대 대충 넘어가선 안 됐다·
그녀는 자신의 장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 편지를 보낸 이들의 성비만 봐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열에 아홉은 남자들이었다·
편지로는 다들 제국의 명예니 제국의 마법적 성취니 대의명분과 미사여구를 들먹여가며 이터니아 입학을 순수히 응원한다 내숭을 부리고 있었다·
릴리트는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지금 상황에서 성별만 남자였다면 이런 응원의 편지는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을·
이런 식으로 공을 들여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친밀감을 쌓고 그렇게 해서 이 남자들이 얻으려는 건 결국 릴리트의 미모와 육체라는 것을·
남자란 대부분 그런 생물이었다· 뻔하고 시시하고 추잡스럽다·
이들이 릴리트의 마음과 육체를 가져가는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저 관심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을 던지며 관리 할 뿐이었다· 이들이 지속적으로 그녀에게 이득을 줄 수 있도록·
릴리트가 5황자에게 보낼 답신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누군가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일전에 그녀에게서 가면의 남자를 추적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호위대장이었다·
그는 정중하게 릴리트에게 경례한 후 보고를 올렸다·
“가면을 쓴 남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침을 삼켰다· 아티팩트를 도둑맞았던데 이어 그녀가 특별히 강조했던 명령마저도 시원찮은 결말이 났기 때문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릴리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들어가 봐요·”
“죄송합니다· 조금 더 병사를 풀어 수색을····”
“괜찮아요· 그 사람은 적이 아니에요· 제 복을 걷어차겠다는데 어쩌겠어요·”
릴리트는 호위대장을 적당히 달래고 돌려보냈다·
그녀의 상처 난 자존감은 편지의 답신들을 적으며 회복된 지 오래였다· 굳이 이 일에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그 남자가 재학생인지 아니면 그녀와 같은 입학 지망생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터니아에서 다시 마주할 인연이었다·
얼마나 잘난 놈인지 모르겠지만· 검과 마법이 세상을 전부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건 정치다·
황제는 검법과 마법에 문외한임에도 제국을 통치하고 있다·
그녀는 주특기인 마법에 있어서는 손꼽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터니아 최고의 ‘연줄’이 될 것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장담할 수 있었다· 그놈은 언젠가 자신을 무시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리라고·
***
도둑을 잡은 이후로 따라붙는 이들이 생겼다·
나를 특정할 수 없게 하도록 가면을 벗고 망토도 장만해 의복까지 전부 가렸다·
목검을 묘목의 형태로 바꾼 뒤 잡다한 약초 한 묶음을 사서 거기 엮은 채로 움직였다·
이렇게 하니 다행히도 마법학회 앞에 도달할 쯤에는 따라붙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마법학회 건물 앞에서 내 모습을 본 실베린은 날 혼낼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필린의 대장간’을 가리키지 않았니? 혹시 다른 데로 간 거야?”
“아뇨· 거기 다녀온 거 맞습니다·”
“어디 잘못 들어가서 사기당한 거 아니지?”
“····”
나는 돈주머니를 그대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실베린은 주머니가 여전히 묵직한걸 확인하고는 말했다·
“검은 어쩌고?”
나는 묘목의 밑동을 잡았다· 곧이어 이는 목검의 형태로 변모했다·
실베린은 팔짱을 끼고 이를 보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적당한 거로 골랐네·”
“사정이 생겨서 행색을 좀 바꿔야 했어요·”
“그래? 어서 마차로 가자· 광장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
나는 약초더미를 따로 짐마차 뒷칸에 싣고 실베린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가 신호를 주자 마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멀리 가지 않고 리그베드에서 머무를 거야· 그리고 학회에서 이터니아 관계자를 붙들고 이것저것 캐낸 게 좀 있어· 네가 알아두면 좋을 것들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머무를 곳에서 네 입학 동기가 될 애를 만날 거야·”
“그 애도 전투부인가요?”
“아니 마법부· 시끄럽게 사는 애니까 굳이 말 걸거나 하지는 마·”
제법 활기찬 성격일 것 같은데 굳이 말을 걸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친해지면 안 되는 건가요?”
