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6
몇몇 마법사들이 플랜테라에게 빙결 마법을 거는 걸 관찰했었다· 플랜테라는 체온을 유지할 필요도 없고 동상에 걸리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외피를 얼려도 곧장 얼음을 부시고 움직였다·
플랜테라를 빙결로 제압하려면 내부에서부터 꽁꽁 얼려야 한다·
세실이 준 폭탄은 물고기를 잡을 때 썼던 것보다 훨씬 성능이 좋았다·
마도학자 특성상 소모품이 고갈되면 전투가 다소 힘들어질 텐데· 생명줄과 같은 마법 폭탄을 내게 건넸다고 생각해 보면 기분이 좀 묘하다· 예상보다 큰 호의를 받았다·
최상위 선발대를 위한 관문은 아직 더 남았고 돌파 여부가 불확실한 구간도 있었기에 꼭 시험해 봐야만 했다·
실험은 대성공이다·
이번 세실의 선물 덕에 약간의 활로가 트였다·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다· 플랜테라의 펀치가 무지막지하게 아팠다·
시험장에서 플랜테라를 상대하면서 체감한 것이 있었다· 이것들은 지원자들을 제압하려 할 뿐 죽이려 들지 않는다· 이러한 전투 기제 때문에 긴장이 조금 풀려 있었다· 내 불찰이다·
릴리트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다· 잔뜩 겁을 먹었던 모양인지 아직도 조금씩 훌쩍거린다·
나는 벽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바닥을 구른 탓에 옷이 엉망이다· 망토 안에 가려진 셔츠에 피가 배어 나온다· 썩 좋은 상황은 아니다·
릴리트는 마음이 덜 진정된 상태로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할 말은 해야겠지· 훌쩍 구해줘서 고마워····”
“····”
“이제 확실히 알겠어· 너는 엄청 쎈게 맞았어·”
“그리고 너는···너는 내가 살면서 보고 들은 인간들 중에 가장 미친놈이야·”
온실에서 나고 자랐는지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는지 모르나 보다· 그리폰 포션의 레시피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알면 게거품을 물겠는데·
역경을 통해 동지의식이 생기고 자시고 하는 우정 스토리도 좋지만 당장에는 릴리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제대로 된 방어구 하나 안 걸쳤던지라 충격을 온통 몸으로 받아냈다·
나는 망토를 벗겨 냈다· 그런 뒤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릴리트는 내 행동에 의문을 보였다·
“···?”
그녀는 잠시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잠깐 지금 뭐하는 짓····”
셔츠를 벗으니 내 맨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내 어깨와 가슴부가 돌부리에 찍혀 살이 파여 있었고 옆구리에서 등까지 살이 깊게 찢어져 있었다·
그녀는 상처를 보고 내 행동의 이유를 대강 수긍한 듯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배낭에서 포션을 꺼냈다· 실베린이 다쳤을 때 쓰라고 준 포션이었다·
릴리트의 시선이 따갑다· 그녀는 뒷짐을 지고 가만히 서서 나를 멍하니 내려다 본다· 발을 꼼지락거리는 게 영 거슬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고개를 슬쩍 돌린다·
“····”
치마를 벅벅 찢어내던 세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너 남자 몸 처음 보니?
나는 코르크를 열고 한 병을 목구멍에 냅다 들이부었다· 포션 성분이 혈관에 돌기 시작하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내부 손상은 적당히 치유될 것이다·
빈 병을 옆에 버리고 다른 한 병을 꺼냈다·
릴리트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빈 병을 주시한다·
“자 잠깐 너 뭐 마신 거야?”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병을 열어 상처 부위에 대충 붓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 이거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그러고는 내게 달라붙어 손목을 붙잡았다·
“유리병에 박힌 이 문양· 확실해 메리카니아 특제 엘릭서잖아·”
릴리트는 식겁한 얼굴이었다·
“너 엘릭서 사용 방법도 잘 모르면서 이건 어떻게 구한 거야? 돈주고도 못 구하는 건데!”
“····”
그런 말을 하면서도 릴리트는 몇 번씩 훌쩍거렸다·
대단하다는 건 대강 알겠는데 아파 죽을 것 같은 사람을 붙잡고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릴리트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그···· 아니다· 에휴 이리 줘· 내가 발라줄게·”
릴리트는 내 손에서 포션을 낚아채고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손수건에다 포션을 적시고는 잠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자 바른다?”
그런 뒤 비장한 얼굴을 하고는 내 상처 부위에 툭툭 찍어 바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뭐가 그리 긴장되는지 손에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얼마나 열중했는지 자신이 진회색 머리카락 일부가 내 몸에 닿아 피로 물드는 것도 모를 정도다·
그녀는 남은 한 손을 자기도 모르게 내 몸에 올렸다가 저혼자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어···· 그 드 등 보여줘·”
내가 몸을 돌리자 릴리트는 내 상처 부위에 포션을 도포하는 작업을 계속 진행했다·
“엘릭서는 회복 속도가 빨라서 천천히 바르지 않으면 훌쩍 흉하게 아물어·”
과거 레이스와 싸우다 생긴 뱃가죽의 관통 흉터가 마음에 걸린다·
그녀는 따로 언급은 안 하지만 이 흉터는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될 만한 것이다·
내게는 훈장같은 거라 흉터를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특정될 수 있으니 가면을 쓰지 않았을 땐 함부로 상의를 벗으면 안 되겠다·
“봐 이쁘게 아물었지?”
이제는 훌쩍거림도 그치고 얼굴엔 뿌듯한 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릴리트가 엘릭서의 뚜껑을 닫았다· 상처가 전부 아물었지만 포션이 일부 남아 있었다·
상처가 아문 걸 확인하고 옷가지를 챙겼다· 여기서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릴리트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대답이라도 해주면 어디가 덧나?”
