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3
“야야 사탕아·”
남자는 사탕을 달라는 줄 알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니 그거 말고 네가 이름을 도통 안 알려주니까 부를 말이 없잖아·”
그래서 세실이 정한 것이다· 좀 유치하게 느껴지긴 헸지만 달리 특징이 없었기에 그를 한동안 ‘사탕’이라 부르기로·
남자는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식의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가 아침 식사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개울가 쪽으로 움직이자 세실이 따라붙었다·
“야 같이 가·”
개울가는 야영지에서 3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남자는 바지를 걷어붙이고 개울가에 들어갔다· 그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목검을 작살처럼 휙휙 던져댔다·
세실도 발을 살짝 담갔다가 화들짝 놀라 빠져나왔다·
“미친 너무 차가워·”
세수조차 겁날 정도로 냉기였다·
온몸은 근육통에 저리고 종일 땀을 흘렸는데 옷을 갈아입을 수도 목욕을 할 수도 없다·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그녀는 씻는 건 포기하고 자갈 위에 쪼그려 앉아 남자가 고기잡는 모습을 구경했다·
남의 집 귀한 자식들 모아다가 이게 뭐하는 건지· 조금 더 품위있는 방식은 없었냐고 이터니아에 따지고 싶었다·
남자를 가만히 보다가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사탕아 일로 와봐!”
물고기 사냥이 길어지자 그녀는 남자에게 손짓하며 불러들였다·
하던 걸 멈추고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 세실은 가방에서 마법폭탄을 꺼내 건넸다·
“이거 써·”
남자가 이게 뭐냐는 식으로 폭탄과 세실을 번갈아 보았다·
“에휴 내가 보여줄게·”
세실은 마법폭탄의 몸통을 한번 비틀고는 물고기 무리지어 있는 개울가 한곳에 휙 던졌다·
퍼엉!
곧이어 폭성과 함께 새하얀 서리가 사방에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근방의 물은 전부 투명하게 얼어 버렸다·
“너 이쪽엔 문외한이구나? 서리바람 폭탄이야· 효과 설명은 안 해도 되겠지? 가서 얼은 물고기만 건져오면 돼·”
남자가 감탄한 듯 그 자리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끼니거리는 앞으로 이거로 마련해· 중요할 때를 위해서 아껴두던 건데 그냥 쓰려구· 대신에 거점 갈 때까지 나 확실하게 책임져야 돼· 알겠어?”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은 배시시 웃었다·
사실 늦어도 저녁 쯤에는 거점에 도달할 거고 이 둘은 해산할 테니 많이 쓸 일이 없었다· 그냥 생색내기용일 뿐·
“야 이건 중요한 거야· 말로 약속한다고 해·”
남자는 세실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의 요구를 무시하고 물고기를 회수하러 개울로 들어갔다· 불필요한 건 하지 않겠다는 듯이·
세실은 수작이 통하지 않자 발끈하고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씨 목소리 한 번 들려주는데 뭐 이렇게 비싸게 굴어!”
***
가면의 남자와 세실은 식사를 마치고 다시 거점 방면으로 나아갔다·
남자와 동행하는 게 어느정도 익숙해지자 세실은 그에게 말을 쏟아냈다·
“얼굴은 왜 가린 거야· 낯가려? 아님 진짜 못생겨서? 제국의 비밀 인간 병기야?”
“있지 나 궁금한 건 진짜 못참는 성격이거든·”
“····”
“에휴 그냥 자고 있을 때 한 번 벗겨 버릴걸·”
플랜테라의 기습은 몇차례 더 이어졌다· 이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피로감이 점차 누적되었다·
세실은 당장에라도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남자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세실은 사지가 분해된 플랜테라의 몸통에 걸터앉아 연초를 뻐끔뻐끔 피며 말했다·
“넌 안 피곤해? 뭘 하고 살았길래 그렇게 체력이 좋아? 성벽 벽돌이라도 날랐니?”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얼마 쉬지도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세실은 그 모습을 보고 잔뜩 투정을 부렸다·
“이이이씨 쫌만 쉬면 어디가 덧나냐?”
몇 시간 그렇게 나아가니 시야가 탁트인 큰길이 나왔다· 거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남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팔을 뻗어 세실을 붙잡았다·
잠시 뒤 멀직이 떨어진 곳 수풀 사이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머릿수는 총 다섯· 네 명은 검을 차고 있고 한 명은 로브를 걸치고 있다·
그들도 근처에 낯선 이들이 있단 걸 인지하고 있었다· 다른 지원자를 만나 안도해야 할 상황인데 그들은 별로 그런 기색이 아니었다·
지치고 찌들어 있고 세실 쪽을 보고는 적대하는 분위기를 풍겨왔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긴 했지만 자기들이 합류하면 저들에게 불이익이 될 건 없다는 생각에 세실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잘됐다· 가서 쟤들이랑 합류하자·”
남자의 손목을 잡고 무리를 향해 끌고 갔다·
헌데 그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챙!
다가오려는 이들을 보고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곧이어 무리는 천천히 옆으로 이동해 거점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아섰다·
세실이 이들을 보고 말했다·
“뭐야?”
무리 중 리더격으로 보이는 이가 말했다·
“니들 이 길로 지나가려고?”
정갈한 기사복을 걸치고 있지만 말투가 마치 통행료를 받아가려는 산적떼들 같았다·
세실이 답했다·
“왜 안 돼? 이 길이 니네 소유야?”