“음· 그냥 사람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
“특히 남자는 더·”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가 나를 다소 긴장케 했다·
광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리니 고급스런 저택이 우리를 반겼다·
저택의 정문 위에는 늑대얼굴이 그려진 금색 현판이 붙어 있었는데· 만듦새로 보아하니 어느 명문가의 별관으로 쓰이는 것 같았다·
요란한 바퀴소리를 들었는지 정문에는 집사와 긴 금발의 소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저 소녀가 실베린이 말한 그 아이인가·
그들은 실베린을 보고는 정중하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금발의 소녀가 말했다·
“교수님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는 무심하게 답했다·
“응· 오랜만이네· 신세 좀 질게·”
금발의 소녀는 날 그저 감정 없는 눈길로 잠시 훑어볼 뿐 별다른 행동은 없었다·
나도 실베린의 당부를 기억하는지라 별다른 제스쳐를 취하진 않았다·
집사가 우리를 안내했다· 저택 내부는 그리 넓지 않았다· 나와 실베린은 각각 귀빈실을 배정 받고 시종들에겐 방 두 개를 알아서 나눠 쓰도록 했다·
“일단 짐 정리하고 내 방으로 와·”
실베린은 그렇게 말하곤 먼저 들어갔다·
정리할 짐이랄 것도 별로 없어 나는 잠시 침대에 누워 대기했다·
시끄럽게 지낸다는 말 치고 저택은 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똑똑·
누군가 내 방문을 노크하고는 문을 열고 얼굴을 쏙 내민다·
리리아였다·
“실베린 님께서 부르셔요·”
“알았어요·”
나는 몸을 일으키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는 옆 방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
“들어와·”
안에서는 실베린이 반투명 네글리제만 걸치고 티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앉아·”
그녀는 다리를 꼬고 나른해 보이는 얼굴로 턱을 괴었다·
내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니 그녀가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를 내 앞으로 슥 밀었다·
거기엔 낯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실베린이 말했다·
“입학시험은 개별적으로 치르는 게 아니야· 다 한곳에 모여 같은 목표를 두고 시험을 치르지· 다른 애들과 협력하건 경쟁하건 그건 네 맘인데 적어도 누구를 상대하는지는 알아두는게 좋을 거야·”
“이건····”
“추천서를 통해 이터니아에 들어올 아이들의 명단이야·”
“제가 이걸 알아도 되나요?”
“상관없어· 이미 소문이 퍼질대로 퍼졌거든· 너만 모르고 있으면 불공평하잖아?”
잠깐 그러면 나에 관해서도 벌써 다 소문이 퍼진 거야?
그녀는 하나하나 이름을 짚어가며 설명을 이었다·
“게일 바리안느는 나랑도 안면이 제법 있는 애야· 북부 출신이거든· 나이에 안맞게 노련하고 못 다루는 무기가 없어· 너 못지않게 감각이 좋아· 얘도 전투부고·”
나는 얼굴은 잘 기억해도 사람 이름을 잘 기억 못 하는데· 이렇게 말해줘도 다 까먹을 수도 있다·
“루나는 좀전에 너도 봤지? 이 집 주인이거든·”
“···!”
방금 마주했던 금발의 소녀가 바로 루나구나·
그녀는 사람 특히 남자를 싫어한다니 앞으로도 같이 잘 지내는 건 무리일 것 같다·
“세실 폰타르는 인챈터니까 네 직접적인 경쟁상대는 아니야· 다만 나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내키진 않더라도 좀 친하게 지내도록 해·”
나는 의도해서 친해지는 건 잘 못하는데 그저 세실이라는 애가 사람과 남자를 좋아하는 성격이길 바랄 뿐이다·
“사실 다른 애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 내가 널 부른 이유는 따로 있어·”
그녀는 검지손가락으로 마지막 줄에 적힌 하나의 이름을 짚어냈다·
“이 아이 때문이야· 얘는 바다 건너 옆대륙에서 이름 좀 날렸었대· 대단하신 소드마스터가 직접 애지중지 키운 제자로도 유명하다네·”
부끄럽지만 나는 소드마스터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잘 알지 못했다· 외부 세계와 교류가 거의 없는 곳에서 오랜 기간 지내온 탓이다·
“이번 입학 지원자들 중에 이 여자애를 이길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나 봐·”
“아무도···못 이겨요?”
“응· 승부욕의 화신이라네· 이미 게일을 비롯해서 다른 유망한 애들이랑 붙어봤는데 전부 이 애한테 박살이 났다나 봐· 재밌을 것 같지 않니?”
“····”
어디가 재밌을 것 같다는지 모르겠다·
실베린은 왜인지 모르게 기대에 찬 듯한 어조였다· 이렇게 따로 부른 건 나에게 경고나 주의를 심어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던 건가·
그녀가 지목한 건 나 또한 이미 마주한 적 있는 소녀의 이름이었다·
그것도 몇 시간 전 이곳에서 멀지 않은 필린의 대장간에서 마주했다·
나는 그 이름을 가만히 주시했다·
시온 이자렐·
“네 라이벌이 될지도 모르는 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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