나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조금씩 하늘을 덮고 있었다·
***
조이스는 위젤 기사단 동료들과 함께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동료 기사 줄리앙이 말했다·
“여기가 맞지?”
“잠시만·”
조이스는 지도를 꺼내들었다· 그가 손에 든 것은 이터니아 심사관들이 배부한 거와는 다른 지도였다·
리그베드에서 수소문해서 간신히 구해낸 이 지도엔 1거점을 거치지 않고 바로 2거점으로 직행하는 비밀 루트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 덕에 이들은 다른 지원자들은 모르는 곳을 가고 있었다·
“확실해· 근데 여기에도 플랜테라가 대기하고 있을 거라고 했는데?”
공식적으로 배부된 지도를 따라가는 것보다는 적게 만나겠지만 이 지름길에도 플랜테라가 일부 상주하고 있을 거라고 경고했다·
지도를 판매한 약초꾼의 설명과는 달리 골짜기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일단 가자·”
그들은 비공식 지도에 표시된대로 길을 나섰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다 어느 한곳을 보고는 줄리앙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으아악!”
그는 조이스의 팔을 붙잡았다·
“젠장· 여기에도 플랜테라 문지기가 있었어!”
줄리앙이 골짜기 한곳에 손을 가리켰다·
집채만한 크기의 플랜테라가 골짜기 한곳에 두 팔과 머리를 걸친 상태로 모습을 일부 드러냈다·
1거점 이후에야 볼 수 있다는 문지기가 비공식 경로에도 버티고 있었다·
이터니아는 역시나 지원자들이 이런 경로를 통해서 진입할 것도 예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큰 기대는 안했지만 역시나 그들은 꼼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줄리앙이 동료들과 도망치려 하자 조이스가 그들을 다그쳤다·
“잠깐 잠깐·”
조이스는 뭔가가 부자연스러운 걸 직감했다·
“기다려 기다려! 봐봐· 저거 움직이질 않는데?”
동료들이 전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문지기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빼꼼 내밀고 위젤 기사단을 무섭게 내려다보는데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진짜네· 뭔가 이상해·”
기사단 동료들이 전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조이스가 손짓하자 그들은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골짜기를 꺾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와 돌무더기들로 가려진 곳을 비집고 들어가자 커다란 공터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목격한 이들은 충격에 빠졌다·
누군가가 먼저 와서 이곳을 휩쓸고 지나갔다·
수십에 달하는 플랜테라들이 양단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제일 압권인 것은 플랜테라 문지기였다·
집채만한 크기의 문지기가 상반신이 통으로 절단된 채로 골짜기 한쪽 암벽에 처박혀 있었다·
“이게 대체····”
그리고 문지기의 상체 절단면엔 시퍼런 잔광이 남아 연기를 내고 있었다·
조이스가 말했다·
“···다른 지원자가 먼저 지나갔나보네·”
줄리앙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연신 흔들어대며 말했다·
“대체 이건 무슨···· 미친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야·”
“····”
“···젠장할 이건 괴물이야· 설마 우리같은 지원자가 한 짓이야? 아니지? 우리랑 급이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조이스는 플랜테라 잔해들을 가만히 주시했다·
시퍼런 빛을 남기는 검에 대한 소문은 조이스도 익히 들은 바 있었다·
게일과의 일전에서 이미 퍼질대로 퍼졌으니까·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어·”
그 사람에게 붙은 수식어가 제법 많았다·
마검 시벨린의 주인· 백 년의 재능· 소드마스터의 제자·
소문이 맞았다· 이건 지원자 그 누구도 비빌 수 없는 압도적인 경지다·
“시온 오직 시온 뿐이야·”
***
가면의 남자는 사슴을 잡고 적당한 양의 고기를 챙겼다· 릴리트는 마른 나뭇가지와 버섯들을 채집했다·
짐들을 전부 동굴에 옮기고 나니 때마침 비가 쏟아졌다·
동굴 안쪽에 쌓아둔 나뭇가지 앞에서 그가 부싯돌을 틱틱거리자 릴리트가 말했다·
“비켜봐· 그럴 필요 없어·”
그녀가 주문을 외자 바로 불이 피어올랐다·
“····”
남자는 말 없이 꼬챙이에 버섯과 고기들을 끼워 넣었다·
릴리트는 떨어지는 빗물에 손수건을 대고 비볐다· 손수건은 피 때문에 시커멓게 얼룩이 져 있었다·
“에휴 아끼는 건데·”
그녀는 비가 안닿는 바위쪽에 손수건을 펼쳐두고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꼬치에 사슴고기와 버섯들을 끼우고 불 위에 굽기 시작했다·
굳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합이 척척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 표류 끝내 맞이한 묘한 안정감· 평소 지내던 곳에 비하면 심하게 열악한 환경이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지글지글 구워지는 꼬치를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저기”
“····”
“이쯤 되면 우리 사실상 동료같은데· 안 그래?”
남자는 릴리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허·”
하루종일 동행하고 부상 당한 거 직접 손봐주고 구한 식량들 사이좋게 나눠먹고 단둘이 동굴에서 야영하고·
이런 역경을 함께 해쳐나갔는데 동료는 아니야?
언제든 작별없이 릴리트를 버리고 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온다·
서러움· 그리고 묘한 서운함이다·
본심은 안 그러더라도 그냥 대답이라도 이쁘게 해 줄 수는 없나?
릴리트는 잔뜩 심통난 얼굴로 말했다·
“너 진짜 못돼 처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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