“너희들은 다른 길로 돌아가· 여긴 우리가 갈 거니까·”
그녀는 인상을 구기고는 말했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우리가 길 다 터놓으면 졸졸 뒤따라서 날로 처먹으려고? 그건 안 되지·”
세실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졸렬한 발상이다· 자기들은 전부 아무도 다니지 않은 길을 개척해온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단순히 경쟁자를 쳐내기 위한 것임을 세실은 빠르게 직감할 수 있었다·
세실은 팔짱을 끼고선 까칠하게 받아쳤다·
“왜 꼬와? 그래서 어쩌려고· 죽이기라도 할 거야?”
지원자들끼리 직접 싸우며 경쟁하지 않아야하는 이유가 있었다·
배부된 지도 뒷면에는 지원자간 분쟁에 대한 룰이 적혀져 있었다·
‘무력 다툼은 최대한 지양하길 권장· 불가피하게 지원자간 분쟁이 일어날 경우· 상대를 기절이나 탈진 정도로 제압하는 건 허용되나 심한 부상을 입힐 경우 즉시 실격처리 된다·’
저마다 단단히 무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격렬히 싸운다면 의도하지 않아도 중상자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실격을 무릅쓰고 분쟁을 일으키려는 작정인가?
“여기에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냐? 불구로 만들어도 나는 몰랐다 하면 끝이야·”
“····”
칼을 든 남자들 중 일부는 세실의 얼굴과 찢어진 치마 사이로 드러난 다리를 기분 나쁘게 힐끔 거렸다·
마법사처럼 보이는 남자 하나가 리더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리더는 세실의 얼굴을 몇 번씩 쳐다보았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본 듯한 눈치였다·
“오호···너 마도학부냐?”
“그게 왜?”
리더가 재수 없게 씩 웃고는 환영한다는 듯 검을 무르고 두 팔을 벌렷다·
“마도학부면 이야기가 다르지· 우리 경쟁자가 아니니까·”
급격히 달라진 태도에 세실은 오만상을 찡그렸다·
그는 세실의 일행을 위아래로 훑고는 말했다·
“딱 봐도 가망 없어 보이는 그룹인데 우리랑 협력하겠다고 약조하면 동행해 줄게· 꽤 괜찮은 제안 아니야?”
그는 자신의 어깨에 붙은 인장을 잘 보라는 듯 툭툭 치며 말했다·
“대충 실력이 어떨지는 알겠지? 이게 뭘 상징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이길론 기사단의 인장· 마수들만 전문적으로 처리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도는 없고 용병대의 성격이 강한 집단이었다· 실력과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이리도 속이 좁은 놈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리더는 칼끝을 가면의 남자에게 겨누고 말을 이었다·
“물론 저 새끼는 버리고 온다는 게 조건이야· 미안하지만 칼잡이들은 포화상태거든·”
세실은 옆을 돌아보았다·
가면의 남자는 상대의 위협에도 목석처럼 가만히 서서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다· 세실에게 별다른 제스쳐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세실 혼자서도 이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라면 마도구들의 성능을 대인전에 맞게 설계하지 않아 심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제안은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사탕아 그냥 다른 길로 가자·”
한발 무르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세실이 뒤돌아서 떠나려하자 가면의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
남자가 세실의 눈을 가만히 마주했다· 그는 세실과는 다른 생각인 듯 보였다·
곧이어 차분하게 세실의 귀에 속삭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
“뭐?”
세실과 만나고서 그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갑작스러운데다 상상과는 다르게 목소리도 멀쩡해서 그녀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세실이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말했다·
“싸우려고···?”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맘대로 해·”
가면 속으로 보이는 남자의 눈동자는 금빛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독특한 눈동자네· 기억해 놔야지·’
세실은 어떻게 하나 지켜나 보자는 심정으로 잠자코 그의 말을 따랐다· 플랜테라를 상대하는 걸 봐선 실력자인 건 분명했으니 믿어볼 가치는 있었다·
그녀가 기사들을 노려보며 성큼성큼 뒷걸음쳤다·
리더가 그 모습을 보고는 목에 핏대를 세웠다·
“하 결국 이렇게 나오시겠다?”
세실이 적당히 거리를 벌리자 가면의 남자는 목검을 빼 들고 기사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리더가 칼날을 세우고 동료들에게 수신호를 내렸다·
기사들은 경계 태세를 취하며 남자를 빙둘러 포위했다· 사냥감 주위로 자리를 잡는 움직임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능숙했다·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듯했다·
마법사가 후방에 서서 주문을 외고 다섯 개의 화염구를 소환했다· 이는 허공에 부유하며 가면의 남자를 겨냥했다·
세실은 멀직이 서서 그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가면의 남자가 먼저 움직였다·
그가 취한 행동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남자는 목검을 마법사의 발치에다 가볍게 휙 던지고는 투항이라도 하듯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기사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검을 내던진 모습을 어처구니 없다는 듯 가만히 보았다·
“···?”
“뭐야?”
곧이어 자기들끼리 눈을 마주치며 낄낄 웃어대기 시작했다·
“흐흐흐·”
“풋·”
“큭큭큭 아하하하하하!”
“여자 앞에서 폼잡다가 푸하 끅끅·”
기사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배를 잡으며 박장대소했다·
그러는 사이 목검이 기괴하게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돌연 마법사가 소리쳤다·
“잠깐 잠깐! 야 이 이거 뭐야!”
목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묘목이 나타나 마법사의 몸을 거미줄처럼 옭아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가면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발 아래쪽으로 팔을 크게 휘둘렀다·
돌연 그의 손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큰 폭발이 일어났다·
콰앙!
그들이 서 있던 자리는 눈 깜짝할 새에 흙먼지로 자욱하게 뒤덮여 버렸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